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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유아린이 다쳤다

  • 유아린은 힘겹게 몸을 가누고 폭풍우를 맞으며 눈을 겨우 뜨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눈꼬리가 붉게 물든 차가운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 “ 최시혁? ”
  • 온종일 뒤숭숭한 우발사건에 정신이 마비된 탓인지, 아니면 갑자기 폭풍우 속에 노출된 탓인지, 유아린은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지킨 코앞의 키 큰 남자를 보면서 입술은 움직였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 “ 너 괜찮니? ”
  • 최시혁은 눈썹을 찌푸리며 큰 공포를 억누르려 애썼다.
  • 유아린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더니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떨리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발견 못 한 듯했다.
  • “ 괜찮아... 헉! ”
  • 최시혁의 팔을 짚고 일어서려 하자, 오른쪽 종아리 피부에 갑자기 따끔따끔한 통증이 퍼져 오더니, 아직 안정되지 않은 몸은 다시 또 녹초가 되었다.
  • “ 누나, 괜찮아요?! ”
  • 강인, 강호 그리고 급하게 달려온 제작진의 얼굴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 “ 시혁이 형? 돌아왔어요?! ”
  • 강호는 눈앞에서 유아린을 품속에 감싼 사람을 놀란 얼굴로 보면서 급히 혼미한 아이를 안았다.
  • 강인도 앞으로 나가 유아린을 도우려다 최시혁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왼팔은 조심스럽게 무릎 안쪽을 받치고는 가로질러 품에 안은 것을 보았다. 유아린은 깜짝 놀라 잠시 소리를 지른 뒤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 이 동작을 지켜보던 두 베이글 남과 제작진은 어리둥절했다. 강인은 눈치 없게 둔한 말투로 물었다.
  • “ 시혁이 형, 누나... 다쳤어요? ”
  • “ 약상자는 어디 있어? ”
  • 최시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 아... 어! 빨리 따라와요! ”
  • 강인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최시혁을 안내해서 몇 미터 떨어진 텐트로 급히 달려갔다.
  • 최시혁은 텐트안에 도착하여 유아린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얼굴의 서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군말 없이 유아린의 바짓단을 찢기 시작했다.
  • 바지를 무릎까지 말려 올리자, 10cm 남짓한 엄지손가락만 한 상처가 흙과 모래가 묻은 채로 흙탕물과 핏물의 혼합물이 발목을 따라 하얀 양말을 붉게 물들였고, 검붉은 상처가 하얀 피부에 유난히 눈에 거슬리게 보였다.
  • 강인은 약상자를 최시혁에게 건네주면서 유아린의 상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 “ 이렇게 심했어요? 누나, 아프지 않아요? 미안해요... 다 우리 탓이에요. 우리 때문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
  • 강인의 눈에 미안함이 가득해 하자 유아린은 아픔을 참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 “ 괜찮아, 약간의 찰과상일 뿐이야, 너희들만 괜찮으면 돼. ”
  • 강인은 거듭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서서 유아린에게 마른 수건과 그녀의 배낭을 가져다주었다.
  • 최시혁은 어깨에서 자신의 배낭을 벗고는 그 안에서 개봉하지 않은 생수 한 병을 찾아내 뚜껑을 열고는 주저 없이 그녀의 종아리에 쏟아부었다.
  • 유아린은 급하게 그의 동작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 “ 아니야, 내가 처리하면 돼. ”
  • “ 네가 할 줄 알아? ”
  • “ ... ”
  • 최시혁은 무뚝뚝하게 유아린의 손을 팽개치고, 계속해서 그녀의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
  • 유아린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그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지금 사과를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났다.
  • 최시혁은 늘씬한 두 다리의 한쪽 무릎을 꿇고는 각진 손가락으로 물과 소독솜을 든 채 조심스럽게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면서 세심하게 흙과 모래를 상처 부위에서 치워냈다.
  • 양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얇은 입술은 기분 나쁜 그의 심경을 암시했다. 유아린은 입을 삐죽거리며 자신이 다쳐서 그를 귀찮게 한 게 아닌가 고 추측했다.
  •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유아린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시도했다.
  • “ 너희들 무슨 문제가 생긴 거 아니야? ”
  • “ 해결됐어. ”
  • “ 오. ”
  • 됐어. 이 사람 성격은 종잡을 수 없으니 조용히 있는 게 좋아.
  • 2분 가까이 침묵이 흐른 후 생수 한 병이 동났다. 최시혁의 얼굴은 조금도 아쉬운 기색이 없었고 상처 청소가 끝나자 물병을 가방에 던지고는 고개를 돌려 약상자에서 빨간약을 꺼냈다.
  • 유아린은 다시 말리면서 오른쪽 다리를 뒤로 약간 움츠린 채 손을 내밀어 약병을 가지려고 했다.
  • “ 빨간약은 혼자 바를 테니 번거롭게 안 할게. ”
  • 최시혁이 이번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가 내미는 손을 피해 직접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오른쪽 발목을 움켜잡았다.
  • 유아린은 무슨 말을 더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뻔뻔해도 이렇게 갑자기 다가온 스킨십에 그녀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 빨간약 소독을 마치고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최시혁이 약상자 안에서 한참 뒤적이더니 '의료용 알코올'이 적힌 약품을 집어냈다.
  • 유아린은 속으로 숨을 들이마시더니 뭔가 켕기듯이 말했다.
  • “ 이 정도 상처에 빨간약 좀 바르면 될 텐데 알코올은 필요 없지? ”
  • 최시혁은 고개를 들어, 늘 강한 모습만 보이던 여자가 어린애 같은 기분을 드러내 눈앞의 그녀를 보면서, 차가운 표정에 마침내 알아차릴 수 없는 웃음기가 스쳤다.
  • “ 아플까 봐 무서워서 그래?”
  • “ 아니, 나는 단지 보급품이 공급되지 않아 하루를 더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약품을 아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 ”
  • 소리가 약한 그녀의 말투는 속마음을 훤히 드러나게 했다.
  • “ 열대우림에는 갖은 미생물이 있는데, 너 없이 집에 갈 때까지 버틸 수 있겠니? ”
  • “ 그런데... 혹시 또 사람이 다치게 되면? ”
  • 최시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을 가볍게 비틀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 “ 괜찮아. 아직 큰 병이 한 통 남았어. ”
  • 순간 절망한 유아린은 눈시울이 촉촉이 젖었다. 아픈 거 아니잖아? 이런 작은 일은 그래도 참을 수 있다고 체념한 채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 “ 그럼, 수고해줘. ”
  •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직접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은 눈을 감고 얼굴에 죽음을 향해 치닫는 표정을 한 채, 조금 창백한 입술을 오므리고, 눈가는 긴장감 때문에 가볍게 떨렸다. 최시혁은 뜻밖에도 이 무례한 여인이 조금은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 “ 괜찮아. 살살할게. ”
  • 유아린이 '고문'을 받고 있을 때 박하은이 감독과 연출팀을 대동하여 황급히 현장에 도착했다. 한 무리가 문을 부술 기세로 들어와 텐트 안으로 부리나케 비집고 들어왔다.
  • 상처를 청소하고 있던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일행은 멍한 기색이 역력했다.
  • 감독이 부랴부랴 달려가서 유아린에게 물었다.
  • “ 유아린 씨, 다쳤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
  • 유아린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목소리는 살짝 떨리면서 대답했다.
  • “ 괜찮습니다. 나무에 맞아서 생긴 찰과상일 뿐이지 큰 문제는 없습니다. ”
  • 감독은 그제야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 “ 그래요. 뼈와 근육이 안 다쳤으니 다행입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
  • 박하은은 상처 처리에 여념이 없는 남자를 바라보며 가슴 한쪽에 싸늘함이 느껴졌다. 최시혁이 이때 돌아올 줄 알았으면, 안달 음에 감독에게 달려가서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만약에, 아이들을 위해 다친 게 자신이라면, 뭇 사람에게 주목받는 건 유아린이 아니었을 텐데.
  • 감독은 다시 물었다.
  • “ 당신들이 아이를 하나 찾았다고 하은에게 전해 들었는데요? ”
  • 박하은은 정신을 차렸다. 얼굴의 평온한 표정이 하마터면 굳어질 뻔했다.
  • “ 아, 맞아요, 다른 텐트에 있을 겁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