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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의 예상 밖

  • 그때 총감독이 화를 내는 바람에 분장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 “ 감독님, 저 찾으셨어요? ”
  • 유아린은 엉망이 된 분장실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누군가 급히 떠난 듯 보였고 엄청 화를 낸 건지 옷걸이들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 “ 딱 맞춰 오셨네요. ”
  • 감독은 시나리오를 손에 들고는 침을 튀기며 말했다.
  • “ 한지은씨 지금 안 한다고 하고 갔어요. 지금 한 사람 부족하니까 유아린씨가 들어가세요. ”
  • 한지은이 갔다고?
  • “ 왜죠? 일정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아니면 다른 뭔가에 불만이 있는 건가요? ”
  • 조금 전 단상 위에 있던 유아린은 박하은이 나타난 뒤로 한지은의 얼굴이 무섭게 굳는 걸 목격한 바 있었다.
  • “ 그게 전부 그... ”
  • 감독은 말을 반만 하고 멈추었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 그 뭐요? ”
  • 박하은은 최시혁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분장실로 들어왔다. 자신이 들어올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 “ 유아린씨, 제 계약서는 어디 있죠? ”
  • 유아린은 박하은이 분장실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고 거기에 최시혁까지 같이 올 줄은 더 상상도 못 했다.
  • “ 박하은씨 계약서는 제 사무실에 있어요. 여기는 문제가 좀 생겨서요. ”
  • 유아린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지만 박하은은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무슨 일인데요?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
  • 박하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최시혁과 손깍지를 꼈다.
  • “ 그게... ”
  • 유아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감독은 마른기침을 하면서 유아린 대신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
  • “ 연예인 한 명이 일정 때문에 빠진다고 해서요. 그래도 마음 놓으세요. 원래 5인조로 진행하려던 계획은 변하지 않았으니깐요. 유아린씨가 대신해주실 거거든요. ”
  • 그 말에 유아린은 미간을 좁혔고 최시혁의 얼굴 역시 굳었다.
  • “ 유아린씨가요? ”
  • 박하은은 당황한 얼굴에 의례적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 “ 아마 어렵지 않지 않을까요? 유아린씨는 총책임자이신데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면 일은 어쩌죠? ”
  • 유아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감독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은 걸 보았기 때문이다.
  • “ 모든 기획은 유아린께서 거의 마치셨고요. 그리고 아예 안 한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
  • 감독은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 유아린씨는 FC 엔터테인먼트의 편집장이시고 TY의 소설 대가 세요. 이미지나 팬덤이나 전혀 걱정할 게 없죠. ”
  • 감독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박하은은 감독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금방 해외에서 돌아왔으니 국내에는 팬이 얼마 없었으니 말이다. 다들 최시혁의 체면을 고려해 그녀에게 예의를 차린 것이다.
  • 박하은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입꼬리 역시 점점 굳어갔다.
  • “ 진짜... 생각 못 했네요. 유아린씨는 참 겸손하세요. ”
  • 유아린은 입꼬리가 경련될 정도로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가늠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놀라움과 망설임,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의 감정이 들어있었다.
  •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최시혁 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좋은 직업을 가졌는지는 몰랐기에 놀란 거겠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아린은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게 좋은 일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 그녀는 마른기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 “ 다 별거 아닌 것들이죠. 박하은씨, 저랑 계약하러 가시죠. ”
  • 그 뒤로 별의별 일들이 있었다.
  • 시간이 흐르고 다음 날 계획대로 사람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남아프리카의 한 섬에 있는 자연보호구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도중에 한 곳에서 경유하고 또 열 시간 넘는 비행을 거쳐 소비아 섬에 도착했다.
  • 그곳은 예상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갰고, 공기 중에서는 짜면서도 비릿한 내음의 습기가 느껴졌다.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갈매기들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있었다. 곳곳에서 자유가 느껴졌다. 섬 중앙은 열대우림이었고 촬영팀은 안테나를 설치하고 모두 설비들을 등에 메고 캠핑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정오가 되자 뜨거운 햇볕이 쏟아졌다. 최시혁은 솔선수범하여 공터를 찾아 사람들을 데려와 몸에 지니고 있던 공구들을 사용해 묵을 곳을 짓기 시작했다. 열대우림에서 텐트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섬에서 살아남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담수였다. 첫날밤, 최시혁은 날렵한 솜씨로 이름 모를 야생 닭을 잡아 와 저녁을 해결했다. 구급함을 제외하고는 먹을 것이라곤 없었다. 소금마저도 바닷물을 받아 햇볕에 증발 시켜 만든 것이었다.
  • 박하은은 예상외로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위해 과일도 채집하고 자기가 먼저 나서 의료와 관련된 일을 맡겠다고 했다. 그녀와 최시혁은 한 사람이 내조를 다른 한 사람이 외조를 하면서 손발이 잘 맞았다. 게다가 최시혁이 자주 박하은을 돌봐줬기에 두 사람을 커플로 묶으면서 프로그램의 인기도 높아졌다.
  • 유아린은 제작진의 일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진되어가는 담수 자원 때문에 갓 시작한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생기는 돌발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책임을 진 그녀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 다행히도 대부분이 사소한 문제라 인내심을 갖고 대하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유아린은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강인과 강호를 데리고 담수를 찾으러 나섰다.
  • “ 저기 누나, 가능하겠어요? ”
  • 강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연약해 보이는 유아린을 바라보았다.
  • “ 너 하나 손 봐주는 데 충분해. ”
  • 유아린은 폴짝 뛰어 올라가 자신의 바지를 단단히 겹쳐 올리며 노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 “ 오늘 오후에 금방 비 왔었으니까 모기랑 흡혈충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막아야 할 곳은 제대로 잘 막고 있어. ”
  • “ 너랑 하은이가 남아. 담수는 우리가 구하러 갈게. ”
  • 최시혁은 목재를 내려놓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 “ 왜? 걱정돼? ”
  • 최시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아린은 더 이상 그를 놀릴 마음이 사라져 자신의 옆에서 멍해 서 있는 천연인 강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 옷깃. 여미고 있어. ”
  • “ 난 아마존 우림에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야. 좋은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으라고! ”
  • 유아린의 해맑게 웃는 모습이 쏟아지는 옅은 금빛의 햇볕을 받아 최시혁은 눈이 부셨다.
  • “ 출발! ”
  • 그 한마디와 함께 유아린은 두 청년을 데리고 우거진 열대우림 사이로 들어갔다. 여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힘세고 체격 좋은 남성들을 전부 제치고 나무 막대기를 손에 든 채로 앞장서 길의 상황을 파악했다.
  • 촬영팀은 그녀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이동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유아린은 가는 내내 조리 있게 지휘를 했고 아주 정확하게 지하 수원을 찾아냈다. 강인과 강호 두 청년 역시 그녀의 실력이 존경스러우면서도 감탄스러웠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