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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낯선 모습을 보이다

  • 점장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모여정은 우아하게 돌아서서 그대로 떠났다.
  • 그녀는 고희의 사람들에게 무시했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민망해하지 않았다.
  • 모여정의 모습에 점장은 감탄했지만 전강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전강현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 “전 대표님, 지금 제가 바로 모여정 씨를 내보내겠습니다.”
  •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전강현의 속마음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점장이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전강현이 입을 열었다.
  • “방금 저 여자가 한 말 아주 일리 있는 말이야.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고객을 이렇게 상대해서야 되겠어? 고객을 모두 하늘처럼 대해야 하는 거야. 고희의 직원들 수준이 별로 높지는 않네.”
  • 말을 마친 전강현은 휠체어를 밀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 그와 고희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가 교통사고로 서지 못하게 되면서 고희는 가게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전강현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 전강현의 말에 고희의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말하지 못했다.
  • 모여정의 접대를 맡은 신입 직원은 점장과 다른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손님을 끝까지 접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모여정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 몇 분 뒤.
  • 전강현은 고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 그인 줄 모르는 고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 “들어와.”
  • 전강현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자 고희는 기쁜 얼굴로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서서 그의 앞으로 나왔다. 전씨 가문의 보디가드는 뒤로 물러서서 문을 닫고 나갔다.
  • “전 대표,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여기까지 찾아왔대?”
  • 여성 수트를 입고 짧은 커트머리를 한 고희는 아주 깔끔하고 세련됐다.
  • 그녀는 미인이라고 할 수 없으나 깨끗해 보이는 용모에 우아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 “근처 지나가다가 고 대표 생각이 나서 들렀어.”
  • 전강현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 고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 “영광스러운데.”
  • 그녀는 전강현을 소파 앞까지 밀고 갔다.
  • “내가 소파까지 부축해줄까?”
  • “아니, 그럴 것 없어.”
  • 전강현은 스스로 휠체어를 잡고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 이런 행동에 전강현의 잘생긴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 의사는 재활치료를 계속한다면 몇 년 뒤에 정상인처럼 걸을 수도 있다고 했다.
  • 하지만 그때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재활치료를 받지 않았다.
  • 그 타이밍에 그의 가문에서 그에게 중매를 서준 것이다. 결혼을 한다면 전강현이 다시 자신감을 되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가 밤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평소 그가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들은 모두 멀찌감치 떠나갔다. 누구도 그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자 가문에서 모여정이라는 시골 출신 아가씨를 찾아간 것이다.
  • 그런데…
  • 전강현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 예전에 그녀가 뭐라고 했든 지금은 그의 와이프였다.
  • ‘나만 그 여자를 괴롭힐 수 있지, 다른 사람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 “뭐 마실 거야?”
  • 고희가 물었다.
  • “아무것도 안 마실 거야.”
  • 물을 자주 마신다면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기에 거동이 불편한 그는 될수록 물을 적게 마시려고 했다.
  • 이 이유를 짐작한 고희는 걱정 어린 얼굴로 그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정장 바지에 가려진 그의 두 다리는 멀쩡해 보였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 전 그가 얼마나 힘들게 휠체어에서 의자로 옮겨갔는지 고희는 직접 봐서 알고 있었다.
  • “고 대표.”
  • “응.”
  • 고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 “모여정이 고 대표 가게 이 층에서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데 시간 좀 내서 드레스 몇 벌 골라줄래?”
  • 전강현의 부탁에 고희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오버스럽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 “잘못 들은 거 아니야.”
  • “저… 정말 모씨 가문의 둘째랑 결혼하기로 한 거야?”
  • 고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전씨 가문에서 모씨 가문과의 혼인을 원하는 것과 모씨 가문의 친딸인 모여정을 선택한 것을 상류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재벌가인 고희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 전강현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 “그 여자가 결혼을 거부하더라고.”
  • 하지만 기절했다 깨나서 생각을 바꾸더니 그와 혼인신고까지 했다. 전강현은 이 얘기를 고희에게 말하지 않았다.
  • ‘모씨 가문에서도 모르는 것 같던데 모여정이 이 결혼을 숨기고 싶나 보지. 그러라고 해!’
  • 고희는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모여정 씨가 강천호를 보고 첫눈에 반해 반드시 결혼하겠다고 한다던데?”
  • 전강현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고희가 다급히 말했다.
  • “서울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전 대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있겠지.”
  • 전강현은 코웃음을 치고 반박했다.
  • “누가 결혼해서 평생 독수공방을 지키고 싶겠어? 내가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고 대표도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내가 이 꼴이 되면 고 대표라면 나랑 결혼하고 싶겠어?”
  • 고희가 말했다.
  • “… 전 대표, 우리는 친구잖아.”
  • “허.”
  • 전강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 고희는 예전부터 그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전강현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고희는 여러 번 그를 떠본 뒤, 그가 자신에게 이성의 감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 전강현의 콧방귀에 고희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녀는 전강현에게 밉보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잘 나가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 모두를 더한다고 해도 전강현 한 명보다 못했다.
  • 그래서 전강현이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벌일 때도 그녀는 둘의 우정을 유지했다. 전강현을 자신의 보호막으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 “전 대표, 모여정이 결혼을 거부했는데 왜 나더러 직접 드레스를 골라주라는 거야?”
  • 전강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 “싫어?”
  • 고희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 “그건 아니야. 전 대표가 어쩌다 부탁한 건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 “지금 이 층에 있을 거니 가서 드레스를 골라 줘. 마지막에 할인해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시골 출신이라 돈을 아까워할 거야.”
  • 전강현은 명령조로 말했다.
  • 고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웃으며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전 대표가 친히 부탁한 일인데 공짜로 줘도 되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 그녀는 다급히 이 층으로 내려가 모여정을 보고 싶었다. 어떤 매력이 있기에 결혼을 거절당한 전강현이 이토록 신경 쓰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 “그리고 직원들 사람 무시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던데. 점장도 마찬가지더라고.”
  • 고희가 바로 대답했다.
  • “알았어. 그런 사람들을 남겨둔다면 우리 고희패션의 명성만 더럽히는 꼴이 될 거야.”
  • 전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 대표,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모여정 씨에게 드레스를 골라주고 올게. 좀 이따가 가버릴지도 몰라.”
  • 전강현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고희가 사무실 입구까지 갔을 때,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고 대표, 고마워.”
  • 고희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 “전 대표, 십 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미 모여정이라는 여자 때문에 여러 번 낯선 모습을 보인 거 알아?”
  • 모여정은 그의 아내이기에 그는 모여정을 위해 낯선 행동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파티에 참석한다고 하니 예쁘게 꾸며야 내 망신을 시키지 않을 거 아니야? 이건 다 날 위해 한 결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