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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조 원장님!

  • 예상치 못한 나의 터치에 진주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고는 나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 “그 손 당장 치워!”
  •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효연에게 물었다.
  • “진 주임님, 이 병원은 공립 병원이지 주임님의 병원이 아니에요. 계속 그렇게 안 된다고만 하시면 안 되죠. 얼굴이 못생긴 건 그렇다 쳐도 마음까지 이렇게 독해서야 되겠어요? 설마 이 병원에 주임님을 가르칠 수 있는 윗사람이 없는 건 아니죠? 전 주임님의 윗사람하고 얘기를 해야겠어요.”
  • “뭐라고요?”
  • 진효연은 하마터면 나한테 죽일 듯이 달려들 뻔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 “윗사람요? 내가 바로 심장외과 입원부의 윗사람이에요. 입원에 관한 일은 나한테 권한이 있으니까 내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돼요.”
  • 나는 웃으며 말했다.
  • “네,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수작 그만 부려요.”
  • 나는 말했다.
  • “이 일의 주모자가 당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젠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 다들 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였다. 우리가 병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한훈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 우리의 지금 상황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 멀리서 흰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다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 아직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진효연은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원장님이 여긴 왜 오셨지? 설마 이 자식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 바보 같은 진주호는 이런 상황에서도 꿈을 꾸고 있는지 큰소리를 치며 말했다.
  • “원장님이 이런 일을 신경 쓸 리가 있겠어요. 게다가 큰 이모의 신분이면 입원부에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죠. 그러니까 원장님도 참견하시지 않을 거예요.”
  • 진효연은 머리를 끄덕이었지만 여전히 걱정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 “너 잘 알아봤지? 이 자식 확실히 믿는 구석이 없지?”
  • 그들은 매우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하지만 군대의 수색중대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있던 나는 남들이 들리지 않는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진주호는 이렇게 말했다.
  • “걱정 말아요. 쟨 그냥 돈 없고 멍청하고 힘만 센 바보일 뿐이에요.”
  • 진효연은 그제서야 한시름을 놓은 듯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조 원장을 향해 웃으며 걸어갔다. 하지만 그 웃음은 10초도 채 안 돼 이내 굳어버렸다.
  • 원장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 “진효연 주임, 주원식 선생, 당신들 해고예요!”
  • 솔직히 얘기해서 나도 순간 멍해졌다.
  • 한훈이 나보고 아무런 걱정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난 그저 주임 선생을 찾아가 잘 부탁하여 병실 침대 하나를 남겨줄 거라고만 생각했다.
  •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가 발생했다. 그가 찾은 사람은 원장이었다.
  • 하긴 한훈같이 인맥이 넓은 사람이라면 원장을 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하지만 원장이 나타났을 때 나는 기껏해야 그들을 몇 마디 꾸짖거나 혹은 한두 마디 좋은 얘기로 새로운 병실 침대 하나를 마련해 줄줄 알았다.
  • 원장이 그 두 의사를 바로 해고시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 진효연과 주원식의 얼굴색이 말이 아니게 변해버렸다. 게다가 순간 멍해져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람이 큰 충격을 받게 되면 바로 이들처럼 현실을 믿지 못하게 된다.
  • 진주호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너무 놀라 멍해있었다. 현장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 원장이 우리를 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란 걸 진주호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난 그저 가난한 찌질이일 뿐인데 이렇게나 든든한 빽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 하지만 눈치 빠른 임연은 의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뭔가를 알아챈 듯하였다. 제 발 저려난 나는 얼른 해명하였다.
  •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런 거겠지.”
  • 임연은 비록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원장이 나 때문에 직접 발걸음을 했을 거라고는 믿지 못했다. 어찌 됐든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엄청 가난한 집 자식이었기에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졌다 해도 원장 같은 거물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는 진효연은 이렇게 되물었다.
  • “원장님, 저희도 병원의 정직원인데 저희를 해고시키려면 정당한 이유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원장님의 아들이 심장외과 주임직을 맡길 바라신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용이의 실력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공적인 일로 개인 분풀이를 해서는 안 되죠!”
  • 진효연이 확실히 재주가 있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머리를 한 번 휙 굴리더니 바로 다른 주제로 돌려 조 원장이 공적인 일로 개인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 하지만 조 원장은 흔들리기는커녕 화도 내지 않고 오히려 웃고 있었다. 언제까지 잘난 척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 기회를 잡은 주원식은 얼른 말했다.
  • “맞아요, 맞아요. 조 원장님, 저희 다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저희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처리했다고요? 몰래 환자한테서 돈을 받는 것도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한 건가요? 주 선생, 일주일 전에 곽천수 환자 가족한테서 뒷돈 100만 원을 받았죠? 이것도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한 건가요?”
  •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주원식은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다가 벽을 붙잡고 간신히 버텼다.
  • 진효연은 고개를 돌려 진주호에게 욕을 한 마디 했다.
  • “이 멍청한 놈!”
  • 진효연이 욕을 채 하기도 전에 조 원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진효연 주임, 심장 스텐트 공급업자하고 계속 몰래 거래하면서 중간에서 수수료를 떼어먹었죠? 이것도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한 건가요?”
  • “헛소리하지 말아요.”
  • 진효연은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진짜로 나 때문에 여길 온 게 아닌가? 이젠 나도 어찌 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이 못된 짓을 한 건 틀림없었다. 오늘 조 원장에게 덜미를 잡힌 것도 아마 우연일 수도 있다.
  •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진효연은 머리를 휙 굴리더니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 “이제야 뭔지 알겠네요. 누가 뒷돈을 받고 누가 중간에서 수수료를 떼어먹었다고 그래요? 원장님 이 사람들과 아는 사이라서 우리한테 대신 화풀이하는 건가요? 이 자식이 아까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길래 뭔가 했더니 원장님 같은 빽이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 “진 주임이야말로 악의적으로 남을 모함하지 말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발뺌할 건가요?”
  • 그녀의 모함에도 조 원장은 흔들리기는커녕 무슨 말을 하든 화도 내질 않았다. 조 원장의 교양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나였더라면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어도 욕 몇 마디는 분명히 했을 것이다.
  • 진효연은 조 원장의 손에 증거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필 진효연과 주원식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임연의 아버지를 병원에서 내쫓으려고 할 때 원장이 이 둘을 해고시킨다고? 어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진효연은 이건 분명히 일부러 파놓은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 “증거가 있으면 어디 한번 꺼내봐요! 조규민 씨,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아요! 계속 이렇게 악의적으로 모함하면 저 당장 죽어버릴 거예요!”
  • 말을 마친 진효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 하지만 조 원장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좌우를 가리키며 물었다.
  • “이 두 사람 누군지 똑똑히 봐요.”
  • 조 원장의 뒤에 서있던 두 사람은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까지 잘난 척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 “아무렇게나 두 사람을 찾아놓고서 증인이라고 우기시려고요? 꿈도 꾸지 말아요. 세상에나, 내가 죽어야지!”
  • 그러자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노트 하나를 꺼내 진효연에게 건네주며 직접 펼쳐보라고 하였다.
  • 펼쳐볼 필요도 없이 그 노트의 앞표지를 보자마자 진효연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 주원식은 다급히 다그쳤다.
  • “진 주임님, 저 사람들 대체 누구예요? 말씀 좀 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