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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왜 꼭 그녀여야 하는 거야?

  • 모여정은 고희의 이 층을 둘러보았다. 이 층의 옷은 일 층의 것보다 예뻤지만 그만큼 더 비쌌다.
  • 전강현이 말한대로 시골출신인 그녀는 재벌가에서 일 년 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억, 수십억에 달하는 드레스에 깜짝 놀라곤 했다.
  •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모여정은 젊은 여자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상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모여정은 여전히 상대의 눈길에서 도발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 “대표님.”
  • 직원이 여자를 부르는 호칭을 들어서야 모여정은 상대가 바로 고희의 대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녀가 엄마와 함께 왔을 때에도 기껏해야 점장이 그들을 접대했을 뿐, 고희를 본 적은 없었다.
  • 고희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급 드레스 디자이너로 일이 아주 바쁘기에 일반 고객들을 만나주지 않았던 것이다.
  • “모여정 씨.”
  • 고희는 모여정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눈치 빠른 직원이 바로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모여정에게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 “전 고희라고 해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 모여정은 그녀와 악수하며 미소로 화답했다.
  • “제가 할 말인데요.”
  • 고희가 웃으며 말했다.
  • “마음에 드는 드레스 있나요? 제가 어울리는 것으로 몇 벌 골라드릴까요?”
  • 그녀는 모여정의 몸매를 슬쩍 훑어보았다. 라인이 돋보이고 얼굴이 예쁘며 고상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모여정은 촌뜨기라는 소문과 전혀 달랐다. 특히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는 더욱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 ‘소문이 믿을 건 못되는군.’
  • “고 대표님이 도와주신다니 너무 감사하네요. 저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기가 힘들었거든요.”
  • 모여정이 사실대로 말했다.
  • 위층의 드레스는 서양식과 한복 퓨전이었다.
  • 그녀는 한복도 좋아하고 서양식 드레스도 좋아하기에 모두 예쁘다고 생각했다.
  • 고희가 웃으며 말했다.
  • “제 고객님이신데 감사하다뇨.”
  • 그녀는 모여정을 데리고 하얀색 서양식 드레스 앞으로 데려갔다.
  • “이 드레스가 여정 씨와 어울리는 것 같은데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 모여정도 이 층에 올라오자마자 이 드레스가 눈에 띄었지만 하도 많은 드레스를 보다 보니 확신이 점점 사라지던 중이었다.
  • “그렇게 해볼게요.”
  • 고희는 드레스를 벗겨서 모여정에게 건네주었다.
  • 모여정이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자 고희는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 ‘역시 진짜 아가씨는 다르구나. 25년 동안의 삶이 남에게 빼앗겼어도 뼛속 깊이 새겨진 귀티는 사라지지 않는구나. 옷만 다른 걸로 입었을 뿐인데 바로 공주가 되었어.’
  • “좀 걸어 보실래요?”
  • 모여정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라 걸어보았다.
  • “고 대표, 어때요?”
  • 그녀가 아까 탈의실의 거울을 비춰 보았을 때에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 고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너무 아름다워요. 모여정 씨와 딱인데요.”
  • 모여정이 통쾌하게 말했다.
  • “그럼 이걸로 할게요.”
  • “급할 거 없잖아요. 다른 것도 입어봐요.”
  • 고희는 또 드레스 몇 벌을 가져와 모여정더러 입어 보라고 했다. 모여정이 하나씩 입어 보자 고희는 더욱 열정적으로 반응해 주었다.
  • 그녀는 모여정을 전속 모델로 계약하고 싶었다. 모여정의 새하얀 피부, 우아한 분위가, 예쁜 몸매로 아무 드레스나 매치해도 최상의 아름다움을 끌어냈다. 지금 그녀가 모델로 쓰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나았다.
  • 하지만 고희는 무례해 보일까 봐 말을 꺼내지 않았다.
  • 고희는 아까 신입 직원을 불러온 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결제를 돕게 했다. 그리고 할인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직원은 할인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고희의 드레스는 할인하지 않기로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 고희패션의 드레스는 할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모여정은 할인이라는 말에 아까 1층에 있었던 불쾌한 일들이 모두 잊혀지는 것 같았다.
  • 고희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댔다.
  • “모여정 씨, 아까 제 직원들이 많은 결례를 범했다 들었어요. 제가 그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릴 것입니다.”
  • 모여정과 직원은 고희가 할인해주는 이유가 모여정에게 사과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 모여정과 직원이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고희는 바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 몇 분 귀, 그녀는 다시 전강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 “전 대표가 시킨 대로 했어. 그러니까 이제 왜 꼭 모여정 씨여야 하는지 말해줄래?”
  • 고희의 말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 전강현이 특별하게 대한 여자는 모여정이 처음이었다.
  • 전강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 “별거 아니야.”
  •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휠체어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휠체어를 밀며 말했다.
  • “전희진을 보내 이곳에서 드레스 몇 벌을 주문 제작하게 할 거야.”
  • 전희진은 그의 여동생으로 전씨 가문의 유일한 아가씨로 그보다 여덟 살 어렸다.
  • 전씨 가문에는 남자가 많아 연속 오 대째 딸이 없었다. 그러다 전강현 대에 와서 그의 어머니가 연속으로 아들 셋을 낳은 뒤, 딸을 낳은 것이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 셋을 낳고 딸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그런데 36세가 될 때 전희진을 낳은 것이다.
  • 전희진의 출생에 전씨 가문이 들썩거렸다. 전씨 가문에서는 회사 모든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팡팡 뿌리며 딸이 태어난 기쁨을 나누었다.
  • 고희는 전강현이 나가는 곳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 “희진이의 드레스는 모두 내가 직접 디자인한 거지.”
  • 그녀의 쇼핑몰 페이지에서도 전희진이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가문 아가씨들과 사모님들도 모두 전희진의 뒤에 서 있었다.
  • “전 대표, 나 모여정 씨를 전속 모델로 계약하고 싶은데 얼마를 불러야 적당할까?”
  • 전강현이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 “모델을 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 ‘말도 안돼. 전씨 가문의 사모님이 왜 고희에서 모델로 일해?’
  • 그는 모여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아내가 된 모여정은 지금 서울 여성들 중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 ‘고희가 모여정의 모델로 일한다면 모를까?’
  • “전 대표가 모여정 씨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 반면 고희는 자신이 있었다. 모씨 가문은 서울의 재벌가들 중에서 끄트머리에 겨우 이르는 존재였다. 그녀가 모여정을 고희패션의 전속모델로 쓰겠다고 하는 것은 모여정에게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 전강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 ‘아까 보니 안색도 좋아지고 상처도 나은 것 같던데 이제 집으로 데려갈 때도 되었겠어!’
  • 전강현의 대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고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 전강현은 항상 이랬다. 다른 사람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거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 ‘다리만 멀쩡했어도…’
  • 고희는 그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갖은 수를 대서라도 그와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 그녀를 뭐라고 할 수 없는 게 세상에 한 번밖에 안 하는 결혼 누가 독수공방을 지키고 싶겠는가?
  • ‘전강현, 아쉽게 되었어!’
  • 사무실을 나서자 보디가드들이 바로 그의 뒤에 서서 휠체어를 밀고 갔다.
  •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 고희는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그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