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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사기당하다

  • 유아린의 입에서 차가 뿜어져 나왔고 미처 피하지 못한 김소연은 얼굴에 그걸 뒤집어쓰게 됐다.
  • “ 케켁. 뭐, 뭐라고? ”
  • 유아린은 얼마나 놀란 건지 말까지 더듬었다. 김소연은 평온한 얼굴로 티슈로 물기를 닦아내며 또박또박 말했다.
  • “ HC에서 야외 생존 경험이 있고 이미지도 좋은 사람을 쓰고 싶어 하더라. 그래서 당연히 최시혁이 생각났지. ”
  • 유아린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 “ 나 방금 이혼했는데? ”
  • 김소연은 생각도 않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 “ 응응응... ”
  • “ 최시혁이 나 집에서 쫓아냈어. ”
  • 유아린이 팔짱을 낀 채로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 그리고 화 좀 풀자고 최민주까지 냅다 패 버리고 왔고. ”
  • “ 응응... 응? ”
  • 김소연은 그녀의 말에 삽시에 표정이 무너졌다.
  • “ 아니, 왜 그런 거야, 도대체? ”
  • “ 누가 그 사람들이 최시혁을 찾을 줄을 알았겠냐고. ”
  • 유아린은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러다 짜증이 났는지 말을 이었다.
  • “ 나 이혼한 지 2시간도 안 됐는데. 지금 나 보고 전남편을 내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설득하라고? ”
  • 유아린은 김소연의 가슴팍을 힘주어 꾹 누르며 말했다.
  • “ 다들 가슴 큰 사람은 머리가 안 좋다던데. 넌 왜 가슴도 없고 머리도 안 좋아? 그걸 수락했다고? ”
  • “ 이미 계약도 체결했어. ”
  • 김소연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꼭 하고야 말 거라는 의지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 “ 위약금이 자그마치 50억인 데다가 HC 쪽에서는 이미 사람도 섭외해 놓는 중이라고. 지금 번복하면 그 사람들 경비까지 다 물어줘야 한다고. ”
  • 유아린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김소연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50억이라니? 지금 그녀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50만 원도 꺼내기 힘들었다.
  • 김소연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녀를 달래주려 미소를 지었다.
  • “ 아린아, 너도 너희 집에서 독립해서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
  • 유아린은 그녀를 쏘아보면서 비웃는 투로 말했다.
  • “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냐? ”
  • “ 유아연 그게 네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하는데, 나도 너 도와야지. ”
  • 김소연은 알랑거리며 웃는 얼굴로 유아린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 “ 생각해봐. 이것만 되면 3억이 들어온다니까. 그것도 세금 빼고. ”
  • “ 우리 반반씩 나누자. ”
  • 김소연은 눈을 가늘게 휘었고 유아린은 무표정이었다. 김소연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 “ 그래. 네가 8, 내가 2. ”
  • 유아린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 “ 잠깐! ”
  • 김소연이 다급히 유아린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꾹 누르며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말했다.
  • “ 네가 9, 내가 1. 더 안 바랄게. 바로 계약서에 사인해도 돼. ”
  • 유아린은 다시 몸을 돌려 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 그래! 콜! ”
  • 김소연은 뭔가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유아린은 이미 나가서 최시혁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체면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3억, 글을 얼마나 써야 벌어들일 수 있을까?
  • 유아연만 편애하던 그녀의 아빠는 갖가지 수를 써 그녀를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려 했고 만약 이혼한다면 유씨 집안에 지금껏 그녀를 키워 준 대가로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고 협박했었다. 그것도 친아빠라는 사람이.
  • 전화 연결음이 두 번 울렸다. 유아린은 자신이 유씨 집안을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는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세 번째 연결음이 올리고 전화가 끊겼다. 유아린의 아름다운 환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최시혁이 전화를 받았다.
  • “ 무슨 일이야. ”
  • 모두를 멀리하려는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 “ 시혁씨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
  • 유아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 별일 아니면 끊는다. ”
  • 최시혁에겐 먹히지 않았다.
  • “ 잠깐잠깐! ”
  • 유아린이 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 우리 프로그램 하나가 널 섭외하고 싶어 하거든. 야외 생존 서바이벌인데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하는 거야. HC에서 널 섭외하고 싶다고 해서. 가능해? ”
  • 전화 건너편에 2초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최시혁은 곧 코웃음을 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 유아린. 우리 방금 이혼하지 않았나? ”
  • “ 아... 뭐 그런 일도 있었지... ”
  • 유아린이 대충 얼버무리면서 대꾸하자 최시혁은 얼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 내가 궁금한 건, 지금 네가 무슨 신분으로 날 섭외하는 거냐야. ”
  • “ 어... 친구! ”
  • 유아린이 어색하게 웃었다가 최시혁이 전화를 끊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얼른 말을 보탰다.
  • “ 잠깐! 그러니까 전처! 한 이불 덮고 살던 사람이랄까...? ”
  • 유아린은 그 말을 내뱉고는 바로 후회했다. 최시혁의 준수한 얼굴에 떠올랐을 비웃음 가득한 표정이 이미 상상이 갔다.
  • “ 거절할게. ”
  • 단호한 말과 함께 최시혁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붙잡고 있던 유아린의 손가락은 희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며 자신을 위로했다.
  • 핸드폰 부서지면 또 돈 주고 사야 해...
  • 유아린은 이를 꽉 깨물고 2초 정도 버텼다가 매니저한테 연락했다.
  • “ 지금 당장 시카고에서부터 T 시로 향하는 비행기가 언제 도착하는지 알아봐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
  • 전화로 안 통하면 직접 만나서 얘기할 생각이었다.
  • 유아린은 높은 힐을 신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메시지를 받아 바로 김소연의 차를 몰고 나갔다. T 시의 공항은 시중심가로부터 차를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교외에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40분 전으로 최시혁의 성격에 그곳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 유아린은 액셀을 힘껏 밟았다. 최시혁이 박하은을 만나기 전에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 그와 동시에 T시 공항.
  • “ ... 안녕하세요, 승객 여러분. 국제항공편 TZ489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이용객분들은 국제항공편 전용 출구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 최시혁은 VIP 통로에서 검은색 정장에 살짝 색이 바랜 핑크색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스쳐 지났다. 그의 시선 안으로 가녀린 몸이 나타나자 그는 꽉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풀며 앞으로 나서 자연스레 그녀의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박하은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포옹하면서 3년 동안의 그리움을 풀어내고 있었다. 유아린이 주차장에서부터 픽업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 젠장! 왜 예정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한 거지? 그것도 하필 오늘?
  • 최시혁과 박하은이 차에 오르는 모습에 유아린 역시 다시 차에 올라 그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좋은 환경의 레스토랑에 도착해 차를 대었다. 유아린은 모자를 눌러쓰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룸 번호를 엿들은 유아린은 십 분 정도 기다리다가 박하은이 화장실을 가는 사이 서빙하러 가려는 웨이터를 붙잡았다.
  • “ 잠깐만요. 제가 할게요. ”
  • 유아린은 그녀 특유의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웨이터는 당황한 표정으로 룸 앞에 도착했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 “ 제가 친구예요. 저 들어가는 거 보고 계셔도 돼요. ”
  • 유아린이 노크를 하자 차갑지만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들어오세요. ”
  • 유아린은 웨이터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고 접시를 그들의 앞에 내려놓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 “ 뭐 더 하실 일 있으신가요? ”
  • 최시혁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 “ 그럼. 섭외 얘기해야지. ”
  • 유아린은 활짝 웃어 보이며 모자를 벗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흘러내리고 미소 띤 얼굴이 최시혁의 앞에서 아른거렸다.
  • “ 서프라이즈, 전남편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