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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동창회

  •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우리 두 사람은 갑자기 닥친 일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임연은 한참이 지나서야 허둥지둥 나를 밀어냈다.
  • “너,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똑바로 앉아서 얘기해.”
  • 임연은 목덜미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여 내 손을 쳐다봤고, 그제야 나는 아직도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옷자락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옷으로 몸을 가렸고, 방금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 나는 헛기침을 했다.
  •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너를 무시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어.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 때문에 난 너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야. 고등학교 때 너보다 더 힘들게 살아온 나도 결국은 버텨냈어. 나는 사람이 돈이 부족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겁한지 잘 알고 있지. 너를 비난 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임연은 울음을 참으며 물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진짜야. 울지마. 그 천만 원은 내가 빌려줄게. 군 복무 시기에 모아 둔 제대비가 좀 있어.”
  • 천만 원은 나한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액수였다. 게다가, 동창의 체면을 고려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 다만 나는 속으로 조금 고민이 되었을 뿐, 처음부터 그녀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안 돼, 이건 네가 군대에서 모은 돈인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받아. 게다가, 난 한두 해 사이에 돈을 못 갚아.”
  • “일단 네 아빠가 치료 받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자.”
  •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속으로 괜한 생각을 한 자신을 탓했다. 이렇게 착한 여자인 인연을 오히려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다니!
  • 임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 “안 돼. 그리고 너한테 마치 내가 돈 때문에 너랑 친해지는 것처럼 비치기 싫어.”
  • 심장병을 앓고 있는 임연의 아빠는 수술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비는 모두 4천만 원 정도 필요했고, 절반은 건강보험에서 청구받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도무지 만들어 낼 수 없었고 아직 천만 원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 임연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자니 그녀는 죽어도 싫다고 했다.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 익명으로 그녀의 손에 이 돈을 쥐여줘야 할 판이었다.
  • 어느 날 점심을 먹을 때, 임연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 우리 두 사람은 친해진 이후에 자주 같이 밥을 먹었다. 회사 사람은 이미 익숙한 듯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몰래 말하기도 했다.
  •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무슨 즐거운 일이 있어?”
  • 나는 임연을 훑어보면서 물었다. 요즘 모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 임연이 대답했다.
  • “나랑 가장 친한 친구가 귀국했어. 오늘 저녁 같이 밥 먹기로 했지. 너도 아는 사람이야. 바로 천소미야.”
  • 나는 대충 대답하고 속으로는 기가 찼다.
  • 나는 천소미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나를 꽤 많이 괴롭혔던 여자 양아치였다. 비록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이는 성격 때문에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 임연의 작고 부드러운 손은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갑자기 잡았고,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머리마저 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 손을 먼저 잡았다.
  • 그녀는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 “나랑 같이 가자.”
  • 사실 나는 천소미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임연이 먼저 제안했으니 나는 거절할 생각조차 없었다.
  • 하지만 나는 그녀가 왜 나랑 동행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설마 그녀도 나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지 궁금하기만 했다.
  •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윤 대표님을 찾아가서 휴가를 신청했다. 오후에는 나 자신을 최대한 멀끔하게 만들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몄다.
  • 천소미가 한턱 내기로 한 노래방은 공교롭게도 ZY 그룹 계열사였다.
  • 천소미는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만 불러 모았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유학을 떠났고, 외국 사람들의 허세만 따라 배워 술 마시고 파티를 즐기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몸에 딱 달라붙는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늘씬한 여자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임연을 덥석 껴안았다.
  • “연아, 오랜만이야! 네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어머, 가슴이 더 커졌는데? 우리 주호 오빠는 복 터지게 생겼어.”
  • 말을 마친 그녀는 두 손으로 한껏 과장되게 임연의 가슴을 더듬었고, 깜짝 놀란 임연은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임연은 가슴을 가린 채 화가 난 척 천소미를 때렸다.
  • “이 계집애야, 헛소리 그만해. 귀국을 환영한다. 이건 내가 너를 주려고 준비한 선물이야.”
  • 선물을 건네받은 천소미는 반가운 표정으로 임연을 놓아주었다. 임연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고, 그제야 나는 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한창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향해 누구냐고 물었다.
  • 나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대신 착잡한 얼굴을 한 진주호를 한 눈에 발견했다. 그 역시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내가 여기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 분명했다.
  • 나는 마침내 임연이 나를 이곳에 데려온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진주호가 두려운 것이다.
  • 진주호는 임연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임연은 그를 무시했다.
  • 어차피 현장에 있는 사람을 거의 모르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혼자 가장자리를 찾아 앉았고, 한동안 조용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릴 계획이었다.
  • 몇 년 만에 만난 천소미와 임연은 수다를 이어갔다.
  • “나는 지금 광고회사를 직접 차릴 예정이야. 우리는 이미 ZY 그룹의 프로젝트를 따내게 되었지. 연아, 내 광고회사는 곧 설립되니까 때가 되면 나를 도와줘. 더는 우혁 그 변태 밑에서 일하지 마.”
  • “와, 너무 부럽다. 우리도 ZY 그룹에 제안을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지. 소미야, 넌 능력이 있으니까 꼭 성공할 거야.”
  • “나도 운이 좋았어. 만약 ZY 그룹의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했다면 투자자는 투자를 취소할 수도 있었어. 어떻게 보면 ZY 그룹의 체면을 봐준 거지.”
  • 오랫동안 수색정찰병으로 군 복무해온 나는 감각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예민했다.
  • 제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비록 아무한테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끈질기게 나를 쳐다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의 주인은 바로 진주호였다. 곧이어, 또 다른 눈길이 나를 향했고, 고개를 들자 입을 삐죽거리는 천소미를 발견했다. 그녀는 임연을 향해 물었다.
  • “네가 데려온 사람은 누구야? 꽤 잘생기긴 했는데 어떻게 다른 남자와 동행할 수 있어?”
  • 임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직장 동료야. 오늘 저녁에 초대한 사람은 T 시티 고등학교 출신 아니야? 난 다들 동창이라고 생각해서 같이 가자고 불렀지.”
  • “그렇다고 해서 그를 부르면 안 되지. 네가 진주호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거랑 뭐가 달라? 너랑 진주호가 다투었다고 전해 듣긴 했어. 연인들이 티격태격하는 건 정상이니까 함부로 성질 부리지 마.”
  • “소미야, 그만해. 이건 네가 전혀 모르는 일이야. 나는 진주호랑 사귈 수 없어. 게다가, 장우는 내 절친이고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
  • 그녀의 말을 듣자 나는 속으로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진주호를 흘끗 쳐다봤고, 그 역시 이 말을 듣고 나서 홧김에 얼굴마저 새파래졌다. 그는 있는 힘껏 컵을 움켜쥐면서 당장이라도 나한테 달려들 기세였다.
  • 나는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를 향해 눈썹을 까닥이면서 죽고 싶으면 덤비라는 눈짓을 보냈다. 진주호는 지난번에 나한테 손목을 잡혔던 비참한 모습이 떠올랐는지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 천소미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 “난 믿을 수 없어. 저 자식이 빈틈을 노려 접근한 게 분명해. 가서 한번 만나보지.”
  • 말을 마친 천소미는 술잔을 들고 핫팬츠 차림에 늘씬한 두 다리로 요염하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 각자 즐기던 사람은 하필이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천소미가 술잔을 들고 나에게 다가가자, 모두의 시선은 하나같이 나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