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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인과응보

  • 최시혁은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유아린은 이상하다 생각하며 코웃음을 치며 긴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발목까지 오는 베로 만든 원피스에 길게 늘어뜨린 연한 갈색의 머리칼은 맑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아린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립스틱을 바르고 난 후 방문을 열었다.
  • 쿵.
  • 문 앞을 막고 선 커다란 몸에 유아린은 코를 박을 뻔했다. 그녀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 “ 뭐 해? ”
  • 강직한 얼굴의 그는 유아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 “ 나 이제 가도 되지? ”
  • 유아린은 그제야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올 때도 가져온 건 별로 없었고 갈 때도 최씨 집안의 그 무엇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 “ 어디 가려고? ”
  • 최시현이 담담히 물었다.
  • “ 어? ”
  • 유아린이 입꼬리를 휘며 물었다.
  • “ 왜? 나 걱정하는 거야? ”
  • 최시혁은 입꼬리를 내리며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 “ 못 들은 거로 해. ”
  • “ 그럼 진짜 간다? ”
  • 유아린은 신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 “ 전 남편. 그럼 강호에서 다시 만나. ”
  • 말을 마친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떠나려 했으나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몸이 굳어 발걸음을 멈췄다.
  • “ 잠깐! ”
  • 설마 번복하는 건 아니겠지?
  • “ 또 뭐가 남았어? ”
  • 유아린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에 최시혁은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 “ 갈 거면 멀리 떠나고. 다시는 얼굴 마주 하고 싶지 않으니까. ”
  • “ 그래! ”
  • 유아린은 냉큼 대답했다. 힐을 신은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 드디어 자유다!
  • 최씨 집안에서 벗어난 유아린은 공기마저 전과 달리 상쾌하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창이 내려가고 유아린과 무척이나 닮은 얼굴이 드러났다. 유아연의 얼굴은 그녀보다 고아한 느낌이 들었다.
  • “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 ”
  • 유아린이 미간을 좁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 내가 밥이라도 사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
  • “ 이혼하는 김에 밥이라도 같이 먹을 생각이야? 최시혁이 널 신경 쓸 것 같아? ”
  • 유아연은 유아린의 말에 열 받아 비꼬듯 말했다.
  • “ 그때도 나 아니었으면 네가 최씨 집안에 들어올 일이 있을 것 같아? ”
  • 하!
  • 유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아연이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몰라도 이미 꺼낸 말은 그녀의 가슴에 불을 내질렀다.
  • “ 그러게, 네가 말 안 했으면 잊을 뻔했네. ”
  • 유아린은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캐리어를 몸 앞에 놓고 유아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 네가 최시혁한테 약을 쓰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 사람이랑 잤을까? 쯧, 안타깝게 됐네. 최시혁이 밤 기술은 좋더라고. ”
  • “ 이! 이 수치도 모르는 인간이! ”
  • 유아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 “ 넌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최시혁은 널 버렸어. 네가 아직도 최씨 집안 사모님인 줄 알아? ”
  • “ 그래도 최씨 집안 사모님을 해 본 편이 안 해 본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으면 뭐 해? 침만 흘리게? ”
  • 유아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유아린의 콧대를 짚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 “ 그때 네가 그 사람 빼앗아가지만 않았어도! 내 것은 다른 사람이 영원히 못 빼앗아가게 할 거라고! ”
  • 자기 것을 빼앗았다고?
  • 유아린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 “ 누가 네 것을 빼앗았는데? 말은 똑바로 하자. ”
  • 유아린은 검지로 유아연의 차 문을 가리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 “ 너 알아? 박하은 오늘 귀국한다는 거. ”
  • 담담한 한마디에 유아연의 낯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 박하은. 박하은이었다.
  • 그때 박하은이 출국하지만 않았어도 최시혁이 술에 취할 일이 없었고 그랬다면 유아연이 그의 술에 약을 탈 기회도 없었을 거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유아린이 최시혁과 자게 된 것이었다.
  • 유아린은 눈앞의 깜짝 놀란 유아연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살펴보고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박하은이 돌아왔다던데. 너한테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최민주의 다급한 목소리도 덤으로 말이다.
  • “ 엄마, 엄마! 엄마 왜 그래? 큰일이야. 엄마가 쓰러졌어! ”
  • 유아린이 고개를 돌리자 최민주가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의 자기 엄마를 끌어안고 있는 게 보였다. 유아연은 그 모습에 황급히 차에서 내려 그들을 도와주러 갔다.
  • 이게 바로... 인과응보인 건가?
  • 박하은을 억지로 출국시키려고 작당하던 두 모녀가 거기서 엿듣고 있었다니. 유아린은 최민주의 엄마가 고혈압을 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소식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최씨 집안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 그런데 그게 뭐?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 유아린은 찬란한 미소를 띤 얼굴로 몸을 돌려 택시를 잡았다.
  • “ FC 엔터테인먼트로 가주세요. ”
  • 최씨 집안에 3년 동안 있으면서 다들 그녀가 최시혁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와 그녀의 절친인 김소연만이 그녀가 FC 엔터테인먼트에서 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작가가 아니라 황금 같은 시나리오를 써내는 대작가였다. 누가 그녀를 기생충이라 불렀던가? 유아린은 자신이 최시혁을 떠난다 해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걸 직접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 유아린은 차에서 내려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곧장 FC 엔터테인먼트로 걸어갔다. 미리 데스크에 연락하지도 않고 곧바로 편집부로 바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 우리 대작가님 오셨네! ”
  • 김소연은 고개를 들지 않고서도 유아린이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유아린의 결혼에서부터 이혼까지 옆에서 쭉 그녀를 지켜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 “ 오늘 유아린은 솔로로 돌아왔다! ”
  • 유아린은 진지한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며 김소연에게 말했다.
  • “ 오늘부터 돌아온 싱글 대작가님 정희원이라 불러다오! ”
  • 장희원은 유아린의 편집부에서 쓰던 필명으로 근 몇 년간 그 필명으로 많은 대작들을 내온 소설 대가였다.
  • “ 네네네! ”
  • 김소연은 그녀를 옆에 앉히면서 그녀의 다리와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마실 것을 대령했다.
  • “ 또 좋은 소식 있는데 알려줄까? ”
  • 유아린은 차를 한입 들이마시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 “ 너, 이유 없이 아첨하는 걸 보니 뭐 있지. ”
  • 김소연은 뽀송뽀송한 머리카락을 흔들어 보이더니 간사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 “ 그렇지. 왜 이렇게 똑똑해? 네가 기획한 야외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HC 쪽에서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그래서 촬영하기로 결정 났어. ”
  • “ 진짜? ”
  • 유아린의 예쁜 눈썹이 확 펴지면서 활짝 핀 얼굴로 말했다. 무척 기쁜 상황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김소연의 미소 뒤에 음모가 숨겨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쯧, 아니지. 너 또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
  • 유아린은 그녀의 작은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 얼른 사실대로 불지 못할까! ”
  • 김소연은 눈을 가늘게 휘면서 유아린의 빈 잔에 차를 채우며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건넸다. 그녀는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 “ 그 사람들 요구가 딱 하나 있기는 해. 최시혁 꼭 출연시키라고 하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