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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여우의 꼬리는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어

  • 주설화는 담우석의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거절하려던 말이 그대로 목구멍에 걸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 오히려 담이안만 손뼉을 마주치며 쾌재를 불렀다.
  • “오케이, 작은 삼촌. 그렇게 약속한 거다?”
  • 담우석은 무심하게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 하지만 주설화는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그녀를 위축되게 하는 정체 모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직감일 뿐이었다.
  • 그녀가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거절하려던 그때, 담우석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전화를 받았다.
  • 담우석은 공무로 인해 자리를 비웠고 그들의 대화는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 주설화는 마치 뼈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 듯 흐물흐물 무너져 담이안의 몸 위로 털썩 쓰러지더니 이를 빠득빠득 갈며 윽박질렀다.
  • “담이안아, 담이안! 넌 도대체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인 거야? 너 나한테 원수졌냐?”
  • 하지만 담이안은 오히려 박장대소하며 대답했다.
  • “푸하하하… 얘가 언제부터 찌질이가 됐어?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말했잖아, 나한테 삼촌이면 너한테도 삼촌이라고. 사양하지 마라, 정말 괜찮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때 가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작은 삼촌한테 선물 하나 주면 되지 뭐.”
  • 주설화는 벌떡 일어나더니 예쁜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말했다.
  • “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 “그럼 뭐가 중요한데?”
  • 중요한 건, 조금 전 그녀가 담우석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이고, 무엇보다 약에 취해 그에게 별의별 짓을 다 해놓고 이제 와서 갑자기 그에게서 직접 남자를 소개받으려 하는 끔찍한 사실이다.
  • 차라리 그냥 나가죽어버릴까?
  • 하지만 주설화는 차마 담이안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 결국, 그녀는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 해프닝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 그날 밤, 주설화는 담이안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담가에서 하룻밤 보내기로 했다.
  • 담가의 웃어른들은 나름대로 주설화와 낯이 익은 편이었다.
  • 두 사람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담이안의 친구들 중 주설화가 유일하게 점잖은 편이었고 기타 어중이떠중이들은 전혀 친구라고는 볼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 담이안의 부모님은 주설화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고 주설화 또한 사리가 밝아 어른들과도 별 무리 없이 잘 지내곤 했다.
  • 그리고 주설화가 그나마 마음이 편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담우석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새벽녘,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는데 주설화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 그녀는 어슴푸레한 복도 불빛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 거실에는 작은 무드 등이 켜져 있었다.
  • 소파에 털썩 앉은 그녀는 뒤죽박죽한 머리로 깊은 고민에 잠겼다.
  • 친모 백휘인과 장 씨 가문이 벌인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 하지만 주설화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골머리를 앓는 성격이 아니었다.
  • 때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면 그만이었다.
  • 만약 장가에서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그녀를 바보 취급 하며 이용하려 든다면, 그녀 또한 더 이상 거리낄 것 없지 않은가.
  • 어차피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그 ‘가족애’를 기대해서 무엇하리.
  • 주설화는 어느새 졸음이 몰려와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코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 계단 입구 으슥한 곳에서 체구가 우람한 사람의 실루엣이 언뜻 보였다.
  • 그녀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 “누구세요?”
  •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주설화는 그제야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담우석임을 깨달았다.
  • 홈웨어로 보이는 회색 티셔츠에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나른한 겉모습과는 달리 한 쌍의 검은색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주설화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 이 남자, 도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서있었던 거지?
  • 하지만 주설화는 한시라도 빨리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담우석에게 ‘삼촌’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말을 걸었다.
  • “담우석 삼촌, 제가 휴식을 방해했나요? 물 한 잔 먹으려고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려던 참이었어요. 편히 주무세요.”
  • 계단을 오르려면 담우석을 지나쳐 가야만 했다.
  • 주설화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담우석 곁을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그에게 손목을 덥석 잡혀버렸다.
  • 그 순간, 주설화는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 그녀는 담우석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슥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 실수였는지, 아니면 고의였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그녀는 최대한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 “담우석 씨,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 담우석의 짙은 시선이 주설화의 작은 얼굴에 내려앉았다.
  • 경계심, 조심스러움, 긴장감, 그리고 두려움까지… 그녀의 눈빛에는 많은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한눈에 안겨오는 건, 그녀가 정말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나 훌륭한 연기력 때문일까.
  • 주설화는 담우석이 뭔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 그러나 그는 갑자기 주설화를 놓아주더니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 “왜 계속 삼촌이라 부르지 않고?”
  • 조금 전 그녀는 분명 일부러 삼촌이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을 것이다.
  • 그가 혹시나 돌발행동이라도 할까 두려워 일부러 웃어른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그의 행동에 제약을 걸기 위함이었다.
  • 담우석 또한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 “처음이라 아직 익숙지 않네요. 별일 없으시면 저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
  • “주설화 씨.”
  • 담우석은 주설화의 다급한 작별 인사를 잘라버리고 말을 이었다.
  • “괜찮다면 물 좀 떠올래요?”
  • 뭐?
  • 주설화의 경악한 표정은 무시한 채, 담우석은 이미 소파에 털썩 앉아버렸다.
  • 저 자연스러운 태도는 아마 다른 사람을 부려먹는 것에 이골이 났기 때문이겠지?
  • 하지만 주설화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주방으로 가 물 한 잔을 따라 소파 옆으로 향했다.
  • 그녀가 컵을 내려놓기도 전에 담우석은 대뜸 손을 내밀어 그녀가 들고 있던 컵을 받아들었다.
  • 두 사람의 손가락이 가볍게 맞닿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 흠칫 놀란 그녀는 황급히 내밀었던 손을 움츠리며 차마 그를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 “그럼 전— 먼저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 주설화는 더더욱 마음이 급해져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휙 돌렸지만, 담우석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 “주설화 씨, 만약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 주설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 “담우석 씨, 말씀만이라도 감사하지만 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어서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편한 밤 되시길 바랄게요.”
  • 말을 끝내고 곧바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방으로 돌아간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지만, 여전히 쿵쾅쿵쾅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 한편, 거실에 남겨진 담우석은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 젊고 예쁜 주설화는 충분히 남자의 구미를 자극할 만한, 굉장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 그런 그녀가 느닷없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이안의 친구라니, 담우석은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 그녀의 목적은 담우석일까, 아니면 담 씨 가문일까.
  • 담우석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 여우의 꼬리는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