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우석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주설화는 주위 공기가 희박해지면서 냉기가 엄습해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크로스백의 끈을 꼭 잡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담우석은 무거운 눈빛을 하고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주설화 씨, 혹시 아직도 그날 밤 식사 자리에서 했던 농담 때문에 화가 나있는 건가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럼 주설화 씨가 저에 대해서 오해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
“네?”
주설화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눈을 번뜩이며 재빨리 대답을 이어갔다.
“오해 같은 거 없어요.”
“그럼 왜 저는 주설화 씨가 저를 엄청 무서워하는 걸로 보이죠?”
“…”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나? 다른 속셈이 있다고 오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주설화는 허허 웃었다.
“무서워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연장자에 대한 어려움이라고 할까요. 담우석 씨, 전 연장자를 뵐 때면 늘 어색한 편이에요.”
“그래요?”
담우석은 입에 담배를 물었고 주설화는 숨결 사이사이로 그의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평소에 맡았던 것처럼 매캐한 냄새가 아니라 살짝 맑으면서도 차가운 냄새였다. 반감을 사지 않는 냄새라고나 할까.
“네.”
“그럼 주설화 씨가 이 오피스텔을 거절할 필요도 없겠네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이안이가 도움을 주려던 거니까 거절을 할 거라면 이안이한테 직접 하든지 하세요.”
“저-”
“주설화 씨,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연장자 앞에서 어색하게 군다고 여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거죠.”
주설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상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뇨? 제가 이러는 게 당신 때문에-”
“제가 뭐요?”
담우석의 검은 눈동자는 주설화의 충동을 뚝 그치게 만들었다.
“아니에요. 그냥 제 문제에요.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주설화 씨가 말씀하신 오해란 건 뭐죠?”
담우석은 꼬치꼬치 캐물어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주설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대범한 태도로 담우석을 쳐다보았다.
“담우석 씨랑 담 씨 가문을 상대로 꿍꿍이가 있다고 오해하는 거요.”
이러한 생각은 주설화 뿐만 아니라 담우석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지난번 “농담”이라고 했던 그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거다.
담우석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주설화는 몰래 입꼬리를 씰룩했다.
“보아하니 주설화 씨가 저한테 아주 큰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허허!
그녀가 담우석을 오해한 게 확실한 거야?
이 남자, 이대로 부인이라도 하려는 건가?
“주설화 씨랑 이안이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가짜인 건 아니죠?”
“당연하죠!”
“저한테 다른 의도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있을 리가 없어요.”
주설화는 매우 단호하면서도 꾸밈없는 태도로 담우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우석은 그저 눈썹을 치켜 올릴 뿐이었다.
“주설화 씨가 그리도 확신에 차있고 또 이안이가 믿고 있는 친구라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오피스텔 키는 동휘가 전달할 거예요. 계속 사양하면 상처를 받는 건 이안일 거예요.”
담우석은 데스크 앞으로 돌아간 뒤 덤덤함을 회복했다. 그는 다시금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주설화의 거절과 방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을 비췄다.
주설화는 잠시 멈칫하다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담우석 삼촌. 이만 가볼게요.”
깍듯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 봐서 주설화는 정말로 그를 연장자로 대하는 듯했다.
사실, 그녀가 너무 민감한 탓일 수도 있다.
그녀는 당당한 마음이었고 담이안, 그리고 담 씨 가문에 대해서도 그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한 목적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일수록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게 되었던 탓에 담우석이 그녀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또 어쩌면 그녀가 담우석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사실일지도 모른다.
주설화는 살짝 마음이 괴로운 상태였다. 그녀는 지레짐작으로 너그러운 그의 아량을 가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점에서는 그녀가 담우석에게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사과를 해야 하나?
“설화야, 키 받았어?”
담이안이 어느새 올라와 있었고 멍 때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담이안은 입을 열어 질문을 건넸다.
“왜 그래?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음…아무것도 아니야.”
이때 서동휘가 키를 들고 나타났고 담이안은 웃으며 키를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동휘 오빠. 삼촌한테 저는 간다고 얘기 좀 해주세요. 방해 안 하고 싶어서요.”
그녀는 주설화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떴고 곧장 그들이 말했던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런데 오피스텔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주설화는 “오피스텔”이란 단어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게 되었다.
120평에 정교한 인테리어, 가구와 가전이 전부 구비되어 있는 집안은 시야마저 확 트여있었다. 심지어 단지 내는 안전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집을 오피스텔이라고 한다고?
서울에서는 거의 호화 주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어때?”
주설화는 헤벌쭉 웃었다.
“DC 그룹 직원 복지가 너무 좋은 거 아니야? 혹시 사람 더 안 구해? 나 지원할래!”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는 잡심부름 정도 밖에 못 해. 근데 이 오피스텔 진짜 괜찮네. 나도 몰랐어. DC 그룹에 이렇게 좋은 직원 복지가 있었구나. 아무튼 넌 여기서 지내면 되는 거야. 난 너무 맘에 들어. 월세는 40만 원이야. 흥정은 사절이고. 돈 얘기 하면 감정 상하니까.”
주설화는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연기력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담이안을 안아주었다.
“담이안 아가씨, 나 진짜 땡잡았나 봐. 소인 이번 생은 망해서 아가씨 은혜에 갚을 능력이 못 돼요. 다음 생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퉤! 다음 생 같은 소리 하네. 이번 생에 갚는 걸로 해.”
“어떻게 갚을까? 말만 하세요. 소가 되고 말이 될게. 물론 몸은 안 팔 거야.”
“안돼. 몸도 팔아야 돼. 가자, 얼른 짐 싸. 오늘 저녁에 바로 널 팔아버릴 거니까.”
*
주설화는 정말로 담이안에게 끌려가 팔리게 되었다.
그녀는 정교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채로 파티장에 가게 되었다.
화려하다는 단어는 주설화가 오버스럽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담이안은 그녀를 확실하게 꾸며주었고 화려한 인형으로 보이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를 만나게 했다가 저 남자를 소개하기도 했다.
담이안은 그녀에게 남자를 찾아주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었다.
주설화의 웃음은 점점 더 굳어져가고 있었지만 담이안은 점점 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너 연락처 다 뿌려놨으니까 앞으로 친구 많이 만들어 둬.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친구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넌 너무 집순이인 게 문제야. 그 예쁜 껍데기 아끼다 똥 된다?”
주설화는 곧 죽어도 미련 없는 얼굴이었고 눈빛은 암담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담우석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더해지고 있었다.
“어머? 삼촌도 와있네. 쯧쯧. 우리 할머니가 보내셨나 봐. 이 파티는-”
선보는 것이 목적인 건가?
주설화의 추측이 맞았다. 그리고 주설화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질문을 해대며 대화를 나누려는 남자를 앞에 두고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안아, 우리 너희 삼촌한테 인사하러 가자.”
주설화는 담이안을 끌고 담우석 앞으로 다가가더니 얌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삼촌.”
담우석은 담담하게 응했고 내리뜬 눈에는 주설화의 예쁜 쇄골이 들어오게 되었다.
담이안은 친구와 수다 떨러 갔고 주설화는 담우석과 함께 서있었다. 그런 그녀는 속으로 몰래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