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친구”로 더 깊은 인연을 맺으려던 남자들은 옆에 있던 담우석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좋은가 봐요?”
담우석은 손에 잔을 들고 있었고 검은 눈동자의 빛은 주설화를 향하고 있었다.
주설화는 웃으며 답했다.
“네. 삼촌을 만나게 돼서 너무 기분이 좋네요!”
“허-”
담우석은 피식 웃었다.
“내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었나?”
“살짝 그렇긴 하죠. 근데 삼촌이 좋은 사람인 걸 아니까요. 그리고-”
주설화는 잠시 멈칫하다 결국은 성실할 것을 선택했다.
“담우석 삼촌, 전에는 제가 너무 민감했어요. 너무 속 좁게 굴었죠. 죄송했어요.”
몹시 성의를 담은 사과였다.
주설화 그녀는 잘잘못에 대해서 대담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잘못을 했고 오해를 했으니 사과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었다.
마주하지 못할 건 없었다.
담우석은 다소 놀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잔을 흔들고 있는 그는 눈이 반짝였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이건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인가?
주설화는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담우석은 정말로 좋은 사람인 게 맞았다. 겉으로는 냉랭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실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오해에 대한 사과를 그가 별다른 말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다는 건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었다.
앞으로 그녀는 진심을 담아 담우석 삼촌, 이 남자를 존경하기로 했다.
담우석 역시 주설화의 미소를 따라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참, 그리고 있잖아요, 고마워요 담우석 삼촌.”
담우석은 미간을 치켜 올렸고 언뜻 깨달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녀가 무엇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뭐가 고마운데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게 도와주신 거 말이에요. 저 남자들 삼촌을 보고 차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주설화는 제 행동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얼마나 똑똑한 선택이었나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우석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고맙네요.”
“네?”
주설화는 단번에 알아챘지만 약간의 고민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설마 아니죠? 저 이안이 친구고 삼촌 조카뻘이잖아요. 언니들이나 이모들이 오해할 일은 없을 거예요. 삼촌의 감사 인사는 차마 받을 수 없네요. 지난번에 저 때문에 이미 그 여자분과의 만남에 차질이 생겼었잖아요. 만약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폐 끼치는 일이 생긴다면 제 과오는 그리 간단한 수준이 아닌 게 되는 거예요. 전 이만 가보는 게 좋겠어요.”
주설화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왜냐면 담우석이 불쑥 그녀의 손목을 잡았으니까.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두 사람의 동작으로 인해 차가운 숨을 들이마시게 되었다.
담이안마저 그 상황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대로 영문도 모른 채 주설화의 목청이 높아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주설화는 고개를 돌려 담우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삼촌, 이렇게 잡고 계셔도 소용없어요. 제가 방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저 같은 조카뻘은 잡고 있어봤자 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허허…”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담우석은 웃을 듯 말 듯 긴가민가한 얼굴을 한 채 손을 내려놓았다. 그런 두 사람 앞으로 담이안이 다가왔다.
“작은 삼촌, 이렇게나 많은 여자 중에 맘에 드는 사람은 없어? 할머니가 나한테 신신당부 하셨거든. 꼭 한 명이라도 고르게 하라고.”
담우석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담이안의 설득을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담이안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낮은 소리로 주설화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우리 작은 삼촌 뭔가 특별한 취향이 있는 것 같지 않아?”
“풉…”
주설화는 다소 흥분한 탓에 통제하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어 담우석을 쳐다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괜히 헛기침만 해댔다.
담이안은 머쓱하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너도 웃고만 있을 때가 아니야. 아까 그 친구들이랑 왜 이야기 좀 더 나누지 그랬어. 가자, 오늘 내가 기필코 네 집순이 병을 고쳐버려야지.”
그녀는 주설화를 사람들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젊은 남녀들은 활력이 넘치는 싱그러운 청춘의 모습을 선사하고 있었다.
담우석의 검은 눈은 실눈이 되었다. 이제 정말 세대 차이라도 생긴 걸까?
*
장예원은 눈빛이 어두웠다. 그녀는 질투 어린 눈으로 재벌가의 아가씨들 사이를 누비는 주설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촌년 주제에 언제부터 재벌가의 아가씨, 도련님들한테 들러붙은 거야?
그녀는 오늘 저녁 파티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썼다. 그렇게까지 해서야 참석한 파티에서 망할 주설화 계집애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 영감탱이를 성에 차지 않아 하는 거지. 더 큰 목표가 있었던 거네.
그녀는 음험하고 악랄한 눈을 번뜩였고 주설화가 화장실을 가는 모습을 보더니 재빨리 따라붙었다.
주설화가 화장실로 들어서자 뒤에 있던 그녀는 곧장 힘을 실어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화장실 문을 잠가버렸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눈앞에는 장예원이 서있었다.
주설화는 눈썹을 찌푸렸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흥, 난 서울 명문가의 아가씨인데 여기 나타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너 말이야, 너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흥, 우리 집에서는 그리 고고한 척하더니 어쩜 돌아서자마자 이리 세속적이게 굴어? 그런데 너 야망도 크다. 조 사장을 성에 차하지 않더니 여기서 더 젊은 도련님 찾으려고 그랬던 거였어? 허허…주설화, 너 설마 진짜로 그 얼굴 하나로 명문가에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 같은 거지년은 몸이나 대주고 그걸로 돈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대우를 받는 셈이야. 높은 가지에 오를 생각하지도 마. 꿈 깨라고 너.”
장예원은 입만 열면 본인이 명문가의 아가씨니 뭐니 해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 밖으로 뱉어지는 말들은 참으로 저질스러우면서도 듣기 거북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런 사람과는 이야기를 더 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었기에 주설화는 그녀와 말다툼을 하는 것조차 꺼렸다.
주설화는 냉담한 모습으로 입을 닫고 있었고 세면대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손만 씻을 뿐이었다.
“주설화, 너 지금 찔리는 거지? 그래서 할 말이 없는 거야, 그치? 이제 네 분수를 알게 된 거야? 넌 그냥 얌전하게 조 사장 그 영감탱이한테 시집이나 가. 그럼 본처라도 되어볼 수 있는 거잖아. 도련님들한테 빌붙어 기어오를 생각은 하지도 마. 그건 헛된 망상일 뿐인 거야. 넌 그냥 기생으로 살아갈 팔자인 거지. 알아들어?”
주설화는 손을 닦았다. 그리고 장예원이 주절대는 것을 끝내자 주설화는 불현듯 몸에 지닌 액세서리들을 풀기 시작하더니 전부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이어 장예원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짝!”
뺨을 때리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힘을 제대로 실은 귀싸대기였다.
주설화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의 장예원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입에 걸레를 물었나. 너의 아빠 대신 제대로 혼내줘야 쓰겠어. 그 더러운 입으로 서울 명문가 아가씨라는 타이틀을 붙여? 가당치도 않아.”
“감히 날 때려? 주설화, 죽여버릴 거야!”
“너야말로 망할 년인 거지! 때렸는데 뭐 어쩔 거야? 세게 때리지도 않았어. 어디 한 번 다시 돌려주던지. 우리 또다시 제대로 한 번 싸워보는 거야. 미친년들처럼 제대로 싸워보자고. 밖에 있는 아가씨들이나 도련님들한테 다 보여줘. 그러고 나서도 네가 서울 명문가 아가씨라고 인정해주는지 한 번 볼까?”
“너-”
이 말은 확실하게 장예원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차마 명문가 아가씨들과 도련님들 앞에서 정말로 쌈박질을 할 용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