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8화 무슨 원한이 있다고

  • 최시혁은 힘주어 사인을 마치고 펜을 내팽개치고는 자리를 떴다.
  • “ 프로그램 시작하기 전까지 나한테 연락하지 마. ”
  • 차갑게 말을 내뱉고서는 몸을 돌려 떠났다.
  • 뭐야? 유아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서류를 집어 든 그녀는 종이에 거의 찢길 듯이 힘주어 적힌 글자를 보았다.
  • “ 무슨 원한이 있다고. ”
  • 유아린은 구시렁대며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방금 귀국한 박하은씨 매니저한테 연락 좀 해줄래요? ”
  • 그녀는 멈칫하다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가 몰고 온 장갑차는 이미 떠났었다. 유아린은 아까 최시혁의 번호를 묻지 않은 게 살짝 후회됐다.
  • “ 저희 HC 라이브 플랫폼의 기획팀인데 박하은씨한테 우리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세요. ”
  • 유아린은 전화를 끊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마지막 기획을 시작했다.
  • 다른 한편. 박하은은 의자에 기대앉아 네일아트를 받고 있었다. 매니저인 이미영이 조금 전 얘기를 그녀에게 전해주자 천천히 눈을 떴다.
  • "가야지, 왜 안가."
  • 박하은은 손을 들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 “ 어렵사리 얻은 기회인데. 너도 알잖아, 최씨 집안이 군사 면에서 지위가 높다고 해도 내가 연예계로 진입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돼. ”
  • “ 하지만... ”
  • 이미영의 잘생긴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 “ 하지만 그 유아린이란 사람은 최시혁씨 전처라고 하지 않았어요? ”
  • 박하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보기 드물게 차가운 한기가 서려 있었다
  • “ 시혁이가 이미 이혼했다고 하더라. ”
  • “ 그런 일은 최대한 피하자. 유아린은 이번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이기도 하니까. ”
  • 이미영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 “ 우리한테 시비만 안 걸어도 다행이죠. 둘이 삼 년을 같이 한 사이인데... ”
  • 박하은은 차갑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최시혁이라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돌아오자마자 이혼하지는 않았을 거야. ”
  • 이미영은 할 말이 있는 기색이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박하은은 한쪽 손을 먼저 들어 보이고는 표정을 달리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 안 예쁘잖아, 다시 해! ”
  •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고 보름 정도 지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모든 연예인들의 일정을 전부 조정해놓고 유아린은 약속대로 매니저한테 부탁해 최시혁에게 오늘 자리에 참석해달라 얘기를 전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 연락을 하기 전까지 그와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 “ 준비 마쳤습니다. ”
  • 매니저가 손짓했다.
  • 유아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맞은편에 앉아 마지막 메이크업 준비를 하는 연예인들을 향해 말했다.
  • “ 5분 남았습니다. 전부 준비해주세요. ”
  • 유아린은 단상 위에 올랐고 모두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 “ 여러분, 안녕하세요. ”
  • 드문드문 이어진 박수 소리에 유아린은 웃어 보였다.
  • “ 아직 도착하지 않으신 분 있나요? ”
  • 제일 앞줄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두 공석에 향했고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최시혁과 박하은의 자리였다.
  • “ 최시혁도 온다면서요? ”
  • 연예인 중에서도 잘 나간다는 한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에 대한 선망을 전혀 감추지 않고 말했다.
  • “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금수저잖아요. 그 사람 안 왔으면 저도 안 왔을 거예요. ”
  • 유아린은 무미건조하게 웃어 보였다. 그들이 최시혁이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유아린은 그들을 기다릴 마음이 없어져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려했을 때 회장의 문이 경호원들에 의해 열렸다.
  • 역광을 받으면서 들어온 늘씬한 몸매의 남자는 보기 드물게 어두운 컬러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선명한 흑백 컬러가 대조되면서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더욱 부각했다. 마치 외계의 다른 생명체처럼 고고한 태도로 당연하다는 듯이 모두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 군인은 일반인들과 분위기 자체가 무척 달랐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장엄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일 줄 알았고 그들에게서는 모두를 멀리하는 듯한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최시혁은 태어나기를 서구적인 이목구비에 큰 키, 그리고 강한 분위기를 가지고 태어났다.
  •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조용히 감탄하거나 그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예쁘게 꾸미고 온 박하은이 서 있었다.
  • 유아린이 박하은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실물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전에 그녀는 이미 사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유아린이 최시혁을 만나기도 전부터 유아연이 그녀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 검은색의 원피스를 입은 박하은의 몸매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비스듬한 각도로 태슬이 달려있어 그녀의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 피부가 흰 편인지라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은 아니었지만 청아한 느낌이 들었고 부드러운 눈빛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독 도드라졌다.
  • 두 사람이 같이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남선녀 같았다.
  • “ 최시혁씨, 박하은씨, 환영합니다. ”
  • 유아린은 입꼬리를 휘며 대외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
  • “ 최시혁 옆의 여자는 누구야? ”
  • “ 본 적 없는 얼굴인데? ”
  • 좌석에 앉은 이들이 의논하는 소리에 박하은은 불편한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고 최시혁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는 같이 좌석에 앉았다.
  • “ 제가 소개하도록 하죠. 이분은 저희의 특별 게스트로 시카고에서 온 미녀 바이올리니스트인 박하은씨입니다. ”
  • 드문드문 이어지던 박수 소리가 점점 더 사그라들었다. 한지은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옆에 앉은 매니저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말을 다 한 건지 그녀는 몸을 바로 하며 조심스레 주위에 촬영하는 기자들이 있는지를 살피고는 이미지 따위는 생각도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 단상 위에 서 있던 유아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룰에 대해 설명을 진행했다.
  • “ 매니저님들은 도와주시면 안 됩니다. 계약서에서 이와 관련된 조항을 이미 읽으셨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필수품으로 화장품을 너무 많이 가져오시면 안 되고요. 꼭 필요한 생존 물품과 구급함을 제외하고 모든 분은 세 가지 개인 물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
  •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모두 절차대로 테이프절단식을 마쳤다. 그러나 마지막이 되어서도 한지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니저는 진땀을 흘리면서 유아린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에 유아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필 제일 관건적인 시기에 문제가 생기다니.
  • “ 여러분, 먼저 쉬고 계세요. 저는 다른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 유아린은 태연자약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으나 부드러운 여성의 음성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 “ 유아린씨, 잠시만요. ”
  • 박하은은 갑자기 앞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 “ 저 아직 계약서에 사인을 안 했더라고요. 그전에는 시혁이가 대신해준 거라 마지막으로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
  • 유아린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네, 그럼 제 사무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