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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서로 윈윈 하다

  • 최시혁이 할아버지의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박하은과 식사를 하는 도중이었다. 최시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고 박하은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 “ 괜찮아, 받아. 나 나가 있을까? ”
  • “ 괜찮아. ”
  • 최시혁은 덤덤히 대꾸하고서는 전화를 받았다.
  • “ 할아버지? ”
  • 전화 건너편에서 이어진 몇 마디 말에 박하은은 최시혁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
  • “ 할아버지, 전 안 나갈 겁니다. ”
  • 최시혁의 할아버지는 당장이라도 전화기를 뚫고 나을 듯한 기세로 쩌렁쩌렁한 소리를 질렀고 그 바람에 박하은은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 “ 그래도 나가야 해. 이건 명령이다. ”
  • 말을 끝내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 최시혁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박하은은 눈을 깜빡이다가 그에게 국을 떠서 줬다.
  • “ 시혁아, 무슨 곤란한 일 있어? ”
  •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걸 보니 유아린이 찾아간 게 분명했다. 유아린의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박하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기에 최시혁은 음울한 기분을 감추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 “ 별일 아니야. 앞으로 며칠 동안은 같이 못 있어 주겠네.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 ”
  • 박하은은 미간을 좁히며 살짝 웃어 보였다.
  • “ 나도 딱히 할 일은 없어. 넌 네 일 봐. 그런데, 시혁아. 너 결혼했다며? ”
  • 최시혁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었다. 그러나 박하은은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물었다.
  • “ 혹시 그 사람 때문에 그래? ”
  • 최시혁의 아름다운 입매가 벌려지면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나 이혼했어. ”
  • 박하은은 잠시 주춤했다.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습기가 찼다.
  • “ 나... 때문이야? ”
  • “ 누구 때문도 아냐. ”
  • 최시혁은 어떻게 부인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본능이었다. 그는 박하은이 떠준 국을 한입 떠 마시고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 “ 그 사람이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거야. ”
  • “ 그렇구나... ”
  • 박하은의 눈동자에 얼핏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미소 지으며 말했다.
  • “ 그런 기분 안 좋은 일들은 그만 얘기하고,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
  • 박하은이?
  • 최시혁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른 건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 야외 생존을 주제로 한 리얼리티 라이브 방송인데 거기 나가기 싫어서 그래. ”
  • “ 어? ”
  • 박하은은 호기심이 든 건지 그에게 물었다.
  • “ 어느 플랫폼이야? ”
  • “ HC. ”
  • 최시혁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오늘 유아린이 쳐들어왔던 장면을 다시 생각했다. 그녀가 모자를 벗는 순간 큰 웨이브가 들어간 그녀의 머릿결이 흘러내리던 모습이...
  • 이상하게도 그 이름을 기억하다니.
  • “ HC? ”
  • 박하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 “ 그거 괜찮네. 나도 외국에 있을 때 HC는 들어봤거든. 요즘 가장 핫한 동영상 플랫폼이잖아. 벌써 라이브 방송을 시작하다니 진짜 빠르네. ”
  • 그녀는 멈칫하면서 고개를 들어 최시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박하은은 낙담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 “ 시혁아? ”
  • 박하은의 목소리가 최시혁의 생각을 끊었다. 최시혁이 정신을 차리고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 “ 응? ”
  • “ 내가 같이 가줄까? ”
  •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 “ 너 나가기 싫다며? 나랑 같이할래? ”
  • 최시혁은 잠깐 당황한 얼굴이었다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그래도 되겠어? 아마 엄청 힘들 거야. 너 가능하겠어? ”
  • “ 당연하지. ”
  • 박하은이 활짝 웃으며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
  • “ 나 몇 년 동안 외국에서 헛산 거 아니다. ”
  • 최시혁의 까만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승낙했다.
  • “ 알겠어, 그럼 내가 얘기해볼게. ”
  • ...
  • 최시혁은 약속한 일은 무조건 지키는 타입이었다. 다만 오후에 유아린과의 약속을 잡을 때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의외로 유아린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십 분 정도 지나고 유아린이 아우디를 몰고 왔다.
  • “ 오랜만이네! ”
  • 유아린은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정장치마는 그녀의 몸매를 더욱 부각했고 빨간 힐은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높게 묶인 포니테일은 그녀를 세련되고 발랄하게 보이게 했다.
  • 최시혁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혼한 지 하루하고도 몇 시간이 지났는데 그녀는 컨디션이 무척 좋아 보였다.
  • “ 잘 지내나 보네. ”
  • 최시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 그렇지, 이젠 돌싱이니 나 좋다는 젊은 애들도 많이 따라다니는 편이라. ”
  • 유아린은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한 얼굴로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 “ 그래서 생각은 다 하셨고? ”
  • 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커피잔을 들려 했으나 큰 손이 그녀의 손을 가로막았다. 유아린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최시혁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 “ 네가 시켜 먹어. ”
  • “ 쪼잔하긴. ”
  • 두 잔이나 시켜놓고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유아린은 투덜대긴 했으나 화가 나진 않았기에 물 한잔을 시키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 “ 내가 계약서 가져왔는데, 확인해 볼래? ”
  • 그녀는 서류를 꺼내 들어 그의 앞에 가져다 놓고서는 기대 가득한 얼굴을 두 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 “ 가격도 정당하고 사기도 아니고 무조건 잘 될 프로그램이야. ”
  • 최시혁은 까탈스럽게 위에서부터 아래로 서류를 훑어보았으나 아무 말 없었다.
  • “ 다 봤으면 사인하지? ”
  • 유아린은 그에게 펜을 건네며 말했다. 최시혁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펜을 건네받았다. 펜의 촉이 유아린의 기대 속에서 종이에 닿았으나 거기서 움직임이 멈췄다.
  • “ 내 조건 하나 들어주면 여기 사인하지. ”
  •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펜을 매만지자 차가운 소리가 났다.
  • 조건이 있다고?
  • 유아린은 꽤 놀랐으나 프로답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 얘기해봐. 우리가 최대한 맞춰줄 테니까. ”
  • 최시혁은 눈썹을 꿈틀거리다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 “ 이 프로그램에 박하은도 참여 시켜. 메인으로. ”
  • 유아린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박하은 앞길 좀 깔아주려 그랬던 거구만.
  •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유아린은 곤란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미간을 좁혔다.
  • “ 하지만 메인은 이미 너로 정해졌는데? ”
  • “ 그럼 미안하게 됐네. ”
  • 최시혁이 펜을 내려놓으려 하자 유아린은 다급해졌다.
  • “ 그래, 그래. 그럼... 박하은씨를 특별 게스트로 모시는 건 어때? ”
  • 유아린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펜을 건넸다.
  • “ 해외에서 귀국한 아티스트를 특별 게스트로 모시는 거야. HC 능력에 내 프로그램까지 더하면 절대 나쁘지 않을 거야. 박하은씨 앞길은 반짝반짝 잘 다듬어줄게. 어때, 최시혁? ”
  • 최시혁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펜을 건네받고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 “ 어렵지 않겠어? ”
  • “ 어려울 게 뭐가 있어? ”
  • 유아린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 “ 박하은씨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지. 연예인은 아니지만, 해외에서도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아티스트잖아. 너랑 같이 프로그램 찍어도 어색할 게 없잖아. ”
  •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뭐가 어려워? 아니면 너한테 뭐 어려운 거라도 있어? ”
  • 최시혁은 그 말에 가슴속 깊은 곳에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 따끔따끔한 느낌에 마음이 어지러워진 그는 펜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 “ 진짜 다시 고려 안 해봐도 되겠어? ”
  • “ 넌 이미지 챙기고 난 돈 챙기고 서로 윈윈 하자. ”
  • 유아린은 교활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그게 내가 바라마지 않는 거야. ”
  • 최시혁이 입매를 굳게 다물었고 낯빛이 어두워졌다. 눈앞의 사람은 언제나 계산적이고 실리적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