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는 마치 황막한 대지에 피어난 한 송이의 피안화 같았다. 그녀는 높은 힐을 밟으면서 시선을 이끌며 군사 구역의 문 앞에 도착했다.
“ 잠시만요. 등기가 필요합니다. ”
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이가 그녀를 붙잡았다. 유아린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쪽 상교의 아내거든요. ”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에 보초를 서던 병사들은 넋이 나간 듯 서 있다 얼른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 사모님, 죄송하지만 먼저 상교님에게 사모님께서 오셨다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
“ 네, 그럼 얘기하는 김에 이 말도 전해주세요. 저 그 사람이랑 이혼할 거라고. ”
십여 분 후, 유아린은 고양이처럼 요염한 걸음으로 전투기 앞에 멈춰 섰다. 최시혁은 지금 회의를 하는 중이라는 보고를 들은 차였다.
“ 회의요? 회의가 저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던가요? ”
유아린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듯했다. 그녀는 눈앞의 이를 밀어내고는 팔과 다리를 사용해 사다리에 올랐다. 그녀를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추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들은 그녀를 차마 말리지는 못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상교님의 부인이었으니.
기지에는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군인들이 있었다. 아리따운 여인이 짧은 치마를 입고서 사다리를 올라타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흩날리는 모습은 마릴린먼로를 연상케 했고 적지 않은 이들이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시실에 있던 남자는 그 광경에 가늘게 뜬 눈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다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10kg 매달고 20km 달린다, 실시! ”
“ 최시혁씨,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
유아린은 손을 털며 문가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의 장난기 섞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손이 그녀를 우악스레 코앞까지 잡아당겼다.
“ 부대의 규율을 어기다니, 간덩이가 부었나? ”
유아린은 매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오늘 최시혁은 어두운 녹색의 군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구김살 하나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강직하고 곧은 그의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준수한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고 바늘을 숨긴 듯한 긴 눈매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회의하고 있는 걸 몰랐나? ”
“ 알지. ”
유아린은 담담히 입을 열면서 짙은 미소를 띤 얼굴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 그래서 내가 보러 왔잖아? ”
그들의 주위에 있던,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군인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제멋대로인 사람 아닌가? 다른 곳도 아니고 군사 구역에서.
여전히 차갑게 굳어있는 최시혁은 입가의 근육을 움직여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 회의 끝났다. 나가 봐. ”
“ 네! ”
대답을 한 군인은 나가는 와중에도 문을 닫는 걸 잊지 않았다. 그에 유아린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이 사람 전도가 유망하네.
최시혁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팔을 뿌리치며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 무슨 짓이야? ”
“ 아까 보고할 때 제대로 얘기 전했을 텐데? ”
유아린이 나른히 웃어 보였다.
“ 이혼하자고. ”
이혼?
최시혁은 냉소를 흘리며 눈썹 한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 군혼이 당신이 이혼하고 싶다면 할 수 있는 건 줄 알아? ”
군혼. 그래, 군혼이었다.
유아린은 미소를 거두었다. 그때 유아연이 최시혁과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약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지금처럼 이 군혼에 발이 묶여있을 이유도 없었다.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듯 막장 드라마 같았다. 유아린의 이복동생인 유아연이 최시혁에게 약을 썼는데 그가 하필이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같이 하룻밤을 보내는 바람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와 부득불 결혼하게 된 것이다.
“ 군혼이라도 그에 따른 이혼 방법이 있겠지. ”
그녀는 미소로 자신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숨기며 태연한 모습으로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 너만 동의하면 이혼할 수 있어. ”
최시혁의 잘생긴 얼굴이 무섭게 가라앉았고 입꼬리에는 비웃음 섞인 미소가 걸렸다.
“ 꿈 깨. ”
“ 진짜 꿈에서라도 너랑 이혼하고 싶네. ”
유아린은 그의 반응따윈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 3년 내내 독수공방하면서 살았는데 제가 안 외롭겠어? ”
최시혁의 태양혈 쪽의 핏줄이 튀어나왔다. 최시혁은 눈앞의 사람이 이 정도로 수치를 모르는 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내가 당신이랑 잔 건 사실이니 나도 책임을 져야지. ”
최시혁은 냉담한 말을 내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최씨 집안에 시집오는 게 당신들이 진짜 바라는 게 아니었나? ”
그는 그녀의 여린 손목을 덥석 붙잡으며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놓고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내팽개쳤다.
“ 이딴 수작질은 그만하지. 진짜로 화내기 전에 얼른 가는 게 좋을 거야. ”
“ 난 안 갈 건데. ”
유아린은 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께 위로 들어 올리며 교태를 부리듯 말했다.
“ 내가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보상은 없어? ”
미간을 좁힌 최시혁의 긴 눈매에 싸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분노와 경멸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 꺼져. ”
싫은데.
유아린은 남자가 그녀를 파리 쫓듯 싫어할수록 더욱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최시혁이 운전석에 앉으려 할 때는 더욱더 뻔뻔하게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 최시혁. 제대로 된 설명이 없으면 나도 안 갈 거야. ”
유아린의 하얀 손가락 위로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목에 손을 올리며 입술을 가까이했다.
“ 두 번은 안 말해. ”
최시혁은 그녀의 공세를 비껴가며 노기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유아린! 여기가 어딘지 자각은 있어? ”
“ 군사 구역에 있는 전투기 안이지. ”
유아린은 생긋 웃는 얼굴로 애교를 부리듯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 친애하는 최시혁씨. 나랑 이혼할 생각 없는 거면 나랑 여기서 할래? ”
말도 안 되는 소리.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최시혁의 태양혈 위에 파란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여자를 때리지 않는 그였지만 최시혁은 주꾸미처럼 그에게 달라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뜯어내고 싶었다. 그녀는 일부러 그를 자극하기 위해 그의 다리 위에서 자신의 가는 허리를 꿈틀댔다. 유아린의 흰 허벅지가 바깥쪽으로 향하게 되고 그녀의 통통한 엉덩이는 그곳 바로 위에 내려앉았다.
최시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도 평범한 남자로 3년 동안 금욕을 해왔었다.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유아린은 그가 이런 반응일 줄 예상했다는 듯이 싱긋 웃어 보이더니 자신의 섬섬옥수로 그의 가슴 위를 건반을 두드리듯 건드리다 단추를 풀러 했으나 그 행동은 큰 손에 의해 단단히 잡혔다.
“ 왜? 싫어? ”
유아린은 고개를 들어 일렁이는 아름다운 눈동자로 유혹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 아니면 아직 그 사람 못 잊어서 그래? ”
그 사람. 박하은은 그의 첫사랑이었고 그가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최시혁은 얼굴을 무섭게 굳히며 거친 몸짓으로 자기 몸 위에 앉아있던 유아린을 밀어냈고 그 바람에 유아린은 비틀거렸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뒤에서부터 남자의 널따란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 얘기 들어보니 박하은씨 오늘 귀국한다던데. ”
그 한 마디가 최시혁의 귓가에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박하은이... 돌아왔다고?
최시혁은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 이혼 합의서는? ”
유아린은 바닥에 내팽개쳐졌지만 화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위의 서류를 들어 건넸고 최시혁은 그녀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가더니 아주 빠른 속도로 사인을 마쳤다.
“ 오늘부터 우린 정식으로 이혼한 거야. ”
최시혁은 한 글자, 한 글자 씹듯이 말을 내뱉고는 서류를 내던지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