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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몰래 일을 꾸미다

  • 최시혁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유아린의 얼굴에 닿았을 때 최시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 나가. ”
  • “ 싫은데. ”
  • 유아린은 웃는 얼굴로 최시혁의 잔에 꽃차를 따라주고는 그의 앞에 잔을 건넸다.
  • “ 내가 사과하러 이렇게 찾아왔잖아? 차시혁씨, 아량도 넓으신데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줄래? ”
  • 최시혁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음울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 “ 사과는 필요 없어. 이혼할 때 말했잖아. 벌써 잊은 모양이지? ”
  • 다시는 얼굴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지.
  • “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찾아온 거잖아? ”
  • 하지만 유아린은 두서없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 “ 어쨌든 동침한 사이는 맞잖아,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굴어? ”
  • 유아린이 꺼낸 말에 최시혁은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가늘게 눈을 뜨고 내뱉는 말에서 그가 화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내가 얘기했지, 거절한다고. 그냥 포기해, 난 안 가. ”
  • 최시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190센티에 달하는 커다란 몸이 눈앞의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라는 손동작을 해 보였다.
  • “ 나가. ”
  • 유아린은 경계심에 한발 물러나며 자기도 모르게 박하은의 자리에 섰다.
  • “ 안 갈 거야. 네가 한다고 하기 전까진. ”
  • 말을 마친 그녀는 등받이에 손을 올리며 미소 지어 보였다.
  • “ 박하은씨도 곧 올 것 같은데 빨리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어? ”
  • 지금 협박하는 건가?
  • 최시혁의 분노가 두 눈동자에서 불타올랐다. 그는 우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냉소를 흘렸다.
  • “ 유아린.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네가 그럴 자격이나 있어? ”
  • 유아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런 건 모른다는 듯 웃어 보였다.
  • “ 뭘 자격씩이나. 한때 부부였던 내가 부탁 하나 하자는데, 그게 뭐 어때서. ”
  • 그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했지만, 그녀의 말은 최시혁의 신경에 거슬렸다. 최시혁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 “ 왜? 인제 와서 후회돼? ”
  • 어?
  • 유아린은 그의 말뜻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최시혁의 혐오 가득한 목소리가 곧 들려왔다.
  • “ 핑계를 댈 게 없으니까 이런 이유라도 만드는 거야? ”
  • 유아린은 잠시 멈칫하다가 그제야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 “ 넌 내가 너랑 이혼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라 생각해? ”
  • 그녀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 “ 나르시시즘이야? ”
  • 최시혁의 태양혈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그는 유아린의 앞에 다가가 그녀의 어깨 쪽 옷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문가까지 끌고 갔다.
  • “ 그럼 그런 헛꿈 꾸지 말고 얼른 가. ”
  • “ 야! ”
  • 최시혁은 예고 없이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내고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 빌어먹을!
  • 유아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저 멀리서 박하은이 다가오는 걸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설마 나한테 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유아린은 안전벨트를 빼면서 최시혁의 얼굴을 상상하며 안전벨트를 단단히 고정하고는 내비게이션을 켰다.
  • “ 군사보호 구역. ”
  • “ 목적지 군사보호 구역까지 길 안내를 시작합니다. 녹숲대로 방면 오른쪽 차선을 유지하세요. ”
  • 내비게이션에서는 무뚝뚝한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아린은 차에 시동을 걸어 지하주차장을 벗어난 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 네, 할아버지. 오랜만이네요... ”
  • 빨간 입술이 음험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유아린은 안부를 물었다.
  • “ 제가 보러 갈까요? ”
  • 최시혁. 두고 보자.
  • ......
  • 군사보호 구역은 시내 중심가 쪽의 노른자 땅에 있었다. 사합원 구조의 건물의 바깥벽은 새로 페인트칠을 했고 안쪽 구조는 여전히 옛적의 모습처럼 깔끔하고 고상했다.
  • 화라락.
  • 마작 소리가 시원스레 들려왔고 담배 연기 가득한 곳에 노인들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 정중앙에 앉은 노인은 새하얀 백발에 입에 담배를 물고 가늘게 눈을 뜨고 테이블 위의 패를 보고 있었다.
  • 유아린은 곁눈질로 옆에 앉아있는 최시혁의 할아버지를 보고서는 마치 짠 듯이 패를 냈다.
  • “ 발 패. ”
  • “ 깡쯔! ”
  •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패를 집어 들었다.
  • “ 쯔모 화료. ”
  •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패를 밀었다. 무척 기뻤는지 두 눈은 얇게 휘어져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 안에서 돈을 꺼냈다.
  • “ 고맙네! ”
  • 차시혁의 할아버지는 신난 얼굴로 그 돈들을 자신의 작은 케이스 안에 넣으며 옆에 앉아있던 유아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 우리 손주며느리가 여기엔 웬일이냐? ”
  • “ 오랫동안 안 했더니 손이 근질근질해서요. ”
  • 유아린 역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할아버지의 케이스 안에 넣었고 할아버지는 케이스를 슬쩍 들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 “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우리 손주며느리가 와서 말이야. 자네들끼리 놀고 있어. ”
  •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는 지팡이를 짚으며 유아린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최씨 집안은 자손 3대 모두 권력자였다. 차시혁의 할아버지에서부터 차시혁까지, 모두 상교가 아니면 장군이었다.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최시혁까지 상교이니.
  • 최시혁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자주 출장을 다니셨고 집에는 최시혁의 어머니와 최민주만 있었다. 그리고 여든 넘은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매일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작을 하거나 기르는 새를 돌보거나 하면서 말이다.
  • “ 오랫동안 안 와놓고 오늘 어쩌다 온 건데 왜 시혁이랑 같이 오지 않았느냐? ”
  •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새들에게 먹이를 주며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유아린은 작게 혀를 찼다. 혹시 둘이 이혼한 걸 알기라도 하는 날에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아마 당장이라도 최시혁을 찾아가 그를 혼쭐을 낼 게 분명했다.
  • “ 그 사람은 일하느라 바빠서요. ”
  • 유아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 할아버지. 저 사실은 할아버지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시혁씨는 항상 바쁘고 저랑 만날 시간도 없고요. 사실 저도 그 사람 보고 싶은데. ”
  • 유아린은 말을 잘했다. 최씨 집안 전체를 아울러, 최시혁의 아버지도 포함해서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유아린을 가장 좋아했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고 눈치도 빠른 유아린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 “ 이 망할 자식이. 이제 급 좀 올랐다고 집안일은 내팽개치고! ”
  • 할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먹이 그릇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누가 봐도 유아린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 “ 내가 전화해서 혼쭐을 내주마. ”
  • “ 그러지 마세요, 할아버지. ”
  • 유아린은 기분이 무척 좋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현모양처 흉내를 내며 말했다.
  • “ 제가 지금 좋은 기회를 잡았거든요. 결혼하고 나서 계속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요즘 저희가 라이브로 생중계되는, 야외에서 생존하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제가 총책임자거든요. 아무래도 시혁씨가 이런 방면으로는 가장 경험이 풍부하다 보니까 출현시키고 싶은데. 할아버지께서 그이 좀 설득해주셨으면 해서요. ”
  • “ 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
  • 유아린의 말에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 “ 네 마음은 알겠다만 시혁이처럼 고집이 센 아이는 드물어, 아마 설득하기 어려울 거야. ”
  • “ 할아버지. ”
  • 유아린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 “ 생각해보세요. 시혁씨는 얼굴도 잘생겼지, 유명한 데다 경험도 풍부하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징병 모집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게다가 저희 3년 동안 같이 있은 시간보다 떨어져 있은 시간이 더 오랜데, 제 사심도 살짝 있고요. ”
  • 유아린은 쑥스러운 척을 해 보이며 몸을 배배 꼬았다.
  • “ 그리고 다들 애가 있으면 마음도 다잡는다고 하잖아요. ”
  • 티 나는 그녀의 말에 할아버지는 최씨 집안의 핏줄이 이어질 것을 생각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 맞는 말이다. 그렇게 하마. ”
  • “ 그런데... 혹시 시혁씨가 동의하지 않으면 어쩌죠? ”
  • 유아린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할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 “ 이건 정치적인 임무다. 하기 싫다 해서 되는 게 아니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