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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환골탈태

  • 나는 캐리어에 잔뜩 담긴 계약서와 부동산 소유권 증명서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동안 고모가 빼돌린 돈은 우리 부모님이 나한테 물려주신 재산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 나는 군 생활을 꼬박 5년 동안 이어갔고, 의무병에서 사관까지 승진했다. 전역하는 날, 거울에 비친 180도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믿기지 않았다.
  • 나는 고모가 사는 별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밖에서 아파트 한 채를 얻었고,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평생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한훈은 나한테 자기 회사에 다니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 만약 내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 나는 사장님으로 될 게 뻔했다. 그러나 좀 안 좋게 얘기해서 오랫동안 군 복무를 한 나는 회사 경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 나는 스스로 작은 광고회사를 찾아 경비원으로 취직했고, 회사가 작을수록 체계가 단순하므로 회사 운영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먼저 경영을 배워야 했다.
  • “너 이 자식 생각이 꽤 있구나. 잘 됐어, 마침 ZY 그룹에서도 광고 사업을 발전시키려 하는데, 앞으로 소규모 광고회사를 많이 인수할 거야. 먼저 가서 업무를 좀 익혀.”
  • ZY 그룹은 우리 아버지 장준과 어머니 기은서의 알파벳을 각각 하나씩 따서 탄생한 회사로, 몇 년 사이에 T 시티에서 가장 큰 그룹으로 성장했고 나도 자연스럽게 T 시티 최고 부자가 되었다.
  • 하지만 남들은 나와 이 회사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몰랐고, 고모조차 눈치 못 챘다. 내가 취직한 광고회사는 이 사실에 대해 더욱 알 리가 없었다.
  • 광고회사는 내가 군인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는 점에 흔쾌히 나를 받아들였고, 나는 회사 근처에서 시설이 꽤 나쁘지 않은 작은 아파트를 얻었다.
  • 하지만 이사한 다음 날 임연을 만날 줄은 몰랐다.
  • 그때, 마침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맞은 편 여자 이웃이 서서 전화를 받는 것을 보았다.
  • “안녕하세요, ZY 그룹 안 매니저님이시죠? 지난번에 얘기했던 광고... 네? 광고 안 하신다고요? 왜요?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 되나요? 또 다른 기획안이 있으니 수정도 가능합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ZY 그룹의 이름을 듣고 나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뒤돌아보니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감정을 드러내는 커다란 눈망울,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5년 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성숙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임연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 나는 만감이 교차하여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재의 나로 다시 태어난 이유는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저녁에 나는 ZY 그룹 마케팅 부서 안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안 매니저는 입이 거칠었고, 내가 임연에 관해 물어보자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
  • “작은 광고회사에서 제안한 기획안은 차마 봐줄 수가 없지. 그 임연이라는 디자이너도 국내 엉터리 대학 디자인학과를 나오고는 우리한테 얼마나 허풍을 떨어 대는지. 고작 임연이 만든 그런 기획안으로 감히 나한테 제안하다니. 컬러 매칭이며 디자인이며 어찌나 촌스러운지 말도 마. 그나마 얼굴이라도 반반하니 다행이지, 머리는 얼마나 멍청한지...”
  • 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사실 임연을 향한 마음과 증오는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임연은 화가 잔뜩 난 사장님한테 사무실로 불려갔고, 나는 호기심에 일부러 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몇 마디 엿들었다.
  • “뭐라고?! 그렇게 큰 ZY 그룹과의 협력 사업을 날리다니? 이런 젠장, 밥값도 못해? 4억 원짜리 대형 프로젝트라고! 꺼져, 당장 꺼져!”
  • 사장님이 노발대발하는데 이유가 있었다. 4억 원은 작은 광고회사의 1년간 지출 금액과 맞먹는 액수였다.
  • “윤 대표님, 절 자르지 말아주세요. 집에 돈 써야 할 곳이 있어요. 제 남동생이 사람을 때려 다치게 했는데 우리가 배상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일자리를 잃을 수 없어요.”
  • “됐어, 그만해. 지겨워 죽겠어. 또 이런 변명이라니.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오늘 저녁 진 사장님과의 식사 장소에 나랑 같이 가. 술자리에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섹시하게 입고 나와. 진 사장님과의 광고 사업은 반드시 따내야 한다!”
  • “하지만 윤 대표님, 저랑 진주호는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요!”
  • “그런데 뭐? 내 알 바 아니지. 내가 원하는 건 사업이고 오더이며 현찰이야! 똑똑히 들어, 만약 네가 이 사업을 따내면 보너스로 1천만 원을 주지. 하지만 날려 보냈다? 넌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
  • 사무실 안이 잠잠해지자 나는 얼른 도망치려 했지만, 한발이 늦어버렸고, 문을 열고 나오던 임연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 “당신...”
  • 나는 가슴이 뜨끔했고 임연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쭈뼛쭈뼛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혹시라도 고등학교 사건 때문에 나한테 사과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 그러나 임연은 나를 대충 훑어보기만 하더니 말을 걸었다.
  • “당신 새로 입사했어요? 앞으로는 몰래 엿듣지 마세요. 윤 대표님한테 들키면 당신은 해고당할 거예요.”
  •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 못 하는 그녀한테서 나는 사과를 받기를 바라다니!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자리를 떴고, 뒤에서 중얼거리는 임연의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 “저 사람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본 적 있었나? 어쩜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지?”
  •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빼먹은 상황으로 흘러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오전에 나는 회사 프런트 옆에 앉아 외부인의 회사 출입을 막으면 그만이고 업무는 한가롭기만 했다. 단지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점은 바로 이 일자리는 운영과 거리가 멀었으며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는 차라리 운전기사로 지원했을 것이다.
  • 퇴근할 무렵, 윤 대표님은 나보고 잠시 대기하라고 했다.
  • “장우야, 운전할 줄 알아?”
  • “그럼요, 대표님. 저는 군대에서 면허를 땄습니다.”
  • 대답하던 찰나, 나는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임연을 발견했다. 그녀는 깊이 파인 노란색 망사 드레스로 갈아입었고 하얀 가슴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게다가, 옅은 화장을 하고 머리를 풀어 헤친 그녀는 우리의 대화를 듣자마자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모습은 고등학교 때만큼 아름다웠다.
  • “잘됐네. 저녁에 나와 함께 식사 장소로 가지. 나는 술을 마셔야 하니까 네가 운전해.”
  • 나의 모든 신경은 임연에게 쏠렸고, 윤 대표님이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임연과 대표님은 나의 무례한 행동을 눈치챈 게 분명했고 임연은 얼굴을 붉힌 채 드러난 가슴을 손으로 가렸다. 윤 대표님은 조소를 머금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그만 봐, 네 놈은 평생 이런 여복을 누릴 수 없을 거야. 그나저나 너 운전은 잘해? 내가 새로 뽑은 랜드로버를 긁으면 큰일 나.”
  • 그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다른 여자면 몰라도 임연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힘껏 고개를 저으며 임연을 향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전부 털어냈다.
  • 윤 대표님이 약속을 잡은 장소는 JC 가든이었다. 이는 T 시티에서 유명하고 오래된 호텔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곳에서 만든 게장이 들어간 두부 요리를 제일 좋아했다. 몇 년 전에 경영 부진으로 파산 위기에 직면할 뻔했지만, 나는 개인 명의로 호텔을 인수했다. 한훈은 나 대신 관리할 호텔 매니저를 추천했고, 현재는 완벽하게 변신한 모습으로 T 시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호텔로 급부상했다.
  • 이번에 윤 대표님이 저녁 식사 장소에 진주호를 초대했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진주호가 임연을 초대한 것 같았다. 윤 대표님이 말하길, 진주호는 임연을 계속 쫓아다녔고, 그녀도 이제 곧 그한테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