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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성질머리하고는

  • 주설화는 심플한 블랙 롱드레스에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연회장에 나타났다.
  • 그럼에도 빼어난 그녀의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 심지어 적극적으로 다가와 대시하는 남자들도 더러 있었다.
  • 주설화는 기분이 불쾌했다. 장 씨 가문에서 철저히 타인 취급을 당하며 겉도는 친모의 읍소가 아니었다면 연회에 참석하라는 지시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그녀와 어울리지도 않는 연회에 아득바득 보내려 하는 친모의 의도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그냥 단순히 세상 경험이나 쌓으라는 의도였을까.
  • 주설화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 멀거니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또다시 낯선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주설화는 냉랭하게 거절하고서 성큼성큼 베란다로 나갔다.
  • 커튼을 사이에 두고 시끌벅적한 세상과 단절되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 그 순간, 돌연 목뒤에 뜨겁고 축축한 바람이 닿았다. 소름 끼치도록 기분 나쁜 기운에 주설화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음흉하게 눈을 번뜩이는 주름진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 주설화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비껴 섰다. 덕분에 주설화를 끌어안으려다가 허공에 헛손질을 하게 된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 “허허… 설화 씨, 우리 참 기막힌 인연이네! 여기서도 만나고. 이 정도면 천생연분 아닌가!”
  • 사내는 다름 아닌, 문제의 그날 밤에 장 씨 가문에서 주설화에게 소개한 조강이었다.
  •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주설화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야 아귀가 하나 둘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오늘 연회에 기어코 내보낸 것도 결국엔 이런 속셈이었던 것이다.
  • 주설화는 잔뜩 날을 세운 채 경계의 눈초리로 조강을 응시했다. 조강을 빠르게 지나쳐 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 조강이 성큼 다가서더니 주설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 “비켜주세요, 조 사장님.”
  • “허허… 설화 씨, 너무 그렇게 날을 세우지 마. 곧 한 이불을 덮게 될 사이인데 일단 친해져보자고.”
  • “누가 당신이랑 한 이불을 덮게 될 사이라는 거죠? 물러서지 않으면 소리 지를 거예요.”
  • “허허… 지를 테면 질러 봐. 내가 내 약혼녀랑 사랑싸움을 좀 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얘기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나랑 안면 있는 사람들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오히려 설화 씨가 뭐라 하든 아무도 믿지 않을걸? 장 씨 가문에서도 이미 동의한 혼사야. 그러니까 그만 고집부리고 착하게 굴어. 내가 잘할게, 응?”
  • 그렇게 말하며 조강이 팔을 벌리고 주설화에게 달려들었다. 차갑게 웃으며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주설화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조강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 다음 순간, 조강은 다리 사이를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주설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코니에서 빠져나왔다.
  • 장 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연회에 보낸 이유는 저 파렴치한 남자에게 있음이라.
  • 가슴에 찬 바람이 불었다. 주설화는 백휘인을 동정한 자신의 아둔함에 화가 났다.
  • 주설화는 그녀에게 인사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 “주설화, 거기 서.”
  • 등 뒤로 약이 바싹 오른 듯한 장예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주설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하지만 미처 엘리베이터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예원이 불쑥 앞에 나타났다.
  • 장예원은 주설화의 앞을 가로막고서 다짜고짜 손을 들어 올렸다.
  • 가뜩이나 분노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주설화가 똑같은 공격에 두 번이나 당해줄 리 없었다. 주설화는 높이 치켜든 장예원의 손목을 덥석 잡고서 있는 힘껏 뿌리쳤다.
  • 비틀거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잖은 장예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래고래 악을 썼다.
  • “아아악… 이 천한 년이 감히 날 건드려? 이 빌어먹을-”
  • 금지옥엽으로 자란 장예원에게는 처음 겪는 수모였다.
  •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며 주설화의 등 뒤로 돌진한 장예원은 주설화의 긴 머리카락을 덥석 움켜쥐고서 인정사정없이 잡아당겼다.
  • 강렬한 통증에 주설화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서 똑같이 손을 뻗어 장예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남은 손으로 손톱을 세워 장예원의 팔을 마구 할퀴었다.
  •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격렬한 몸싸움에 주변은 일순 아수라장이 되었다.
  • 뒤늦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백휘인과 장지웅이 서로 뒤엉킨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 백휘인은 일의 자초치종을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주설화의 뺨을 휘갈겼다.
  • 주설화를 향한 백휘인의 눈동자에는 실망과 깊은 원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 여러모로 보아도 딸을 바라보는 모친의 눈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 주설화에게서 매몰차게 몸을 돌린 백휘인은 곧장 장예원에게 다가갔다. 이내 어디 다친 곳은 없냐며 전전긍긍하는 제법 애절한 ‘모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복도에는 제법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주설화를 향한 시선들에는 동정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
  • 눈을 내리깔고서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주설화는 이내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당당히 몰려든 인파를 뚫고 나왔다.
  • 발길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한 주설화는 끝내 참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눈가에서만 맴돌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마음을 추스른 주설화는 그제야 코끝을 은은하게 맴도는 것이 담배 냄새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 주설화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고서 몸을 일으켰다. 막 걸음을 내디디려던 찰나,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자로 잰 듯 꼿꼿하고 반듯한 모습이 성숙하고 매력적인 사내였다.
  •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 어디까지 보았지.
  • 궁상맞게 뺨을 맞던 모습도 보았을까.
  • 주설화는 수치스러움에 익사당할 것 같았다.
  • 주설화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검은 눈동자에 주설화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 주설화는 천천히, 힘겹게 걸음을 뗐다.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빨갛게 부은 얼굴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차례차례 훑어내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 주설화는 황급히 옷깃을 움켜쥐며 어색하게 웃었다.
  • “여기서 또 뵙네요.”
  • 담우석의 목울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지만 굳게 다문 입술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 주설화는 괜히 아는 체를 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인 척 지나쳐 가면 될 것을.
  • 체념 섞인 한숨을 내뱉고서 몸을 돌리려던 찰나, 담우석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 “고작 이 정도였어요?”
  • “네?”
  • 주설화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 “뺨을 맞고도 순순히 물러나다니,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냐고요?”
  • 주설화는 그제야 담우석의 목소리에 서린 비아냥과 조롱을 알아챘다.
  • 그 순간, 애써 누르고 눌렀던 설움이 폭발했다. 분노로 끓어오르는 눈동자에는 담우석을 향한 두려움과 불안은 온데간데없었다.
  • “그럼 거기서 제가 어떻게 할까요? 혼자 셋을 상대할까요? 심지어 그중에는 날 낳아준 엄마도 있어요. 내 손으로 엄마를 때릴까요?”
  •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주설화의 목소리에 원망이 가득했다.
  • 가슴에서 차오른 물이 눈에도 고였다.
  • 담우석은 울먹이는 주설화를 고요히 응시했다. 주설화를 오롯이 담은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 “성질머리하고는.”
  • “그쪽이 당해봐요. 화 안 나나.”
  • 그 말에 담우석의 입꼬리가 유려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는 주설화에게 고정된 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 불편할 정도로 집요한 시선에 주설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방금 너무 무례하게 군 것이 아닌가, 뒤늦게 겁이 나기 시작했다.
  • 절친한 친구의 삼촌이면 그녀에게도 손윗사람이었다. 손윗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닐뿐더러 담우석을 대할 때면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그녀를 꿰뚫어볼 듯 날카로운 시선은 늘 주설화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 아주 대놓고 경계하는 사람에게 구태여 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거듭된 우연한 만남에 담우석이 혹여 그녀의 저의를 오해할까 염려스러웠다.
  • “죄, 죄송합니다, 담우석 씨.”
  • 주설화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공손하게 사과했다.
  • 예기치 못한 공손한 자세에 담우석의 짙은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 “죄송합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거예요?”
  • 눈이 있으면 알 거 아냐! 주설화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 “왜 나한테 사과해요? 나한테 사과하면 아무 일 없던 걸로 돼요? 방금 나한테 화풀이하던 것만큼 그쪽을 괴롭힌 사람들한테 돌려주지 그래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기는 건 약자들이나 할 행동입니다.”
  • 담우석은 제 할 말만 하고 쌩하니 주설화를 스쳐 지나갔다.
  • 홀로 남은 주설화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떫은 감을 먹은 것처럼 입안이 썼다.
  • 적막이 감도는 자리에서 그녀를 약자라고 비아냥거리는 담우석의 목소리만이 끊임없이 귓전을 맴돌았다.
  • 가슴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타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야 가까스로 화를 삭인 주설화는 이내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했다. 담우석의 말대로 애초에 화풀이 상대가 잘못되었다.
  • 주설화의 분노가 온전히 겨냥해야 할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들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