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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충전 좀 하자

  • 밤은 깊어졌다.
  • 임 씨 저택의 한 별장 안, 어느 조용한 방.
  • 한 남자가 예스럽게 걸어들어오더니 로열 체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 로열 체어 위엔 눈을 감고 누워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 “파편에서 독극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유동식은 지금쯤 도련님 뱃속에 있었을 겁니다.”
  •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뜻밖의 상황이 없었다면 도련님은 이미 산송장으로부터 송장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 체어에 누워있던 사람은 눈 뜨기도 귀찮았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느긋하게 말했다.
  • “알았어.”
  •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물었다.
  • “어떻게 할까요?”
  • “곧 죽을 목숨을 누군가 미리 끝내주려는 거잖아. 이렇게 별거 아닌 건 나한테 보고 안 해도 돼.”
  • 그 사람은 인간의 목숨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 옆에 있던 남자도 그 대답에 별로 놀라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 지금의 도련님은 그저 임 씨 가문에게서 버려진 무능태니까.
  • 무능태가 죽든지 말든지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 그때, 남자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더 물었다.
  • “그 유동식, 사모님께서 실수로 깨뜨렸다고 하던데…. 그러기엔 너무 우연 아닌가요?”
  • 체어에 앉아있던 사람은 우습게 여겼다.
  • “시골에서 태어나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따지 못한 여자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 ….
  • 한편, 고등학교 졸업장도 따지 못한 시골 소녀 하시연은 노트북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 트롬빈에 관한 모든 데이터는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지만 그 데이터들을 다시 정합하여 정밀한 데이터베이스를 모델링 하는 건 어마어마한 시간과 정력이 수요된다.
  • 프로젝트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은 하시연은 다른 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니까 임준을 건드리기는커녕 내려가서 밥 먹는 시간도 그녀에겐 사치였다.
  • 그래도 하시연은 끼니를 굶지는 않았다.
  • 딱 한 가지 요구뿐이었다. 임준이 뭘 먹으면 따라서 뭘 먹겠다고, 굳이 번거롭게 새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 손 집사는 이미 적응되었는지 하시연의 이상한 요구에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 그는 하시연이 도련님을 해코지하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요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 ….
  • 며칠 연속으로 밤새우며 열심히 일한 결과, 하시연은 세 번째 날 오후에 예정보다 빨리 완성했다.
  • 트롬빈 약물 프로젝트 보고서를 메일로 보낸 후, 그녀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
  • 흐느적거리며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누워있는 미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그녀는 힘없이 손을 내밀어 임준의 볼을 콕 찔렀다.
  • “충전 좀 하자!”
  • 하시연이 몇 번 찌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하시연은 깜짝 놀랐다.
  • 순간, 손 집사가 임준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 손 집사가 방안에 CCTV라도 설치했나? 그새 찾아온다고?
  • 하시연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엔 도우미 한 명이 서있었다.
  • 그녀가 문을 열고나니 도우미는 갑자기 뒷걸음질을 쳤다. 도우미는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혐오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아버님 일층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 그 말을 하고 도우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도망쳤다.
  • 하시연은 그 모습이 이해가 안 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왜 저래?”
  • 그리고 아버지가 웬일로 갑자기 그녀를 찾아온 걸까?
  • 하시연은 의문을 갖고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씻고 아버지를 만나러 일층에 가려 했다.
  •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 하시연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도 역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