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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경멸

  • “왜? T 시티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원수가 생겼어? 재밌네, 아저씨가 해결해 줄까?”
  • 나는 웃으며 말했다.
  • “큰일도 아닌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한 아저씨는 제가 부탁드린 임연의 일만 해결해 주시면 돼요. 진짜 고마워요. 다음에 T 시티에 오시면 꼭 식사 한 번 대접해 드릴게요. 아 참,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ZY 그룹의 그 어떤 계열사도 천소미라는 사람과 손을 잡지 말라고 마케팅 부서에 알려주세요.”
  • 이건 내가 뒤끝이 긴 게 아니라 한다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 할 수 없는 일은 절대로 입 밖에 꺼내 겁을 주지 않는다. 이건 다 군대에서 생긴 버릇이다.
  • 한훈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 “너 이 자식, 알았어. 난 여기 덴마크의 일만 처리하고 바로 귀국할 거야. 오랜 시간 못 보니까 보고 싶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전화해. T 시티에서 그 누구도 널 괴롭힐 수 없다는 걸 기억해. 널 건드리는 건 곧 ZY 그룹을 건드리는 거야.”
  • 나는 진심으로 한훈한테 고마움을 전했다.
  • “고마워요, 한 아저씨.”
  • 한훈은 나의 부모님의 재산을 전부 나한테 넘겨주었다. 만약 한훈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무 쓸모 없는 찌질이에 진주호 걔네들의 비웃음이나 당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 병원으로 가는 길, 임연의 눈시울은 시종 붉어있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그녀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왠지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너 먼저 들어가 있어. 나 주차하고 갈게.”
  • 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문을 열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차 문을 잡고 나한테 말했다.
  • “장우야, 아니면 너 먼저 돌아가.”
  • 나는 미간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 “대체 무슨 일이야?”
  • 임연은 곧바로 뒤돌아 가버렸다.
  • “아니야, 앞으로 내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무언가가 나의 가슴을 쿡 찌른 듯 왠지 모를 아픔이 밀려왔다.
  • 나는 다급히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임연을 쫓아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 “진주호지? 나 다 알아. 이 일 진주호가 꾸민 일 맞지?”
  • 임연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나의 눈을 피하며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다.
  • “이거 놔, 나...”
  • 그녀는 나의 손을 뿌리치고 진료동으로 향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자 임연은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쳐다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 “따라오지 마, 장우. 나 진짜 다른 방법이 없어.”
  •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심으로 말했다.
  • “고작 천만 원이잖아, 나한테 있어. 만약 이번에 진주호 말대로 한다면 나중에는 더 심한 요구를 할게 분명해. 진주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
  •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던 임연은 나의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끈이 끊어진 진주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 그녀와 나는 진료동 문 앞에 서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모두 우리를 쳐다보곤 하였다.
  • 임연은 그저 연신 고개를 젓기만 하였다.
  • “돈이 문제가 아니라 만약 내가 거절하면 T 시티의 그 어떤 병원도 아버지를 치료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럼 어떡해. 장우야, 우린 걔를 이길 수 없어.”
  • 씨X,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나 음흉할 수가 있지?
  • 우리한테 복수를 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런 짓까지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이게 정녕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 “너의 아버지 목숨까지 걸고 위협을 하는데 나중에는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그 자식 조건이 뭔데?”
  • 임연은 울먹이며 말했다.
  • “아까 내가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전화가 왔어. 나보고 여자친구가 돼 달라고...”
  • “걔 다른 여자가 있잖아. 여자친구가 돼 달라는 거야 아니면 내연녀를 하란 소리야?”
  • 나는 순간 울컥하여 큰소리로 말했다. 주변이 삽시에 조용해졌고 임연은 난처한 듯 애써 나를 피하려 하였다.
  • “그게 뭐가 다른데? 내 일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 그녀의 말에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나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 “미안해. 난...”
  • 그녀도 머리를 저으며 나한테 사과했다. 그러고는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이내 병실로 달려갔다.
  • 그녀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고 마음속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편으로 나를 믿어주지 않는 임연에게 화가 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너무나도 걱정되었다.
  • 하지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진주호가 임연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고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그녀를 쫓아가려던 그때 핸드폰이 울려 꺼내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 ZY 그룹의 사람만 나를 찾을 줄 알았는데 전화를 받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장우, 네가 한 짓이지?”
  • “당신 누구야? 할 얘기 있으면 얼른 해.”
  • 그녀의 말투에 단번에 ZY 그룹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녀도 언짢다는 듯 되물었다.
  • “내가 누군지 몰라?”
  • 그녀가 말했다.
  •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왜냐하면 지금은 도저히 낯선 사람과 입씨름을 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한훈이 전화를 걸어왔다.
  • “도련님, 대체 무슨 일이야? 임연이 병원 문 앞에서 울고 있다면서? 내가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걔 아버지를 입원시켜줄게.”
  • “잠시만요.”
  • 나는 대답했다.
  • “아직은 그러지 말아 주세요.”
  • 한훈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 “왜? 임연한테 무슨 문제라고 있어?”
  • “그런 건 아니고요. 한 아저씨, 저희 잠시만 기다려봐요. 진주호가 대체 병원에 어디까지 손을 써놨는지 확인한 다음에 한 번에 해결하려고요!”
  • 나중에 임연의 아버지가 이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만약 진주호가 부린 수작을 말끔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귀찮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될 게 뻔했다.
  • 게다가 진주호와 같은 나쁜 놈에게 강한 타격을 주지 않는 이상 영원히 두려움을 모를 것이고 파리처럼 사람을 귀찮게 할 것이다.
  • 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고 머리가 질끈질끈 아파졌다. 절망에 빠진 임연의 모습만 생각하면 말 못 할 초조함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진주호를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 “주 선생님, 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테니까 저한테 며칠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안 될까요?”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조용한 복도에 울며 애원하는 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다급히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임연이 눈물을 닦으며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낀 한 중년 의사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 “저희 병원에도 규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당신 아버님이 입원한지 20일이나 되었으니까 이젠 퇴원할 때도 됐어요.”
  • “하지만 지금 퇴원한다면 무조건 위험한 상황이 생길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 제발 선심 좀 베푸시어 며칠만 더 시간을 주세요.”
  • 나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벽 뒤에 숨어서 몰래 엿들었다.
  • 그때 한훈의 말이 떠올랐다. 공립 병원에서 일개 의사가 절대로 이러한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한다. 주 선생이라는 의사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럼 전 일이 있어서 이만.”
  • “당신, 당신 계속 이러면 신고할 거예요!”
  • 임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소리에 주 선생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섬뜩한 눈빛으로 임연을 쳐다보았다.
  • “말릴 생각 없으니까 가서 신고해요.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군요. 어쩔 수 없죠. 가서 한 번 부딪혀보는 것도 나쁠 것 없겠네요.”
  • 주 선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연 뒤의 병실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임강이었다.
  • “누나, 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작정이야? 나도 진작에 신고해봤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병원의 규정이 그렇다고 하니까 의사들도 규정에 따라 합리하게 처리했을 뿐이야.”
  • 임연은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 “그럴 리가 없어. 그럼 옆 침대 어르신은 3개월이나 입원을 하셨는데도 왜 계속 여기에 있어?”
  • “왜 그런지 몰라? 그 집은 인맥도 있고 돈도 있잖아. 그런데 우리는 뭐가 있어? 난 정말 누나가 이해가 안 돼. 주호 형님이 누나한테 얼마나 잘해. 게다가 돈도 있고 능력도 있고 사람도 참 좋은데 왜 계속 거절해? 누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 나는 너무 화가 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임강에게 주먹 한 대를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진주호가 너한테 뭘 얼마나 잘해줬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고작 게임 아이템 때문에 누나를 팔아? 난 너의 친누나라고!”
  • “나도 나만을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잖아. 아버지가 지금 병원에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면 진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누나 생각만 해서는 안 되지.”
  • “내가 내 생각만 한다고? 임강, 너도 이제 20살이 넘었어. 왜 집안의 모든 책임을 나 혼자서 짊어져야만 해?”
  • “가족끼리 뭘 그렇게 확실하게 따지려고 그래? 암튼 누나가 알아서 해. 만약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다 누나 탓이야! 아까 주호 형님한테 전화했으니까 이따가 올 거야. 누나가 아버지 살려내!”
  •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임강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군요. 저희 누나가 지금 당신한테 홀딱 빠진 거 알아요? 누나가 이렇게 변한 건 다 당신 탓이에요.”
  • 그때 주 선생이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 “병원에서 이렇게 떠들면 안 돼요. 목소리 좀 낮춰요. 임연 씨, 아버님이 지금까지 병실에 계실 수 있는 건 다 진 사장님의 체면을 봐서 그런 거예요. 오늘 무조건 퇴원해야 돼요. 아니면 이 복도에서 주무실 수밖에 없어요.”
  • “당신 거기 서요!”
  • 내가 부르자 주 선생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나의 옷차림을 보니 돈이 많아 보이지 않았는지 안경을 밀어올리며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 “무슨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