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린은 엉망이 된 분장실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누군가 급히 떠난 듯 보였고 엄청 화를 낸 건지 옷걸이들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 딱 맞춰 오셨네요. ”
감독은 시나리오를 손에 들고는 침을 튀기며 말했다.
“ 한지은씨 지금 안 한다고 하고 갔어요. 지금 한 사람 부족하니까 유아린씨가 들어가세요. ”
한지은이 갔다고?
“ 왜죠? 일정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아니면 다른 뭔가에 불만이 있는 건가요? ”
조금 전 단상 위에 있던 유아린은 박하은이 나타난 뒤로 한지은의 얼굴이 무섭게 굳는 걸 목격한 바 있었다.
“ 그게 전부 그... ”
감독은 말을 반만 하고 멈추었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뭐요? ”
박하은은 최시혁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분장실로 들어왔다. 자신이 들어올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 유아린씨, 제 계약서는 어디 있죠? ”
유아린은 박하은이 분장실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고 거기에 최시혁까지 같이 올 줄은 더 상상도 못 했다.
“ 박하은씨 계약서는 제 사무실에 있어요. 여기는 문제가 좀 생겨서요. ”
유아린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지만 박하은은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무슨 일인데요?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
박하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최시혁과 손깍지를 꼈다.
“ 그게... ”
유아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독은 마른기침을 하면서 유아린 대신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
“ 연예인 한 명이 일정 때문에 빠진다고 해서요. 그래도 마음 놓으세요. 원래 5인조로 진행하려던 계획은 변하지 않았으니깐요. 유아린씨가 대신해주실 거거든요. ”
그 말에 유아린은 미간을 좁혔고 최시혁의 얼굴 역시 굳었다.
“ 유아린씨가요? ”
박하은은 당황한 얼굴에 의례적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 아마 어렵지 않지 않을까요? 유아린씨는 총책임자이신데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면 일은 어쩌죠? ”
유아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감독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은 걸 보았기 때문이다.
“ 모든 기획은 유아린께서 거의 마치셨고요. 그리고 아예 안 한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
감독은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유아린씨는 FC 엔터테인먼트의 편집장이시고 TY의 소설 대가 세요. 이미지나 팬덤이나 전혀 걱정할 게 없죠. ”
감독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박하은은 감독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금방 해외에서 돌아왔으니 국내에는 팬이 얼마 없었으니 말이다. 다들 최시혁의 체면을 고려해 그녀에게 예의를 차린 것이다.
박하은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입꼬리 역시 점점 굳어갔다.
“ 진짜... 생각 못 했네요. 유아린씨는 참 겸손하세요. ”
유아린은 입꼬리가 경련될 정도로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가늠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놀라움과 망설임,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의 감정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최시혁 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좋은 직업을 가졌는지는 몰랐기에 놀란 거겠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아린은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게 좋은 일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기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 다 별거 아닌 것들이죠. 박하은씨, 저랑 계약하러 가시죠. ”
그 뒤로 별의별 일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음 날 계획대로 사람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남아프리카의 한 섬에 있는 자연보호구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도중에 한 곳에서 경유하고 또 열 시간 넘는 비행을 거쳐 소비아 섬에 도착했다.
그곳은 예상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갰고, 공기 중에서는 짜면서도 비릿한 내음의 습기가 느껴졌다.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갈매기들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있었다. 곳곳에서 자유가 느껴졌다. 섬 중앙은 열대우림이었고 촬영팀은 안테나를 설치하고 모두 설비들을 등에 메고 캠핑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뜨거운 햇볕이 쏟아졌다. 최시혁은 솔선수범하여 공터를 찾아 사람들을 데려와 몸에 지니고 있던 공구들을 사용해 묵을 곳을 짓기 시작했다. 열대우림에서 텐트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섬에서 살아남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담수였다. 첫날밤, 최시혁은 날렵한 솜씨로 이름 모를 야생 닭을 잡아 와 저녁을 해결했다. 구급함을 제외하고는 먹을 것이라곤 없었다. 소금마저도 바닷물을 받아 햇볕에 증발 시켜 만든 것이었다.
박하은은 예상외로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위해 과일도 채집하고 자기가 먼저 나서 의료와 관련된 일을 맡겠다고 했다. 그녀와 최시혁은 한 사람이 내조를 다른 한 사람이 외조를 하면서 손발이 잘 맞았다. 게다가 최시혁이 자주 박하은을 돌봐줬기에 두 사람을 커플로 묶으면서 프로그램의 인기도 높아졌다.
유아린은 제작진의 일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진되어가는 담수 자원 때문에 갓 시작한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생기는 돌발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책임을 진 그녀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이 사소한 문제라 인내심을 갖고 대하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유아린은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강인과 강호를 데리고 담수를 찾으러 나섰다.
“ 저기 누나, 가능하겠어요? ”
강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연약해 보이는 유아린을 바라보았다.
“ 너 하나 손 봐주는 데 충분해. ”
유아린은 폴짝 뛰어 올라가 자신의 바지를 단단히 겹쳐 올리며 노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 오후에 금방 비 왔었으니까 모기랑 흡혈충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막아야 할 곳은 제대로 잘 막고 있어. ”
“ 너랑 하은이가 남아. 담수는 우리가 구하러 갈게. ”
최시혁은 목재를 내려놓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 왜? 걱정돼? ”
최시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아린은 더 이상 그를 놀릴 마음이 사라져 자신의 옆에서 멍해 서 있는 천연인 강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옷깃. 여미고 있어. ”
“ 난 아마존 우림에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야. 좋은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으라고! ”
유아린의 해맑게 웃는 모습이 쏟아지는 옅은 금빛의 햇볕을 받아 최시혁은 눈이 부셨다.
“ 출발! ”
그 한마디와 함께 유아린은 두 청년을 데리고 우거진 열대우림 사이로 들어갔다. 여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힘세고 체격 좋은 남성들을 전부 제치고 나무 막대기를 손에 든 채로 앞장서 길의 상황을 파악했다.
촬영팀은 그녀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이동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유아린은 가는 내내 조리 있게 지휘를 했고 아주 정확하게 지하 수원을 찾아냈다. 강인과 강호 두 청년 역시 그녀의 실력이 존경스러우면서도 감탄스러웠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