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나의 터치에 진주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고는 나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 당장 치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효연에게 물었다.
“진 주임님, 이 병원은 공립 병원이지 주임님의 병원이 아니에요. 계속 그렇게 안 된다고만 하시면 안 되죠. 얼굴이 못생긴 건 그렇다 쳐도 마음까지 이렇게 독해서야 되겠어요? 설마 이 병원에 주임님을 가르칠 수 있는 윗사람이 없는 건 아니죠? 전 주임님의 윗사람하고 얘기를 해야겠어요.”
“뭐라고요?”
진효연은 하마터면 나한테 죽일 듯이 달려들 뻔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윗사람요? 내가 바로 심장외과 입원부의 윗사람이에요. 입원에 관한 일은 나한테 권한이 있으니까 내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돼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수작 그만 부려요.”
나는 말했다.
“이 일의 주모자가 당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젠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다들 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였다. 우리가 병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한훈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 우리의 지금 상황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 멀리서 흰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다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진효연은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장님이 여긴 왜 오셨지? 설마 이 자식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바보 같은 진주호는 이런 상황에서도 꿈을 꾸고 있는지 큰소리를 치며 말했다.
“원장님이 이런 일을 신경 쓸 리가 있겠어요. 게다가 큰 이모의 신분이면 입원부에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죠. 그러니까 원장님도 참견하시지 않을 거예요.”
진효연은 머리를 끄덕이었지만 여전히 걱정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너 잘 알아봤지? 이 자식 확실히 믿는 구석이 없지?”
그들은 매우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하지만 군대의 수색중대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있던 나는 남들이 들리지 않는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진주호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쟨 그냥 돈 없고 멍청하고 힘만 센 바보일 뿐이에요.”
진효연은 그제서야 한시름을 놓은 듯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조 원장을 향해 웃으며 걸어갔다. 하지만 그 웃음은 10초도 채 안 돼 이내 굳어버렸다.
원장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진효연 주임, 주원식 선생, 당신들 해고예요!”
솔직히 얘기해서 나도 순간 멍해졌다.
한훈이 나보고 아무런 걱정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난 그저 주임 선생을 찾아가 잘 부탁하여 병실 침대 하나를 남겨줄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가 발생했다. 그가 찾은 사람은 원장이었다.
하긴 한훈같이 인맥이 넓은 사람이라면 원장을 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장이 나타났을 때 나는 기껏해야 그들을 몇 마디 꾸짖거나 혹은 한두 마디 좋은 얘기로 새로운 병실 침대 하나를 마련해 줄줄 알았다.
원장이 그 두 의사를 바로 해고시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진효연과 주원식의 얼굴색이 말이 아니게 변해버렸다. 게다가 순간 멍해져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람이 큰 충격을 받게 되면 바로 이들처럼 현실을 믿지 못하게 된다.
진주호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너무 놀라 멍해있었다. 현장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원장이 우리를 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란 걸 진주호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난 그저 가난한 찌질이일 뿐인데 이렇게나 든든한 빽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눈치 빠른 임연은 의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뭔가를 알아챈 듯하였다. 제 발 저려난 나는 얼른 해명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런 거겠지.”
임연은 비록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원장이 나 때문에 직접 발걸음을 했을 거라고는 믿지 못했다. 어찌 됐든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엄청 가난한 집 자식이었기에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졌다 해도 원장 같은 거물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는 진효연은 이렇게 되물었다.
“원장님, 저희도 병원의 정직원인데 저희를 해고시키려면 정당한 이유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원장님의 아들이 심장외과 주임직을 맡길 바라신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용이의 실력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공적인 일로 개인 분풀이를 해서는 안 되죠!”
진효연이 확실히 재주가 있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머리를 한 번 휙 굴리더니 바로 다른 주제로 돌려 조 원장이 공적인 일로 개인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조 원장은 흔들리기는커녕 화도 내지 않고 오히려 웃고 있었다. 언제까지 잘난 척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기회를 잡은 주원식은 얼른 말했다.
“맞아요, 맞아요. 조 원장님, 저희 다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저희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처리했다고요? 몰래 환자한테서 돈을 받는 것도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한 건가요? 주 선생, 일주일 전에 곽천수 환자 가족한테서 뒷돈 100만 원을 받았죠? 이것도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한 건가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주원식은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다가 벽을 붙잡고 간신히 버텼다.
진효연은 고개를 돌려 진주호에게 욕을 한 마디 했다.
“이 멍청한 놈!”
진효연이 욕을 채 하기도 전에 조 원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진효연 주임, 심장 스텐트 공급업자하고 계속 몰래 거래하면서 중간에서 수수료를 떼어먹었죠? 이것도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한 건가요?”
“헛소리하지 말아요.”
진효연은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진짜로 나 때문에 여길 온 게 아닌가? 이젠 나도 어찌 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이 못된 짓을 한 건 틀림없었다. 오늘 조 원장에게 덜미를 잡힌 것도 아마 우연일 수도 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진효연은 머리를 휙 굴리더니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야 뭔지 알겠네요. 누가 뒷돈을 받고 누가 중간에서 수수료를 떼어먹었다고 그래요? 원장님 이 사람들과 아는 사이라서 우리한테 대신 화풀이하는 건가요? 이 자식이 아까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길래 뭔가 했더니 원장님 같은 빽이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진 주임이야말로 악의적으로 남을 모함하지 말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발뺌할 건가요?”
그녀의 모함에도 조 원장은 흔들리기는커녕 무슨 말을 하든 화도 내질 않았다. 조 원장의 교양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나였더라면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어도 욕 몇 마디는 분명히 했을 것이다.
진효연은 조 원장의 손에 증거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필 진효연과 주원식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임연의 아버지를 병원에서 내쫓으려고 할 때 원장이 이 둘을 해고시킨다고? 어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진효연은 이건 분명히 일부러 파놓은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증거가 있으면 어디 한번 꺼내봐요! 조규민 씨,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아요! 계속 이렇게 악의적으로 모함하면 저 당장 죽어버릴 거예요!”
말을 마친 진효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조 원장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좌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두 사람 누군지 똑똑히 봐요.”
조 원장의 뒤에 서있던 두 사람은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까지 잘난 척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아무렇게나 두 사람을 찾아놓고서 증인이라고 우기시려고요? 꿈도 꾸지 말아요. 세상에나, 내가 죽어야지!”
그러자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노트 하나를 꺼내 진효연에게 건네주며 직접 펼쳐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