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절 조사하셨으면 제가 매운 걸 못 먹는다는 걸 아실 거예요. 제가 왜 매운 걸 안 먹는지 알아요? 매운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바로 화장실로 뛰어가야 하거든요.”
말을 마친 모여정은 또 화장실로 뛰어갔다.
‘… 내가 좀 너무했나 보군.’
2분간의 정적이 흐른 뒤, 전강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전 의사를 불러.”
“네.”
보디가드는 휴대폰을 들고 전씨 가문의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 의사가 왔을 때, 모여정은 맥없이 축 처진 상태였다.
전 의사는 그녀에게 약을 떼주었다. 그 약을 먹고 난 뒤에도 모여정은 화장실에 두 번 더 가서야 가까스로 설사가 멈춘 것을 느꼈다.
정자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고 그 대신 신선한 제철과일이 놓여 있었다.
전강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여정을 보며 물었다.
“내가 들고 나가줄까?”
모여정은 고개를 들고 전강현을 바라보며 뭐라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전강현은 듣지 못했다.
“날 의자 위로 옮겨라.”
전강현이 지시했다.
그러자 두 명의 보디가드가 그를 양 옆에서 부축해 조심스럽게 의자 위에 앉혔다.
“내 휠체어에 태워서 이 여자를 내보내.”
두 보디가드는 그의 지시에 따랐다.
전씨 가문에서 쫓겨난 모여희는 대문 앞에 서서 두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보디가드가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다름 아닌 모여정일 줄이야.
내쫓긴 자신과 달리 안에서 두 시간 넘게 있은 모여정이 아주 못마땅했던 모여희는 지금 고소해 죽을 지경이었다.
‘모여정의 처지가 나보다 더 최악이네. 전강현은 정말 악마야. 여자를 아낄 줄 전혀 모르잖아.’
“여정아.”
모여희는 고소한 속마음과 달리 걱정스러운 얼굴로 뛰어갔다.
“여정아, 너 왜 이래?”
두 보디가드는 모여정을 밀고 나온 뒤, 모여희더러 모여정을 부축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휠체어를 끌고 말없이 그대로 가버렸다.
전씨 가문의 대문도 곧이어 닫혔다.
모여희는 모여정이 안색이 창백하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여정아, 대표님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매워.”
모여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이 틀린 거 하나 없었다.
‘전강현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대표님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네가 간 크게도 허락 없이 제멋대로 정자에 들어간 거잖아. 식사도 밖에서 하시고, 보디가드를 제외하고 사람을 가까이에 두지도 않잖아. 성격도 안 좋고 변덕도 심해서 그 집 고용인들도 다 무서워한다 그러더라고. 가족들도 피한다니까.”
모여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전강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저 전생에 그녀에게 베푼 약간의 선의 때문에 고마워 이번 생에 자신으로 그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미 결혼한 몸이니 그녀는 이번 생에 그의 옆을 지킬 생각이었다.
“나 피곤하니까 이만 돌아가자.”
모여정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침대에 누워 푹 자고 싶었다.
모여희는 모여정이 전강현에게 호되게 시달린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차까지 부축했다.
모여정은 연속 며칠 쉰 다음에야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집에서 쉬는 동안에 전강현에게서는 연락 한 번 없었다.
“참 독하고 매정해. 그래도 내가 신부인데 어떻게 전화 한 통 안 하지.”
모여정은 몇 번이나 부재중 전화나 문자가 없나 휴대폰을 들었지만 그때마다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여정아, 엄마야. 들어가도 돼?”
모여정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 문 안 잠갔어요. 들어오세요.”
장혜민이 들어왔다.
그녀는 모여정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여정아, 오늘 날씨도 덥지 않고 딱 좋은데 여희가 비서를 보낼 테니 같이 쇼핑하러 가자고 그러네? 이번주 토요일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도 고를 겸 말이야.”
“무슨 파티요?”
모여정이 물었다.
“조씨 가문 아가씨의 생일파티 말이야. 지난번에 말했잖아.”
그제야 모여정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생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조씨 가문은 서울에서 전씨 가문 다음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조수아는 조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라서 가문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래서 매년 그녀의 생일파티를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모두 초대하고 말이다.
모여희의 친구인 조수아는 모씨 가문의 친자 모여정을 무시하고 그녀가 시골 출신이라는 것을 비웃었다.
지난 생에 모여정은 모여희와 함께 조씨 가문의 파티에 참석하러 갔다가 실수라는 조수아에게 와인세례를 당하고 말았다. 그날 입은 하얀색 드레스도 볼품없이 더럽혀지고 망신도 크게 당했다.
모여정은 눈을 반짝였다. 지난 생에는 미처 반격하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는 이자까지 더해서 제대로 복수할 생각이었다.
“엄마, 드레스가 있으니 더 살 필요가 없잖아요.”
고희패션의 드레스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했으나 너무 비쌌다.
부자 아가씨로 된 모여정도 고희패션의 드레스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으니 말이다.
“다 입어봤던 거잖아.”
장혜민이 딸을 달랬다.
“엄마 말 들어. 기 비서랑 같이 쇼핑하다가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사. 고희패션에 가면 드레스도 사고.”
고희패션의 모든 드레스는 같은 디자인이 한 벌밖에 없었다. 귀한 손님들끼리 같은 옷을 입고 마주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모여정은 거절하려다가 전강현의 셔츠를 망가뜨린 게 생각나 그에게 한 벌 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바로 생각을 바꾸고 달콤하게 웃었다.
“엄마 말씀 들을게요.”
장혜민은 모여정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
“엄마 딸 예쁘게 꾸미고 파티에 가.”
모여정이 애교를 부렸다.
“엄마, 제가 꾸미지 않으면 안 예뻐요?”
“예쁘지. 우리 딸은 생얼도 제일 예쁘지.”
“그건 엄마 아빠 유전자가 좋아서 그래요. 저 두 분 쏙 빼닮았잖아요.”
장혜민은 그녀의 이마를 콩 쥐어박은 뒤, 말했다.
“말도 참 예쁘게 하네.”
모여정이 혀를 홀랑 내밀자 장혜민은 더욱 활짝 웃었다.
그녀는 카드 한 장을 꺼내 모여정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건 엄마가 주는 용돈이니까 사고 싶은 거 보면 마음대로 사. 엄마 돈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 비서 오래 기다리지 않게 얼른 나가.”
장혜민의 재촉에 모여정은 옷을 갈아입고 힐을 신은 뒤, 엄마가 준 헤르메스 가방을 들고 기 비서와 함께 문을 나섰다.
서울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런지 가로수길에 가서 쇼핑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곳의 가게는 아무 데나 골라도 명품매장이었다.
기 비서는 차를 가로수길의 입구에 댄 뒤, 모여정에게 말했다.
“둘째 아가씨,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주차 마치고 찾으러 갈게요.”
모여정은 알았다고 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모씨 가문으로 돌아온 뒤, 이 가로수길에 여러 번 왔었다. 그래서 남성복 매장이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