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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혹시 누구한테 잘못을 저질렀어?

  • 나는 계속 지켜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비록 유호를 미워하지만 난 더 이상 예전의 장우가 아니다.
  • 난 더 이상 남의 괴롭힘을 당하는 약해빠진 애가 아니고 가난 때문에 갖은 굴욕을 당하던 장우가 아니다. 대용이 유호에게 날린 따귀 몇 대가 나의 어릴 적 마지막 어둠까지 싹 씻겨주었다. 이제부터 나 장우의 인생에는 찬란한 앞길만이 있을 것이다!
  • 나는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임연과 함께 노래방을 나섰다. 차를 타고 가려던 그때 핑크색 BMW 한 대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 그때 천소미가 차에서 내리더니 내가 타고 있는 차가 레인지로버인 것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나 좋은 차를 탈 줄은 생각도 못 했나 보다.
  • “또 무슨 일인데? 나 여자는 때리지 않아. 하지만 나의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
  • 천소미는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네가 왜 이렇게 나대는가 했더니 돈이 생겨서 그런 거였구나. 연아, 너 설마 돈 때문에 쟤랑 같이 있는 거야?”
  •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돈이 없을 때는 임연과 만날 자격이 없다고 하더니 돈이 있으니까 이제는 돈 때문에 나를 만난다고 한다. 어찌 됐든 나와 엮이면 다 잘못된 것이고 천한 것이고 고귀한 건 그들이라는 말이다.
  • 천소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차를 타고 가려 하던 그때 임연이 나한테 잠깐 기다려달라고 했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임연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고 있어서 얼굴빛이 새파래졌다.
  • “소미야, 우린 가장 친한 친구잖아.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러면 난 우리의 우정이 여기까지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
  • “너, 고작 쟤 때문에? 쟤 같은 자식 때문에?”
  • “쟤가 뭐 어때서? 쟤는 사람 아니야?”
  • 임연은 천소미의 말을 끊어버렸다.
  • “그래, 맞아. 장우는 돈이 없어. 그리고 저 차도 장우의 차가 아니라 우리 사장님의 차야. 그런데 돈이 없다고 내가 쟤랑 친구를 할 수 없어? 우린 남녀의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그냥 친구일 뿐이야. 사람은 친구를 사귈 때 돈을 보고 사귀지 않아!”
  • 천소미는 다급히 말했다.
  • “난 그 뜻이 아니라 쟤가 널 속일까 봐 그러지...”
  • 임연은 똑부러지게 이렇게 말했다.
  • “돈이 많으면 다 좋은 사람이고 가난하면 다 사기꾼이야? 그럼 우리도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겠네. 왜냐하면 나도... 나도...”
  • 임연은 자신의 집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천소미와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어서 천소미는 아직 상황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임연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머리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 “소미야, 너한테 진짜 실망했어. 장우는 나의 좋은 친구야. 네가 받아들일 수 있으면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으면 더 이상 날 찾아오지 마. 장우야, 가자.”
  • 천소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액셀을 밟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임연이 왜 그들과 같은 상류층 인사들과의 우정을 버리고 나 같은 가난뱅이를 선택했는지 천소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 “아까 그 건달 말이야, 왜 네 말을 들었을까?”
  • 차가 노래방 주차장을 나선 뒤 임연은 백미러로 점점 사라져가는 천소미를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나한테 물었다.
  • “예전에 쟤네 사장을 도와준 적이 있어서 사장이 날 기억해. 걱정 마. 나중에 우리를 찾아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 “무섭지 않아. 네가 옆에 있으면 난 마음이 놓여.”
  • 그 말을 들은 나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긴장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바람에 대답을 하기는커녕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쑥스러워하는 나를 본 임연은 웃음을 참으며 몰래 쳐다보고 있었다.
  • 스무 살이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까지 여자와 단둘이 있어본 적도 없고 아무런 경험이 없는 탓에 자주 웃음거리가 되곤 하였다.
  • 임연을 집에 데려다준 뒤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머릿속에는 임연의 웃는 얼굴만 떠올랐고 가슴에 덮고 있는 이불마저 임연같이 느껴졌다.
  • 그렇게 나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었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벌써 8시 20분이나 되었고 더 늦었다간 지각할 것이 뻔했다. 아마도 임연이 나를 깨우러 온 것 같다.
  • “장우야, 큰일 났어. 나 좀 도와줘.”
  • 문을 열자마자 임연이 울면서 나의 품에 안겼다. 붉어진 눈시울에 잠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달려온 것이다. 가슴 쪽에 하얀색 피부가 드러났고 나시 잠옷의 어깨끈 하나가 옆으로 흘러내렸다.
  • 그녀는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나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이 들어?
  • “무슨 일이야? 내가 있으니까 자세히 얘기해봐.”
  • “의사선생님이 아침에 전화 왔는데 만약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아버지를 퇴원시키겠대. 이제는 병실 침대마저도 복도에 내다 놨어. 아버지 심장이 좋지 않아서 만약 퇴원하면 분명히 버티지 못하실 거야!”
  •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병원비 냈잖아.”
  • “의사선생님이 그러는데 병원의 침대가 부족해서 만약 수술을 하지 않으면 퇴원해야 된대. 이렇게 입원하고 있으면 의료 자원을 점용하는 거라면서. 나 이제 어떡해?”
  • 그녀의 말에 가슴이 아파졌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었다.
  • “이 일 너무 이상해. 우리 먼저 병원에 가보자. 넌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 임연은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나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어서 나의 말을 듣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 이를 닦고 옷을 갈아입은 뒤 문을 나서려던 그때 나는 한훈한테 먼저 전화를 걸었다.
  • 비록 내가 돈은 있지만 아직 인맥은 그리 넓지 않았다. T 시티 같은 도시에서 돈이 많아야 하는 것 외에 인맥도 있어야 한다. T 시티가 보기에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그 속에는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 “한 아저씨,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 한훈은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기지개를 켜는 소리와 함께 한훈이 대답했다.
  • “도련님, 나한테까지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어젯밤 늑대 나이트에서 잘 놀았어? 내가 용이한테 네가 누군지 알려주니까 그 자식 깜짝 놀라더라고. 다음에 널 만나면 아마 절을 할 정도로 깍듯하게 대할 거야.”
  • 나는 이렇게 말했다.
  • “하하, 어젯밤 재미있게 잘 놀았어요. 그런데 아직은 저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들 보고 비밀로 해달라고 해주세요.”
  • “어젯밤 일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야? 무슨 일 또 있어?”
  • 나는 재빨리 임연의 일을 한훈한테 알려주었다.
  • “돈이 모자라는 건 아닌데 T 시티에 제가 아는 좋은 의사가 없어서요. 한 아저씨 인맥이 넓으니까 한 아저씨한테 부탁 좀 드리려고요.”
  • “네가 나한테 전화하길 참 다행이야. 만약 나를 찾지 않았으면 오늘 진짜로 웃음거리가 될 뻔했어. 임연이 혹시 누구한테 잘못을 저질렀어? 일반적으로 병원에서는 그런 환자를 며칠이라도 더 입원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왜 쫓아내지? 걱정 마,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 한훈의 말에 가장 먼저 진주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 천소미가 이상하긴 하지만 임연과의 사이가 좋아 절대로 이런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단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은 진주호밖에 없었다.
  • 나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꽉 깨물고 한 마디 내뱉었다.
  • “그 새끼 짓이 분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