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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담우석 삼촌, 우리는 세대 차이가 있잖아요

  • 이게 끝이야?
  • 주설화는 담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룸 밖으로 나간 후에야 그녀는 겨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 이로써 주설화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담우석은 확실히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굳이 이런 방법을 써야만 했을까?
  • 농담으로 사람을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
  • 주설화는 이미 마음속으로 담우석을 백 번도 더 잘근잘근 씹었다.
  • 물론, 절대 다시는 그와 마주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훨씬 더 많았지만.
  • 그녀는 긴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나섰다.
  • 하지만 담우석은 여전히 레스토랑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 그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려 했던 주설화는 불현듯 담우석의 싸늘한 시선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건지 아니면 담우석을 쳐다보는 건지 모를, 사람들의 알듯 말듯 한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내 담우석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 통화를 끝낸 담우석은 주설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담우석 씨, 그럼 전 먼저 가보겠—”
  • “차가 오면 함께 타고 가요.”
  • 담우석은 명령을 내렸지만, 주설화는 이번만큼은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 “아닙니다, 담우석 씨. 저 혼자 가면 됩니다.”
  •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두 눈동자에는 그녀만의 강한 고집이 담겨있었다.
  •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설화를 바라보고 있던 담우석의 차가운 얼굴에 불현듯 담담한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 “이건 화가 난 겁니까?”
  • 주설화는 담우석의 감정 변화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 왜 갑자기 웃는 거야? 지금 이 상황이 웃겨?
  • 주설화의 머릿속은 온통 불만투성이였지만, 차마 얼굴에는 티를 낼 수 없었다.
  • “아니요.”
  • “농담이었는데.”
  • “네, 농담이길 바랄게요.”
  • 주설화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뭐라고요?”
  • “아닙니다, 담우석 씨. 제 말은, 담우석 씨의 뜻 잘 알았다고요. 그나저나 담우석 씨도 농담을 즐기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
  • 그녀의 말속에서 조롱이 느껴져 담우석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 그는 왠지 모르게 눈앞의 꼬맹이랑 시간을 때우고 싶은 흥미가 생겼다.
  • “젊은이들은 다 농담을 즐기는 줄 알았는데.”
  • “아하하… 담우석 어르신께서는 아직 젊은이들을 잘 모르시나 보네요. 농담도 사람을 가리는 법이죠.”
  • 주설화는 밖을 힐끔 쳐다봤다.
  • ‘아니, 택시를 언제 불렀는데 아직도 안 오는 거야?’
  • ‘그리고 담우석은 또 왜 이래? 시간이 남아돌아? 이 인간 정도 되면 시간은 금과도 같아서 1분에도 몇십억이 오고 가고 이러는 거 아닌가?’
  • 담우석은 주설화가 어쩐지 귀찮아하는 듯한 기색에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 “어르신이요?”
  • 주설화의 얼굴에 불현듯 교활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담우석 삼촌, 봤죠? 이게 바로 젊은이들이 하는 농담이랍니다. 별로 재미없으시죠? 그러니까 저랑 농담하려 하지 마세요. 우리는 세대 차이가 있으니까, 괜히 농담했다가 큰일 나요.”
  • 주설화는 자신의 백 점짜리 반격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 자아도취에 빠진 그녀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마치 포도알 같아 담우석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려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때마침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왔다.
  • 갑작스러운 침묵에 분위기가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
  • 주설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담우석 씨,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 그녀는 진심으로 그와 단 일 분이라도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 담우석도 이번만큼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 두지 않았다.
  • 차에 타자마자 분노가 터져 나온 주설화는 바로 담이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겁이라도 먹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주설화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터져 나왔다.
  • 얼씨구, 일을 벌여놓고는 감당은 못하시겠다?
  • *
  • 사실 주설화도 진심으로 담이안에게 화가 났던 건 아니었지만, 담이안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일단 눈물이 쏙 빠지게 혼부터 냈다.
  • 담이안은 용서를 빌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주설화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 하지만 그 어떤 집도 담이안의 비난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 결국 이번에도 허탕만 치고 말았다.
  • 다음날, 담이안은 다짜고짜 주설화가 미리 잡아둔 중개인과의 약속을 취소해버리고 그녀를 끌고 집을 나섰다.
  • 금성 빌딩 앞, 주설화는 담이안의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르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 어쩐지 느낌이 싸했다.
  • 이때, 누군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담이안은 좋지 못한 소식이라도 들은 건지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했다.
  • “됐어. 알았으니까 지금 갈게.”
  •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담이안은 주설화를 홀로 엘리베이터 안에 내버려 두며 말했다.
  • “작은 삼촌한테 미리 말해뒀으니까 넌 그냥 22층으로 가서 서동휘한테서 열쇠를 받으면 돼. 일 끝나면 나도 바로 올라갈게.”
  • 담이안은 말을 끝내자마자 빛의 속도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도 다시 닫히고 말았다.
  • 주설화는 이미 눌려져있는 22층 버튼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X발만 연거푸 뱉어댔다.
  • 지금 도망쳐도 괜찮을까?
  • 아니, 이미 늦었어.
  • 엘리베이터가 이토록 빨리 움직일 줄은 미처 몰랐던 주설화가 허둥지둥하던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 그리고 때마침 서동휘가 나타났다.
  • “주설화 씨, 오셨네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안이가 열쇠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저는 열쇠만 가지고 바로 갈 거예요. 괜히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 하지만 서동휘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민폐 아닙니다.”
  • 그는 바로 열쇠를 건네는 대신 복도 끝에 있는 한 사무실 앞으로 가 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 “대표님, 주설화 씨 오셨습니다.”
  • 안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라고 해.”
  •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한 서동휘의 제스처를 보면서도 주설화는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 사무실 안쪽에서 들려왔던 그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이대로 가면 두 발로 범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았으니까.
  • 한편, 담우석은 손에 들고 있던 문건을 내려놓고 사무실 문만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 불과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에 있을 그 여자는 어쩐지 몇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있기라도 한 양 내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 그리고 한참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오프숄더로 된 줄무늬 상의에 무릎까지 오는 네이비 스커트를 입고 샌들을 신고 있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 담우석의 짙은 눈동자가 훤히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슥 훑었다.
  • 어깨를 드러내는 것을 이리도 즐기나?
  • “담우석 씨!”
  •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에 극도로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담우석은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헤치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채 무척이나 여유롭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 그는 의자 손잡이에 걸쳐놓은 손을 뻗어 태양혈을 주무르더니 차가운 얼굴로 실눈을 떴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는 유독 날카롭게 느껴졌다.
  •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는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 더는 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주설화는 눈 딱 감고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 “담우석 씨, 이안이가 저한테 무슨 열쇠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이안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 담우석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영문을 모르고 있는 그녀에게 설명해 줬다.
  • “DC 그룹이 갖고 있는 부동산 중에 회사 직원들이 사용하는 오피스텔이 있거든요. 이안이한테서 얘기 들었습니다. 마침 비어있는 집이 있으니, 주설화 씨가 들어가서 살아도 됩니다.”
  • “아, 이건—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담우석 씨, 저는 이안이가 이런 제안을 했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사양할게요. 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개인이 보여줬던 집 중에 꽤나 마음에 드는 집이 있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서울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안이한테는 제가 직접 말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 “주설화 씨.”
  • 담우석의 한 마디에 주설화는 걸음을 멈췄다.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뻗어 주설화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