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호에 관해 얘기하자면, 나는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귀에 익다고 생각했고 본인을 보자마자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 사람도 내 고등학교 동창이었으며 또한 재벌 2세였다. 그는 고등학교 우두머리로 반에서도 대장이었으며 고등학교 때부터 임연을 좋아해서 그녀를 쫓아다니곤 했었다.
“넌 그 누구 아니야?”
진주호는 임연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나를 향해 말했다.
임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나는 속으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임연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진주호가 나를 기억하다니!
“연아, 기억 안 나? 이 사람이 바로 고등학교 때 너희 집까지 미행하는 것도 모자라 길에서 너한테 추파를 던진 남자였잖아. 나중에 내가 유호에게 그를 화장실에 가두고 때리라고 했지. 너 정말 기억 안 나? 참, 그 변기 물을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임연의 동공은 갑자기 커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장우였어?!”
등 뒤로 감춘 내 주먹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호한테 나를 때리라고 했던 사람이 그였다니!
윤 대표님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다들 서로 아는 사이였어요? 차라리 잘됐네요! 진 사장님, 이게 바로 우리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협력 건은 틀림없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장우야, 가서 음식을 좀 시켜, 내 이름으로 외상을 하면 돼.”
군 생활을 통해 바뀌게 된 것은 내 몸매뿐만 아니라 성격도 있었다. 나는 더는 예전의 소심하고 겁이 많은 충동적인 장우가 아니었다.
나 또한 진주호랑 따질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내 신분으로 그와 따지게 되면 도리어 그를 추켜세우는 꼴이 된다.
진주호는 오히려 나를 보내지 않으려 했고, 임연을 흘끗 쳐다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딜 가, 오랜만에 동창끼리 만났는데 같이 앉도록 하지.”
나는 이 자식이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우리 둘은 피맺힌 원한으로 이어진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시비를 걸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그는 오히려 몇 번이고 나를 도발했다.
“됐어, 일이나 봐.”
“어쭈? 윤 대표님, 당신 운전기사는 내 체면을 봐주지 않는데요? 고작 운전기사 따위가 콧대는 높네요. 우리 이번 협력 건은...”
나는 피식 웃었다.
“진주호, 네가 한편으로 임연을 좋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자가 술 시중을 드는 걸 좋아할 줄은 몰랐네. 취향이 독특하군. 미안하지만 나한텐 그런 취미가 없어. 나는 이성 연애만 지향하는 사람이지. 먼저 간다.”
룸에서 대기하던 종업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진주호의 얼굴은 차마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제일 난감해하는 사람은 바로 윤 대표님이었다. 그는 나와 진주호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감히 나를 붙잡지 못했지만, 진주호가 그런 말을 내뱉었으니 나를 내보내지도 못했다.
차라리 본성을 드러낸 진주호는 더는 숨기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다리를 꼰 채 냉소를 지었다.
“고작 운전기사 주제에 나한테 허세 부리긴, 내가 오늘 너한테 자리에 앉으라면 앉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어. 너 이 자식,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마. 고등학교 때부터 난 네 놈이 거슬렸어. 고작 너 따위가 감히 내 여자한테 치근덕거려? 간이 부었구먼! 잘 들어, T 시티에서 내 말 한마디면 넌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하고 밥이나 동냥하러 다닐 거야!”
말을 마친 그는 임연의 허리를 한 손을 주물럭거렸다. 옆에 서 있던 여자 종업원들은 보다 못해 고개를 숙였고 임연의 얼굴은 볼썽사나울 정도로 빨개졌지만, 차마 그를 밀어내진 못했다. 그의 팔은 그녀를 단단히 옭아맨 채 마음대로 만지고 있었다.
윤 대표님은 서둘러 말했다.
“진 사장님, 화를 푸세요. 지금 당장 해고할게요. 그는 더는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죠.”
“누가 자르라고 했어요? 그를 회사에 남기고 앞으로 항상 그와 동행하세요. 장우, 똑똑히 보라고. 임연은 내 여자야. 만약 내 물건에 손을 댄다면 고등학교 화장실에서 얻어맞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주지.”
나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엎으면서 이 자식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빨리 행동을 취한 사람은 임연이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바닥은 서슴없이 진주호의 뺨을 내리쳤다. 진주호는 넋이 나간 채 뺨을 감싸고 임연을 바라보았으며,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테이블 위에 있던 술잔을 들어 진주호의 얼굴을 향해서 뿌렸다.
“정신 차려, 남을 너무 업신여기는 거 아니야?”
그녀의 손찌검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어안이 벙벙했다. 임연이 진주호를 때릴 줄은 아무도 몰랐고, 반면 진주호의 성질은 더럽기만 했다.
진주호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윤 대표님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임연은 옷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올게.”
진주호는 서둘러 쫓아갔다.
“연아, 화내지 마...”
두 사람은 연이어 룸을 나섰고, 나와 윤 대표님만 남아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사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보면 임연은 나 대신 그의 뺨을 때렸다. 지금은 그녀는 감히 진실을 말할 용기조차 없어 결국 내가 억울하게 얻어맞은 상황까지 만들었던 임연이 아니었다.
“너, 무슨 낯으로 웃어? 이젠 망했다. 이제 우린 다 죽게 생겼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하필 JE 그룹 진 도련님을 건드리다니, 이제 우리 모두 끝장이야!”
나는 실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애써 미소를 참은 뒤 그를 다독였다.
“윤 대표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나가 볼게요.”
임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된 나는 문을 열고 따라나섰다. 나는 JC 가든에 자주 다니는 편은 아니었고, 종업원에게 확인하고 나서야 화장실을 찾았다. 결국, 화장실 입구에서 임연의 손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는 진주호를 발견했다.
“벌써 몇 년째인데 아직도 그를 잊지 못했어? 저 가난뱅이가 뭐가 좋은데?”
“너한테 이미 얘기했잖아. 그때는 널 속인 거라고! 사실 그날 밤 나를 구해준 그는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지. 왜 날 안 믿어?”
“당연히 믿을 수 없지.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왜 나랑 만나주지 않는 거야?”
“진주호, 너 미쳤구나. 너랑 만나주지 않는 이유를 나한테 물어보다니! 그렇게 많은 여자랑 시시덕거리면서 그 여자들을 떼어내기도 전에 나한테 추파를 던져? 난 뭐야? 이거 놔!”
진주호는 임연의 손목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이 천한 년아, 인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 너한테 돈 보낼 때 말하지 그래?"
“그건 네가 빌려준 거잖아. 난 돈을 갚는다고 얘기했어! 진주호, 네가 날 이렇게 볼 줄은 몰랐네, 내가 돈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고 생각해? 이거 놔! 더는 나를 귀찮게 하지 마.”
진주호는 화가 나서 상욕을 하며 손을 들어 임연을 때리려 했고 깜짝 놀란 임연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뺨을 맞을 거로 생각했던 임연은 얼굴에 아무 감각이 없자, 잠시 후 눈을 떴고 허공에 들어 올린 진주호의 손목을 잡은 나를 발견했다.
진주호는 나와 키가 비슷했고 체구도 엇비슷해 보였지만, 군대에 다녀왔던 사람은 내공이 탄탄했다. 비록 겉모습은 전혀 티가 안 나더라도 내면은 힘이 넘쳐났다. 진주호처럼 겉으로만 튼튼해 보이는 것과 달리 힘으로 따지면 그는 전혀 내 상대가 아니다.
나는 그에게 고통을 안겨줄 만큼 그의 손목을 비틀었고, 콩알만 한 땀방울이 그의 이마에 맺히기 시작했지만, 그는 차마 애원할 수 없었다. JE 그룹 도련님이 고작 경비원에게 제압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그의 체면은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고, 그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 굴복할 수 없었다.
“진주호, 다들 동창이잖아. 손찌검하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진주호는 나를 욕하려 했지만, 고통에 이만 악물고 있었다. 그는 입만 열면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