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은은 문밖에 선 채 방 안에서 들려오는 야릇한 대화들에 분노로 몸이 파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서 있는 이곳은 그녀의 신혼집이었다. 그녀와 안시훈의 신혼집.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그녀가 신경 써서 고른 것들이었고, 모든 구석구석의 인테리어 역시 그녀가 고심 끝에 결정한 것들이었다.
방 안에 있는 신혼 침대는 어제 방금 도착한 것이었고 내일이 바로 두 사람의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약혼자가 두 사람의 신혼 침대 위에서 다른 여자와 뒹굴고 있는 것이다.
현관부터 안방까지 옷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고, 미처 완전하게 닫지 못한 방문은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그녀는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쪽 약혼자와 뒹굴고 있는 여자가 제 여자 친굽니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는 훤칠한 신장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날카로운 그의 눈매는 마치 밤하늘을 나르는 독수리의 그것과도 같이 차갑고 오만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저도… 저도 피해자예요.”
정신을 차린 신지은은 서러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벽 위에는 그녀와 안시훈의 웨딩사진까지 걸려있었고, 결혼식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속상했다.
“지은아?”
끝내 문 가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안시훈은 허겁지겁 여자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런 그와는 달리 여자는 꽤 침착했다.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가렸다. “남자 친구”에게 바람의 현장이 들킨 것에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은아, 내 말 좀 들어봐.”
안시훈은 침대 시트를 당겨 자신의 몸을 가리고는 그녀에게 달려와 시뻘게진 얼굴을 한 채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신지은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는 곧 자신과 결혼하게 될 남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그렇게나 낯설었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안시훈의 뺨을 내려쳤다.
“그래, 설명해 봐.”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난 그냥 침대가 좋은지 한번 써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순간 참지 못하고…”
신지은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또는 약에 당한 것이었다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어쩌면 그녀는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현재 침대가 좋은지 한번 써보고 싶었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시훈, 넌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그러자 안시훈은 시뻘게진 얼굴로 화가 잔뜩 난 듯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 나 바람났다. 그래서 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결혼할 사이인데도 비싼 척, 손만 잡을 수 있게 하고, 키스도 못 하게 했잖아. 우리가 무슨 초등학생인 줄 알아? 나도 남자야. 나도 해소가 필요하다고. 그런데 너는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니까,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이라도 건드린 거잖아.”
“그래서, 네가 바람난 게 다 내 탓이라는 거야?”
그녀는 안시훈이 이렇게까지 염치없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 물었다. 그는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모든 탓을 그녀에게로 돌리며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퍼붓고 있었다.
그녀는 분노로 인해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당연히 네 탓이지. 만약 네가 진즉에 널 건드릴 수 있게만 해줬더라면, 나도 함부로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진 않았을 거라고.”
안시훈은 꽤 당당하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고 조금 뒤, 그는 다시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지은아, 내일이면 결혼식인데, 이 일은 그냥 없었던 걸로 하고 넘어가자. 분명 너도 너희 할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너희 할머니가 네 결혼을 얼마나 바라고 계셨는데. 만약 네가 갑자기 결혼을 취소한다고 하면 분명 걱정하실 거야.”
“네 말이 맞아.”
신지은은 눈시울을 붉힌 채 말을 내뱉었다.
“난 할머니를 걱정시킬 수 없어. 그래서… 결혼식을 취소할 수 없어.”
이에 안시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지은이라는 여자애는 가장 구슬리기 쉬운 존재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랑 합시다, 그 결혼.”
그러던 그때, 등 뒤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말은 충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신지은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치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 뚜렷한 이목구비의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예요?”
“농담인지 아닌지는 해보면 알겠죠.”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 누구야? 이 여잔 내 여자야.”
안시훈은 화가 잔뜩 난 채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남자의 힘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셌다.
그는 단숨에 안시훈의 손을 뿌리쳐낸 뒤, 차가운 눈빛으로 침대 위의 여자를 힐긋 쳐다보고는 신지은을 이끌고 그곳을 떠나갔다.
……
한 시간 뒤, 두 사람은 구청 문 앞에 도착했다.
“신분증 갖고 있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항상 챙겨 다니죠.”
신지은이 답했다.
“좋은 습관이군요.”
남자는 그런 그녀를 향해 칭찬을 한마디 내뱉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 서울은 한 여름이었고, 또한 오늘은 유난히도 날씨가 무더웠다. 차에서 내려 문 앞까지 걸어오는 그 짧은 거리만으로도 신지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