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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 담우석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주설화는 주위 공기가 희박해지면서 냉기가 엄습해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 그녀는 저도 모르게 크로스백의 끈을 꼭 잡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 담우석은 무거운 눈빛을 하고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주설화 씨, 혹시 아직도 그날 밤 식사 자리에서 했던 농담 때문에 화가 나있는 건가요?”
  • “아니요, 아닙니다.”
  •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럴 용기도 없었다.
  • “그럼 주설화 씨가 저에 대해서 오해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
  • “네?”
  • 주설화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눈을 번뜩이며 재빨리 대답을 이어갔다.
  • “오해 같은 거 없어요.”
  • “그럼 왜 저는 주설화 씨가 저를 엄청 무서워하는 걸로 보이죠?”
  • “…”
  •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나? 다른 속셈이 있다고 오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 주설화는 허허 웃었다.
  • “무서워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연장자에 대한 어려움이라고 할까요. 담우석 씨, 전 연장자를 뵐 때면 늘 어색한 편이에요.”
  • “그래요?”
  • 담우석은 입에 담배를 물었고 주설화는 숨결 사이사이로 그의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 평소에 맡았던 것처럼 매캐한 냄새가 아니라 살짝 맑으면서도 차가운 냄새였다. 반감을 사지 않는 냄새라고나 할까.
  • “네.”
  • “그럼 주설화 씨가 이 오피스텔을 거절할 필요도 없겠네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이안이가 도움을 주려던 거니까 거절을 할 거라면 이안이한테 직접 하든지 하세요.”
  • “저-”
  • “주설화 씨,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연장자 앞에서 어색하게 군다고 여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거죠.”
  • 주설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상했다.
  • “도둑이 제 발 저리다뇨? 제가 이러는 게 당신 때문에-”
  • “제가 뭐요?”
  • 담우석의 검은 눈동자는 주설화의 충동을 뚝 그치게 만들었다.
  • “아니에요. 그냥 제 문제에요.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 “주설화 씨가 말씀하신 오해란 건 뭐죠?”
  • 담우석은 꼬치꼬치 캐물어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 주설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대범한 태도로 담우석을 쳐다보았다.
  • “담우석 씨랑 담 씨 가문을 상대로 꿍꿍이가 있다고 오해하는 거요.”
  • 이러한 생각은 주설화 뿐만 아니라 담우석도 하고 있을 것이었다.
  • 그런 게 아니라면 지난번 “농담”이라고 했던 그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거다.
  • 담우석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주설화는 몰래 입꼬리를 씰룩했다.
  • “보아하니 주설화 씨가 저한테 아주 큰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 허허!
  • 그녀가 담우석을 오해한 게 확실한 거야?
  • 이 남자, 이대로 부인이라도 하려는 건가?
  • “주설화 씨랑 이안이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가짜인 건 아니죠?”
  • “당연하죠!”
  • “저한테 다른 의도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 “있을 리가 없어요.”
  • 주설화는 매우 단호하면서도 꾸밈없는 태도로 담우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담우석은 그저 눈썹을 치켜 올릴 뿐이었다.
  • “주설화 씨가 그리도 확신에 차있고 또 이안이가 믿고 있는 친구라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오피스텔 키는 동휘가 전달할 거예요. 계속 사양하면 상처를 받는 건 이안일 거예요.”
  • 담우석은 데스크 앞으로 돌아간 뒤 덤덤함을 회복했다. 그는 다시금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주설화의 거절과 방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을 비췄다.
  • 주설화는 잠시 멈칫하다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 “감사합니다 담우석 삼촌. 이만 가볼게요.”
  • 깍듯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 봐서 주설화는 정말로 그를 연장자로 대하는 듯했다.
  • 사실, 그녀가 너무 민감한 탓일 수도 있다.
  • 그녀는 당당한 마음이었고 담이안, 그리고 담 씨 가문에 대해서도 그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한 목적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일수록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게 되었던 탓에 담우석이 그녀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또 어쩌면 그녀가 담우석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사실일지도 모른다.
  • 주설화는 살짝 마음이 괴로운 상태였다. 그녀는 지레짐작으로 너그러운 그의 아량을 가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점에서는 그녀가 담우석에게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사과를 해야 하나?
  • “설화야, 키 받았어?”
  • 담이안이 어느새 올라와 있었고 멍 때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담이안은 입을 열어 질문을 건넸다.
  • “왜 그래?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 “음…아무것도 아니야.”
  • 이때 서동휘가 키를 들고 나타났고 담이안은 웃으며 키를 건네받았다.
  • “고마워요. 동휘 오빠. 삼촌한테 저는 간다고 얘기 좀 해주세요. 방해 안 하고 싶어서요.”
  • 그녀는 주설화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떴고 곧장 그들이 말했던 오피스텔로 향했다.
  • 그런데 오피스텔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주설화는 “오피스텔”이란 단어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게 되었다.
  • 120평에 정교한 인테리어, 가구와 가전이 전부 구비되어 있는 집안은 시야마저 확 트여있었다. 심지어 단지 내는 안전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집을 오피스텔이라고 한다고?
  • 서울에서는 거의 호화 주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 “어때?”
  • 주설화는 헤벌쭉 웃었다.
  • “DC 그룹 직원 복지가 너무 좋은 거 아니야? 혹시 사람 더 안 구해? 나 지원할래!”
  •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는 잡심부름 정도 밖에 못 해. 근데 이 오피스텔 진짜 괜찮네. 나도 몰랐어. DC 그룹에 이렇게 좋은 직원 복지가 있었구나. 아무튼 넌 여기서 지내면 되는 거야. 난 너무 맘에 들어. 월세는 40만 원이야. 흥정은 사절이고. 돈 얘기 하면 감정 상하니까.”
  • 주설화는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연기력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담이안을 안아주었다.
  • “담이안 아가씨, 나 진짜 땡잡았나 봐. 소인 이번 생은 망해서 아가씨 은혜에 갚을 능력이 못 돼요. 다음 생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 “퉤! 다음 생 같은 소리 하네. 이번 생에 갚는 걸로 해.”
  • “어떻게 갚을까? 말만 하세요. 소가 되고 말이 될게. 물론 몸은 안 팔 거야.”
  • “안돼. 몸도 팔아야 돼. 가자, 얼른 짐 싸. 오늘 저녁에 바로 널 팔아버릴 거니까.”
  • *
  • 주설화는 정말로 담이안에게 끌려가 팔리게 되었다.
  • 그녀는 정교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채로 파티장에 가게 되었다.
  • 화려하다는 단어는 주설화가 오버스럽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담이안은 그녀를 확실하게 꾸며주었고 화려한 인형으로 보이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 이 남자를 만나게 했다가 저 남자를 소개하기도 했다.
  • 담이안은 그녀에게 남자를 찾아주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었다.
  • 주설화의 웃음은 점점 더 굳어져가고 있었지만 담이안은 점점 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 “너 연락처 다 뿌려놨으니까 앞으로 친구 많이 만들어 둬.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친구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넌 너무 집순이인 게 문제야. 그 예쁜 껍데기 아끼다 똥 된다?”
  • 주설화는 곧 죽어도 미련 없는 얼굴이었고 눈빛은 암담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담우석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더해지고 있었다.
  • “어머? 삼촌도 와있네. 쯧쯧. 우리 할머니가 보내셨나 봐. 이 파티는-”
  • 선보는 것이 목적인 건가?
  • 주설화의 추측이 맞았다. 그리고 주설화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질문을 해대며 대화를 나누려는 남자를 앞에 두고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이안아, 우리 너희 삼촌한테 인사하러 가자.”
  • 주설화는 담이안을 끌고 담우석 앞으로 다가가더니 얌전하게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삼촌.”
  • 담우석은 담담하게 응했고 내리뜬 눈에는 주설화의 예쁜 쇄골이 들어오게 되었다.
  • 담이안은 친구와 수다 떨러 갔고 주설화는 담우석과 함께 서있었다. 그런 그녀는 속으로 몰래 웃고 있었다.
  • 역시나 담우석 옆은 훨씬 조용했다.
  • 그의 아우라에서 내뿜는 냉기는 아주 좋은 장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