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은 목덜미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여 내 손을 쳐다봤고, 그제야 나는 아직도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옷자락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옷으로 몸을 가렸고, 방금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너를 무시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어.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 때문에 난 너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야. 고등학교 때 너보다 더 힘들게 살아온 나도 결국은 버텨냈어. 나는 사람이 돈이 부족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겁한지 잘 알고 있지. 너를 비난 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임연은 울음을 참으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야. 울지마. 그 천만 원은 내가 빌려줄게. 군 복무 시기에 모아 둔 제대비가 좀 있어.”
천만 원은 나한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액수였다. 게다가, 동창의 체면을 고려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속으로 조금 고민이 되었을 뿐, 처음부터 그녀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안 돼, 이건 네가 군대에서 모은 돈인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받아. 게다가, 난 한두 해 사이에 돈을 못 갚아.”
“일단 네 아빠가 치료 받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속으로 괜한 생각을 한 자신을 탓했다. 이렇게 착한 여자인 인연을 오히려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다니!
임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안 돼. 그리고 너한테 마치 내가 돈 때문에 너랑 친해지는 것처럼 비치기 싫어.”
심장병을 앓고 있는 임연의 아빠는 수술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비는 모두 4천만 원 정도 필요했고, 절반은 건강보험에서 청구받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도무지 만들어 낼 수 없었고 아직 천만 원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임연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자니 그녀는 죽어도 싫다고 했다.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 익명으로 그녀의 손에 이 돈을 쥐여줘야 할 판이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을 때, 임연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두 사람은 친해진 이후에 자주 같이 밥을 먹었다. 회사 사람은 이미 익숙한 듯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몰래 말하기도 했다.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무슨 즐거운 일이 있어?”
나는 임연을 훑어보면서 물었다. 요즘 모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임연이 대답했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가 귀국했어. 오늘 저녁 같이 밥 먹기로 했지. 너도 아는 사람이야. 바로 천소미야.”
나는 대충 대답하고 속으로는 기가 찼다.
나는 천소미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나를 꽤 많이 괴롭혔던 여자 양아치였다. 비록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이는 성격 때문에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임연의 작고 부드러운 손은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갑자기 잡았고,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머리마저 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 손을 먼저 잡았다.
그녀는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사실 나는 천소미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임연이 먼저 제안했으니 나는 거절할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왜 나랑 동행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설마 그녀도 나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지 궁금하기만 했다.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윤 대표님을 찾아가서 휴가를 신청했다. 오후에는 나 자신을 최대한 멀끔하게 만들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몄다.
천소미가 한턱 내기로 한 노래방은 공교롭게도 ZY 그룹 계열사였다.
천소미는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만 불러 모았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유학을 떠났고, 외국 사람들의 허세만 따라 배워 술 마시고 파티를 즐기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몸에 딱 달라붙는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늘씬한 여자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임연을 덥석 껴안았다.
“연아, 오랜만이야! 네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어머, 가슴이 더 커졌는데? 우리 주호 오빠는 복 터지게 생겼어.”
말을 마친 그녀는 두 손으로 한껏 과장되게 임연의 가슴을 더듬었고, 깜짝 놀란 임연은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