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룸 밖으로 나간 후에야 그녀는 겨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주설화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담우석은 확실히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런 방법을 써야만 했을까?
농담으로 사람을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
주설화는 이미 마음속으로 담우석을 백 번도 더 잘근잘근 씹었다.
물론, 절대 다시는 그와 마주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녀는 긴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나섰다.
하지만 담우석은 여전히 레스토랑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려 했던 주설화는 불현듯 담우석의 싸늘한 시선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건지 아니면 담우석을 쳐다보는 건지 모를, 사람들의 알듯 말듯 한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내 담우석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통화를 끝낸 담우석은 주설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담우석 씨, 그럼 전 먼저 가보겠—”
“차가 오면 함께 타고 가요.”
담우석은 명령을 내렸지만, 주설화는 이번만큼은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담우석 씨. 저 혼자 가면 됩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두 눈동자에는 그녀만의 강한 고집이 담겨있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설화를 바라보고 있던 담우석의 차가운 얼굴에 불현듯 담담한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이건 화가 난 겁니까?”
주설화는 담우석의 감정 변화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웃는 거야?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주설화의 머릿속은 온통 불만투성이였지만, 차마 얼굴에는 티를 낼 수 없었다.
“아니요.”
“농담이었는데.”
“네, 농담이길 바랄게요.”
주설화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담우석 씨. 제 말은, 담우석 씨의 뜻 잘 알았다고요. 그나저나 담우석 씨도 농담을 즐기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
그녀의 말속에서 조롱이 느껴져 담우석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왠지 모르게 눈앞의 꼬맹이랑 시간을 때우고 싶은 흥미가 생겼다.
“젊은이들은 다 농담을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아하하… 담우석 어르신께서는 아직 젊은이들을 잘 모르시나 보네요. 농담도 사람을 가리는 법이죠.”
주설화는 밖을 힐끔 쳐다봤다.
‘아니, 택시를 언제 불렀는데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그리고 담우석은 또 왜 이래? 시간이 남아돌아? 이 인간 정도 되면 시간은 금과도 같아서 1분에도 몇십억이 오고 가고 이러는 거 아닌가?’
담우석은 주설화가 어쩐지 귀찮아하는 듯한 기색에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어르신이요?”
주설화의 얼굴에 불현듯 교활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담우석 삼촌, 봤죠? 이게 바로 젊은이들이 하는 농담이랍니다. 별로 재미없으시죠? 그러니까 저랑 농담하려 하지 마세요. 우리는 세대 차이가 있으니까, 괜히 농담했다가 큰일 나요.”
주설화는 자신의 백 점짜리 반격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자아도취에 빠진 그녀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마치 포도알 같아 담우석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려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때마침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왔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분위기가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설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담우석 씨,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와 단 일 분이라도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담우석도 이번만큼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 두지 않았다.
차에 타자마자 분노가 터져 나온 주설화는 바로 담이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겁이라도 먹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설화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터져 나왔다.
얼씨구, 일을 벌여놓고는 감당은 못하시겠다?
*
사실 주설화도 진심으로 담이안에게 화가 났던 건 아니었지만, 담이안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일단 눈물이 쏙 빠지게 혼부터 냈다.
담이안은 용서를 빌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주설화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그 어떤 집도 담이안의 비난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허탕만 치고 말았다.
다음날, 담이안은 다짜고짜 주설화가 미리 잡아둔 중개인과의 약속을 취소해버리고 그녀를 끌고 집을 나섰다.
금성 빌딩 앞, 주설화는 담이안의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르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어쩐지 느낌이 싸했다.
이때, 누군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담이안은 좋지 못한 소식이라도 들은 건지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했다.
“됐어. 알았으니까 지금 갈게.”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담이안은 주설화를 홀로 엘리베이터 안에 내버려 두며 말했다.
“작은 삼촌한테 미리 말해뒀으니까 넌 그냥 22층으로 가서 서동휘한테서 열쇠를 받으면 돼. 일 끝나면 나도 바로 올라갈게.”
담이안은 말을 끝내자마자 빛의 속도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도 다시 닫히고 말았다.
주설화는 이미 눌려져있는 22층 버튼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X발만 연거푸 뱉어댔다.
지금 도망쳐도 괜찮을까?
아니, 이미 늦었어.
엘리베이터가 이토록 빨리 움직일 줄은 미처 몰랐던 주설화가 허둥지둥하던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때마침 서동휘가 나타났다.
“주설화 씨, 오셨네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안이가 열쇠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저는 열쇠만 가지고 바로 갈 거예요. 괜히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지만 서동휘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민폐 아닙니다.”
그는 바로 열쇠를 건네는 대신 복도 끝에 있는 한 사무실 앞으로 가 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대표님, 주설화 씨 오셨습니다.”
안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해.”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한 서동휘의 제스처를 보면서도 주설화는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사무실 안쪽에서 들려왔던 그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이대로 가면 두 발로 범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았으니까.
한편, 담우석은 손에 들고 있던 문건을 내려놓고 사무실 문만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불과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에 있을 그 여자는 어쩐지 몇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있기라도 한 양 내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오프숄더로 된 줄무늬 상의에 무릎까지 오는 네이비 스커트를 입고 샌들을 신고 있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담우석의 짙은 눈동자가 훤히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슥 훑었다.
어깨를 드러내는 것을 이리도 즐기나?
“담우석 씨!”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에 극도로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담우석은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헤치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채 무척이나 여유롭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는 의자 손잡이에 걸쳐놓은 손을 뻗어 태양혈을 주무르더니 차가운 얼굴로 실눈을 떴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는 유독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는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더는 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주설화는 눈 딱 감고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담우석 씨, 이안이가 저한테 무슨 열쇠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이안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담우석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영문을 모르고 있는 그녀에게 설명해 줬다.
“DC 그룹이 갖고 있는 부동산 중에 회사 직원들이 사용하는 오피스텔이 있거든요. 이안이한테서 얘기 들었습니다. 마침 비어있는 집이 있으니, 주설화 씨가 들어가서 살아도 됩니다.”
“아, 이건—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담우석 씨, 저는 이안이가 이런 제안을 했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사양할게요. 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개인이 보여줬던 집 중에 꽤나 마음에 드는 집이 있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서울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안이한테는 제가 직접 말할게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