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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고마웠어요

  • 서울 식천각의 명성은 주설화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 다만 그녀에게 이 식당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 식천각에서 식사를 하는 영광을 누리려면 적어도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는 소문도 들은 적 있었으나 주설화는 담이안 아가씨 덕분에 별다른 번거로움 없이도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 그녀는 담이안의 집안이 꽤나 부유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지 못했다.
  • 그러나 오늘, 주설화는 드디어 담이안의 집안 상황에 대해서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 식사를 끝마친 후, 담이안은 화장실로 향했고 주설화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이때, 계단을 내려오던 담우석은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늘씬한 여자를 발견했다.
  • 옅은 노란색의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새하얀 피부가 훨씬 더 돋보였고 가느다란 목선, 움푹 파인 쇄골과 완벽한 곡선을 이루는 허리라인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 그 순간, 어젯밤 욕조 안에서 물에 푹 젖은 채 유혹적인 자태를 드러내던 여자의 모습이 빠르게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시선을 내리깐 그는 몸 옆으로 늘어뜨린 손가락을 움씰거렸다.
  • 왠지 모르게 담배를 태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형, 뭘 보고 있는 거야?”
  • 분홍색 하와이안 셔츠에 화이트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담우석을 따라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 온몸으로 방탕한 아우라를 뿜어내며 덩달아 시선을 옮기던 핑크 셔츠맨은 담우석의 시선 끝에 있는 주설화를 발견했다.
  • “호오? 미녀다!”
  • 담우석은 등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든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 휴대폰을 보고 있던 주설화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하필이면 담우석의 검은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 여전히 셔츠에 양복바지 차림인 그는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올리고 한 손에는 외투를 대충 걸쳐 놓고 다른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 무척 심플한 모습이었으나 성숙한 남자의 고귀한 포스는 숨길 수 없었다.
  • 주설화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그러나 담우석은 오히려 낯선 사람 취급을 하며 태연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불현듯 그녀의 두 다리가 그녀의 의지와 다르게 제멋대로 움직이며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계속해서 담우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르던 주설화는 그가 한 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후에야 덩달아 자리에 멈춰 섰다.
  • 담우석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꽂아 넣고 한 모금 빨자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불현듯 고개를 돌려 주설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 주설화는 흠칫 놀라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녀의 작은 얼굴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 담우석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검은색 눈동자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 뙤약볕 아래에서 계속 멍하니 서있기만 하는 엉뚱한 여자를 바라보던 담우석은 그제야 담배를 끼워 넣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주설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나무 그늘 밑으로 갔다.
  •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주설화의 찡그려졌던 미간이 그제야 조금 펴졌다.
  •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에 여전히 잔뜩 긴장한 상태였던 그녀는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 담우석은 가볍게 담뱃재를 떨고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입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 “용건이 뭡니까?”
  • 이 여자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차마 꺼내지 못하는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듯했다.
  • 담우석은 그녀가 자신에게 접근하도록 허락한 이 인내심의 출처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주설화는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심장 박동이 조금 거칠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 “어젯밤 일에 대해…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담우석의 검은 시선이 여자의 하얀 얼굴 위에 잠시 머물렀다.
  • 그는 담배를 입가에 갖다 대고 한 모금 빨았다.
  • “내가 당신을 따먹지 않아서 고마워하는 겁니까?”
  • 주설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그녀의 목덜미부터 어깨, 아니, 몸 전체가 마치 햇볕에 빨갛게 그을린 것처럼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담우석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마치 어젯밤 그토록 신사적이었던 남자가 오늘날 이런 멘트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그녀의 생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 어쩌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담우석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아니면 사실은 그거에 대해 실망이라도—”
  • “아니에요.”
  • 주설화는 다급히 부정하더니 민망하고도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 “저를 도와 의사 선생님을 불러주시고 또 옷도 챙겨주셔서 감사했어요. 이 정도 돈에 연연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굳이 돈으로라도 보상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고마웠어요, 건강하시고 가정에 평안과 축복이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주설화는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
  • 담우석은 검은 눈동자를 반쯤 감은 채 떠나가는 그녀의 급박한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쿨하게 돌아섰다.
  • 그나저나 마지막 덕담은 무슨 의미일까.
  • 한편, 주설화는 담이안의 차에 올라탄 후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그녀는 그 남자의 정체가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 그랬기에 그녀는 더더욱 그 남자에게 연락처를 묻거나 돈으로 갚겠다는 둥 그에게 들러붙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의심받을 수도 있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들은 일절 하지 않았다.
  • 그냥 상대방이 선의를 베풀었다고 치부하는 것이 가장 나은 결말일 것이다.
  • 그리고 그녀가 그 선의에 보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더 이상 그 남자와 엮이지 않는 것이다.
  •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니 이렇게 끝내는 게 맞아.’
  • 만약 쓸데없는 말들을 했다가는 설령 그와 우연히 재회했다 한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흑역사로 도배가 될 텐데,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더 있을까?
  • 하지만 그녀가 다시는 그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오히려 그녀의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 그녀는 현재 담이안의 방에서 금방 샤워를 마친 상태였다.
  •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건, 차마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던 주설화는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를 보고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입술을 살짝 벌린 상태로 멍하니 서있었다.
  • 이—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주설화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그때, 담우석의 짙은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몸을 감싸고 있는 짧은 타월 위로 가녀린 어깨와 새하얀 피부가 훤히 드러나있었고 아찔한 굴곡 또한 무척 선명하게 보였다.
  • 그녀의 허벅지는 타월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져있던 터라, 오히려 날씬한 다리가 더욱 부각되었다.
  • “꺄—”
  •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지한 주설화는 낮은 비명과 함께 서둘러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지만, 위와 아래를 동시에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대던 그녀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고 몸도 덩달아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