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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임신했어요?

  • “고... 고맙습니다, 대표님.”
  • 손지현은 허둥지둥 제자리에 섰다. 그와 맞닿은 손끝이 아직도 파르르 떨렸다.
  • “저는 통역팀의 손지현입니다. 이번 협상에서 제가 통역을 담당할 거예요.”
  • 그러자 박기성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 “그럼 잘 부탁해요, 지현 씨.”
  • “별말씀을요.”
  • 손지현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박기성은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말을 마친 그가 상대 대표와 함께 걸어가자 손지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손지현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가 그들을 안내했다.
  • 이번 협상에 양측의 인원이 많아 손지현은 특별히 큰 룸으로 예약했다. 일행과 함께 룸으로 들어온 후 그녀는 또 밖으로 나와 종업원에게 20분 뒤에 음식을 올리라고 했다.
  • 그녀가 다시 룸으로 돌아왔을 땐 테이블에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 “지현 씨,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 장 실장이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 “이번 협상 잘 부탁해요. 전 일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해서요.”
  • 장 실장의 자리는 박기성의 옆자리였고 박기성의 다른 옆자리에는 스위스 대표가 앉아있었다. 손지현은 거절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 이번 협상 내용은 해상 운송 비용에 관한 것이었다. 상대측 회사는 몇 년간 FS 그룹 산하의 한 회사에서 제품을 구매했는데 이번에 더 많이 구매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해상 운송 비용이 많이 들어 FS 그룹에서 가격을 조금 낮춰줬으면 했다.
  • 손지현은 상대의 로망슈어를 제대로 듣기 위해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 박기성이 바로 그녀 옆에 앉아있어 가끔 팔이 박기성과 부딪치기도 했다. 손지현은 그의 얇은 셔츠 사이로 올라오는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 가끔 정신을 딴 데 팔 때는 그날 밤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면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 ‘왜 계속 이런 생각만 떠오르는 거야!’
  • 상대측 대표의 말을 박기성에게 전한 후에야 손지현은 몸을 뒤로 가누었다.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시뻘게진 얼굴을 가리려고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그런데 그때 누군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박기성이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어딘가 이상했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왜 저렇게 보지?’
  • 손지현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무심결에 테이블을 힐끗 보니 그녀는 아직 왼쪽 손으로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들고 있는 와인잔은 박기성의 것이었다.
  • 알고 보니 박기성의 와인을 마신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쳐다보지.
  • 그 순간 입속에 머금고 있던 와인이 마치 뜨거운 철 덩이처럼 삼킬 수도, 안 삼킬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와인을 삼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 박기성은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폈고 입가에 흥미진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 ‘전혀 당황하지 않네?’
  • 호탕한 성격의 박기성은 상대측 대표에게 해상 관세를 깎아주겠다고 했다. 협상은 30분 앞당겨 끝났고 양측은 자리에 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함께 점심을 먹었다.
  • 룸 안에 사람이 많아 에어컨 온도가 매우 낮았다. 젓가락을 몇 번 들지도 않았는데 속이 불편해진 손지현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박기성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 “먼저 가서 쉬어요. 협상은 이미 끝났어요.”
  • “고마워요, 대표님.”
  • 손지현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무지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어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 그녀를 힐끗 보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화장실로 들어온 손지현은 문도 잠그지 못한 채 변기를 잡고 마구 토했다. 한바탕 속을 비우고 나니 매우 편해졌다. 변기 물을 내리고 돌아섰는데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 “대... 대표님.”
  • 문에 기대어 있는 남자를 본 순간 손지현은 화들짝 놀랐다.
  • “여긴 여자 화장실이에요. 남자 화장실은... 저쪽이에요.”
  • 박기성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손지현은 순간 움찔했다.
  • 박기성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손지현 쪽으로 다가오더니 굳은 얼굴로 몰아붙였다.
  • “임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