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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날 알아본 건가?

  • 손지현이 뉴욕에서 돌아왔을 땐 이미 보름 후였다. 휴대폰 해외 로밍 서비스를 줄곧 켜고 있었지만 보름 동안 박우재가 보낸 메시지는 단 두 통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뉴욕에 간 날과 돌아오는 날 안전에 조심하라는 문자였다.
  • 손지현은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 박우재가 바람 피우기 전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성 장애가 있으니까. 하지만 박우재는 이젠 몸도 마음도 전부 그녀에게서 떠났다.
  • 그녀는 저녁에 박우재가 돌아온 후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몽땅 꺼낼 계획이었다.
  • 손지현이 회사에 거의 도착할 무렵 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한 협력사가 스위스에서 왔는데 그 회사 대표가 로망슈어만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대표 사무실에서 로망슈어를 유일하게 할 줄 아는 통역 직원이 출장 간 바람에 통역팀에서 손지현에게 이 일을 맡겼다.
  • 현재 회사에서 로망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손지현밖에 없어 그녀는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 30분 뒤, 차가 오아시스 클럽 문 앞에 멈춰 섰다.
  • 손지현이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8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이 약속한 협상 시간은 9시였다.
  • 그녀는 재빨리 클럽 안으로 들어가 부장이 준 자료에 따라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과 술을 준비했다.
  • 모든 준비를 마치니 시간은 8시 50분이 다 되어갔다. 손지현은 옷매무시를 다듬은 후에야 문 앞으로 다시 나갔다. 그때 벤츠 두 대가 클럽 문 앞에 나란히 멈춰 섰다.
  • 앞 벤츠 차 문이 열리면서 양복 차림의 남자 몇몇이 내렸고 하나같이 비주얼이 뛰어났다.
  • 미리 자료를 본 덕에 손지현은 그들이 바로 스위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걸 알아챘다.
  • 그녀는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고 로망슈어로 익숙하게 상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뒤차를 힐끔거렸다.
  • 회사에 부대표가 여러 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성격이 별로였다. 그중 한 여대표는 매번 나갈 때마다 남자 통역을 데리고 나갔다. 손지현은 혹시라도 그녀와 마주칠까 걱정되었다.
  • 곧이어 뒤차의 차 문이 열렸고 훤칠한 키에 진지한 표정의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차의 우측으로 가서 차 문을 열었다.
  • 손지현은 왠지 모르게 이 비서가 조금 낯이 익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부대표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갔다. 그때 늘씬한 몸매의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 남자는 키가 훤칠했고 그레이 양복은 그의 넓은 어깨를 더욱 돋보이게 해줬다. 검은 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 딱 봐도 우아하고 쉽게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 ‘작은삼촌?’
  •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손지현은 믿을 수 없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 고개를 돌리던 남자도 그녀를 보자마자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 호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이튿날, 장 실장은 그에게 자료를 갖다주었다. 자료를 확인하고 나서야 박기성은 손지현이 왜 술집에서 자신을 ‘작은삼촌’이라 불렀는지 알았다.
  • 알고 보니 손지현이 바로 전혀 왕래가 없는 명의뿐인 조카인 박우재의 아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FS 그룹의 통역 담당이었다.
  • 남자의 거리낌 없는 시선에 손지현은 두려움이 밀려와 두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그만 하이힐이 카펫에 걸린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 “대표님, 조심하세요!”
  •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장 실장도 막을 수가 없었고 손지현이 박기성의 품으로 넘어지는 걸 빤히 지켜만 보았다.
  • 박기성과 함께 일한 지 이렇게나 오래됐지만 박기성의 가슴팍에 두 번이나 부딪친 여자는 손지현이 처음이었다.
  • 손지현의 얼굴이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히면서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전해졌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 ‘작은삼촌 냄새야!’
  • “지현 씨, 조심하세요.”
  • 박기성은 다정한 말투로 그녀에게 한마디 하고는 매너 있게 부축했다. 그의 차디찬 손이 손지현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녀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 ‘지현 씨라고 불렀다는 건 날 알아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