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7화 당신에게 주제넘은 생각을 품은 적 없어요

  • 주설화는 호텔로 찾아온 백휘인을 문전 박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번만큼은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것이라 마음을 먹었다.
  • 그러나 주설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휘인은 벌써부터 눈물바람이었다.
  • 백휘인은 온갖 애처로운 표정은 다 지으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늘 주설화한테 죄책감을 갖고 살고 있으며, 자신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 “설화야, 나 그냥 사실대로 말할게. 너한테 소개해 주려 했던 그 조 사장은 사실 지웅 아저씨의 협력사 사장이야. 아저씨도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원래는 장예원을 소개해 주려 했는데, 조 사장이 우연히 네 사진을 보고는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야. 하필이면 우리가 굽신거리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너를 소개해 줬던 거였고.”
  • “허!”
  • 주설화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 “그래서 나를 팔아넘기려 했다 이거야?”
  •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지웅 아저씨가 몸을 뺄 수 있게 될 때까지만 조 사장의 마음을 붙잡아두려고 했던 것뿐이었어. 지웅 아저씨도 이 일 때문에 엄청 미안해하고 있어. 그날 파티에 조 사장도 참석할 줄은 우리도 몰랐어. 우리는 분명 파티에 참석한 젊은 청년들을 너한테 소개해 주려던 거였고 당장 신랑감을 찾으라고 강요하려던 생각도 없었어. 네가 그 청년들과 천천히 알아가며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하필이면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 백휘인은 구구절절 해명을 늘어놓았지만, 주설화는 그녀의 해명을 듣고도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 “말 다 했어?”
  • “설화야, 너도 이젠 엄마가 얼마나 난처한 입장인지 알만 해?”
  • “아니, 모르겠어. 알고 싶지도 않아. 어차피 엄마 스스로 선택한 거 아니야? 12년 전, 나를 버리고 떠난 후로 나 몰라라 하더니 드디어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재벌가에 시집을 갔잖아. 그러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전부 다 엄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거라고. 이제 와서 나한테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하소연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엄마가 늙으면 부양하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 오직 그거 하나뿐이야. 나한테 엄마의 고충까지 함께 감당해야 하는 의무 따위는 없어.”
  • 주설화는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 “나가, 얼른.”
  • 백휘인은 미간을 팍 찌푸렸지만, 자신을 밖으로 내쫓으려는 주설화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호텔을 나서고 차에 올라탄 백휘인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지웅을 보자마자 불만을 터뜨렸다.
  • “나쁜 계집애, 내 말을 듣는 시늉조차 안 해. 그 더러운 성격 어디 가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애당초 목 졸라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 장지웅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런 말은 하지 말고, 그래서 이젠 어떡하려고?”
  • “지웅 씨, 일단 서두르지 말아요. 우리가 너무 조급했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 그냥 조 사장 침대에 눕혔어야 했는데, 그 계획이 실패한 이후로 걔도 경계심이 생긴 거예요.”
  • “근데 조 사장이 마음이 많이 급한 모양이야. 나도 더는 방법이 없어.”
  • 잠시 고민하던 백휘인이 입을 열었다.
  • “지웅 씨, 이 큰 서울에서 우리 회사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조 사장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못된 계집애 얼굴 하나는 반반하니까 언젠가는 우리한테 더 큰돈을 가져다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때 가서 조 사장이 갖고 있는 그 쥐뿔만 한 돈은 쳐다볼 가치도 없을 텐데, 지웅 씨 생각은 어때요?”
  • 장지웅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 “역시 당신이 생각이 깊다니까. 조 사장 쪽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 DC 그룹, 대표 사무실.
  • 서동휘는 주설화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담우석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력을 훑어봤을 때 별다른 수상한 점은 없는 듯했다.
  • “주설화가 아가씨와 접점이 생긴 건 대학교 시절부터였습니다. 딱히 일부러 접근하려는 의도는 없는 듯하고요. 아가씨가 먼저 주설화한테 다가갔으니까요. 그리고 그날 밤, 주설화가 대표님이 머물던 호텔에 나타난 이유는 장가에서 회사 자금 구멍을 메우기 위해 주설화를 조강한테 넘기려는 시도를 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몇 번 더 만났던 것도 그저 우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정말로 그 몇 번이고 거듭해서 발생했던 일들이 전부 우연이라고?
  • 담우석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 그는 우연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이상하리만치 거듭 반복되는 우연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일수록, 오히려 더 문제가 많은 법이다.
  • *
  • 주설화는 온 하루 중개인을 따라 적지 않은 곳을 돌아다니며 집 구경을 했다.
  • 비싼 곳, 싼 곳, 위치가 좋은 곳, 위치가 좋지 않은 곳 등 수많은 집을 돌아다닌 후에야 서울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 하지만 사실 무척이나 간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 돈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 힘든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담이안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얼떨결에 식사 약속이 잡혔다.
  • 약속 장소가 적혀있는 담이안의 문자를 확인한 주설화는 샤워를 하고 간단히 꾸민 다음 집을 나섰다.
  •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 그러나 룸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 “왔어요? 들어와요.”
  • 그곳에는 담이안이 아닌 낯선 젊은 남자 한 명과 주설화가 그토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남자, 담우석이 있었다.
  • 상석에 앉은 담우석은 검은색 눈동자로 주설화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정중함이 묻어있는 듯했다.
  • 그의 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주설화는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 그녀는 끈에 몸이 묶인 듯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자리에 착석했다.
  • 담우석은 주설화가 자리에 앉자마자 곁에 있던 젊은 남자를 소개해 줬다.
  • “원택 씨, 여기는 이안이의 친구인 주설화 씨. 그리고 여기는 SD에서 프로젝트 디렉터를 맡고 있는 원택 씨입니다.”
  • 뭐 하자는 거지?
  • 주설화는 담우석을 힐끔 바라봤지만, 그의 담담한 눈빛에는 차가움만 담겨있을 뿐이었다.
  • 주설화는 불현듯 담우석이 그녀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기로 했던 일이 떠올랐다.
  • 그녀는 지금 당장 밥상을 엎어버리고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없었기에 그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 그리고 곁에 있던 원택은 억지로 화젯거리를 찾으며 그녀에게 말을 붙이곤 했다.
  • 이 소개팅의 주선자인 담우석은 몇 마디 인사치레 후에 자리를 떠나고 당사자인 원택과 주설화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담우석은 가끔 음식을 집어먹기도 하는 것이 당최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그리고 원택은 담우석이 자리에 있는 한, 그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담우석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 결국, 식사가 다 끝나고 원택이 먼저 자리를 비울 때까지 담우석은 쭉 자리를 지켰다.
  • 주설화는 담우석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 이 자리가 끝나면 반드시 담이안에게 따져 물을 거라 마음을 먹은 그녀였다.
  • “별로예요?”
  • 담우석이 대뜸 질문을 던지자 주설화는 들쑥날쑥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 “아니요. 원택 씨는 좋은 분이에요. 하지만 담우석 씨,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직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건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담우석 씨의 귀한 시간, 저는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 무척 정중하고 예의 바른 말속에 어쩐지 알듯 말듯 하게 불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 담우석은 입꼬리를 쓱 올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 “어떤 남자여야 주설화 씨의 마음에 드는 겁니까?”
  •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저는 지금 연애를 하고 싶지 않—”
  • “그럼 저는요?”
  • “…네?”
  • 이번에야말로 주설화는 난생처음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다.
  • 그녀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고 거절 의사를 밝히는 목소리에는 떨림까지 묻어있었다.
  • “담우석 씨, 아니, 담우석 삼촌, 농담하지 마세요. 제발요. 저 맹세컨대 담우석 씨한테 그런 주제넘은 생각을 품은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난번 호텔에서는 정말 누군가가 저한테 약을 탔고 그러다 우연히 담우석 씨와 마주치게 된 것뿐이에요. 저를 도와주신 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정말 우연이었어요. 그리고 담우석 씨는 이안이의 작은 삼촌이니까 저한테는 웃어른입니다. 그러니까 담우석 삼촌, 제발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 담우석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시종일관 주설화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 주시하고 있었다.
  • 그녀가 진심으로 크게 놀란 듯한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담우석은 태연한 기색을 되찾고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 “네, 주설화 씨. 저도 농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