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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담우석 씨 이런 취향이었어요?

  • 다음날, 주설화는 편집장 문희연과 함께 노을 문화를 나섰다. 두 사람은 작품 “천하”의 감독과 투자자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주설화는 이런 식사 자리에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순이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예쁘장한 집순이일 뿐인 그녀였다.
  • 룸 내에 자리한 사람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들은 주설화를 마주했을 때 다소 놀란 모습을 보였다.
  •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니. 재능도 있고 명성도 좋으니 당연히 돈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식사 자리에서 화제의 중심은 늘 주설화를 맴돌고 있었다.
  • 워낙 만나서 친분을 쌓기 위한 자리였던 터라 주설화는 무척 어색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 그녀는 핑계를 대고 룸에서 나왔다. 술을 들이부은 탓에 작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설화는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고 열기가 내린 뒤 어떤 핑계를 대서 자리를 뜰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손에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을 나섰고 문자를 다 보내고 나서 머리를 든 그녀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 그녀가 떠나려던 순간 코너 한 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석 씨, 제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나랑 만나면 안 돼요? 처음 우석 씨를 만난 그날 전 사랑에 빠졌어요. 지금 나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렇다고 해서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나한테 한 번만 기회 주면 안 돼요? 네?”
  • 흐느끼며 호소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 주설화는 만약 자신이 남자였더라면 분명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남자는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했다.
  • “담우석 씨!”
  • 여자의 고함소리에 주설화는 순간 멈칫했다. 같은 순간, 코너에서 걸어 나오는 담우석의 실루엣이 보였고 그 역시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 그와 동시에 한 여자가 그를 쫓아오더니 뒤에서 그를 확 끌어안았다.
  • “당신-”
  • 여자의 호소는 주설화를 보게 됨과 동시에 뚝 그쳤다. 얼굴에 드리워졌던 애틋한 표정과 버벅거리던 모습마저 굳어버렸다.
  • 이토록 조용한 모퉁이는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 사람이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볼 뿐인 몹시 이상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 주설화는 입꼬리를 씰룩하며 그저 행인인 척 덤덤한 표정으로 지나가려 했다.
  • “설화!”
  • 담우석은 갑작스럽게 “설화”라고 뱉어버렸다.
  • 주설화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다.
  • 여자는 놀란 토끼 눈으로 주설화를 쳐다보았고 그 뒤로 눈가에는 냉기가 서리며 탐색의 빛이 어렸다.
  • 그 시각 담우석은 얇은 입술에 곡선을 그리며 여자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주설화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 “설화, 이리 와봐!”
  • 의심할 여지 없이 명령조였다. 하지만 그 명령조 사이에 하필이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 젠장!
  • 주설화는 찰나의 순간 담우석의 음험한 속셈을 알아채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일 듯이 쏘아보는 여자의 시샘 어린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 “허허…허허…”
  • 주설화는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삼촌,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 “삼촌? 그쪽 우석 씨 조카에요?”
  • “어…네.”
  • 담우석의 그윽한 눈매에는 해명하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 “이리 와봐.”
  • “삼촌, 친구들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어서요. 먼저-”
  • 주설화는 자리를 피하는 데 실패했다.
  • 그녀가 가지 않자 담우석이 큰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 주설화는 굳어버린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담우석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은 그녀의 허리춤에 올려졌고 손가락은 알듯 말듯 하게 그녀의 허리를 쓸고 있었다.
  • 얇은 입술에는 일말의 웃음이 번졌고 그 사이로 다소 사악한 기운이 드러나 있었다.
  • “삼-삼…삼촌-”
  • 주설화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담우석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그 장면을 제3자가 봤을 때에는 더 애매한 기류로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왠지 사랑싸움을 하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 뭐 “삼촌”?
  • 금기된 호칭에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더더욱 야릇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졌고 매섭게 주설화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 “담우석 씨, 이런 취향이었어요?”
  • 그의 품에 안긴 여자는 딱 봐도 나이가 어려 보였다. 20대 좌우로 보이는 그녀는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어린 모습에 아름답기까지 했다.
  • 여자는 담우석이 성숙하고 진중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여자를 밝히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담우석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남자였다니.
  • 그녀가 뱉은 말은 몹시 풍자스러웠다.
  • “아니, 아니요. 오해세요. 전-”
  • 담우석은 손에 힘을 실어 주설화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그 고통으로 주설화는 바로 닥쳐버리게 되었다.
  • “진연수 씨, 저 담우석도 남자예요. 연수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진짜 담우석이 아닌 거죠.”
  • 진연수는 눈빛이 어두워지며 이를 깨물었다.
  • “담 씨 가문 사람들도 조카라는 이분을 알고 계세요? 이런 여자가 담 씨 가문 며느리로 가당키나 해요?”
  • “그건 진연수 씨랑 상관없는 일 같은데요.”
  • 난감해하던 진연수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결국 어쩔 도리 없었던 그녀는 돌아서게 되었다.
  • 주설화는 수려한 눈썹을 찌푸린 채 담우석을 깊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어 질책하기도 전에 담우석이 냉랭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를 가두고 있던 커다란 손을 내려놓았다.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섬과 동시에 주위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변해버렸다. 검은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았고 매서워졌다. 방금 전의 애틋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 주설화는 빠른 그의 변화에 얼떨떨했다. 여자보다도 변덕스럽네, 이 남자.
  • “담우석 씨, 당신-”
  • “가봐요.”
  • 담우석은 주설화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제 갈 길을 갔다.
  • 주설화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엽기적인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는 걸로 쳐야지 뭐 별 수 있나. 최대한 빨리 담 씨 가문에서 나와야겠다는 생각만 더 굳히게 되었다. 절대 다시는 담우석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 “설화야, 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거야?”
  • 편집장이 주설화를 찾으러 나왔고 얼떨결에 준수하고 훤칠한 남자에게 시선이 닿게 되었다. 그런 그녀는 살짝 얼떨떨한 모습을 보였다. 그저 이곳의 손님일 것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 주설화의 손을 잡은 그녀는 함께 룸으로 돌아가려 했다.
  • “설화야, 방금 왕 대표가 계속 널 찾았어. 너한테 뜻이 있는 것 같던데. 설화야, 사실-”
  • “언니,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친구가 데리러 왔거든요.”
  • 문희연은 흠칫했다. 주설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담우석의 뒷모습을 향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삼촌, 좀 천천히 가요. 너무 걸음이 빠르잖아요…”
  • 아까는 그가 그녀를 이용했으니 이젠 전세역전이 된 것이다.
  • 담우석은 멈칫했다. 훤칠한 그 실루엣이 뒤로 돌았고 눈꺼풀은 치켜 올려진 모습이었다.
  • 주설화는 마음이 철렁했다. 그녀는 일말의 억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 “언니, 저는 먼저 가볼게요. 안에 계신 분들한테는 대신 잘 좀 얘기해 주세요. 미안해요. 안녕히 계세요.”
  • 말을 끝낸 그녀는 문희연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뜀걸음으로 담우석에게 다가갔다. 그의 앞에 선 그녀는 무고하고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 담우석은 눈가가 반짝였을 뿐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제야 함께 떠났다.
  • 레스토랑 입구에 다다르기까지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 담우석의 차가 도착했고 그가 차에 올라탔지만 차에 시동이 걸리지는 않았다.
  • 주설화가 핸드폰을 꺼내 택시를 부르기 시작하던 그때 차 안에서 담우석의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타요!”
  • “아…괜찮아요. 바로 택시 부르면-”
  • 두 눈이 담우석의 검은 눈가를 마주했을 때 거절의 말들은 전부 목구멍으로 다시 넘어갔다.
  •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차 문을 열어 차에 몸을 실었고 뒷좌석에 올라탄 그녀는 문에 바짝 붙어 최대한 담우석과 거리를 두었다.
  • “어디 가요?”
  • “어…어디든 상관없어요. 편하신 데 내려주세요.”
  • “주소!”
  • 담우석은 박력 있게 주소를 물었다.
  • 주설화는 기어들어가는 낮은 소리로 답했다.
  • “담가로 갈 거예요. 짐 정리해서 호텔로 갈 예정이에요.”
  • 담우석의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 “주설화 씨는 담가에서 지내는 게 불편한가 봐요?”
  • “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다들 저한테 너무 잘해주셔서 고마운 마음이지만 아직 서울에서 한동안은 더 지내게 될 거고 일도 해야 해서요. 어쨌든 불편한 것도 사실이죠.”
  • 담우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금 침묵하기 시작했다.
  • 그 뒤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설화는 담가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마음을 졸이다가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그녀는 얌전하게 웃었고 그대로 담우석의 차가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할 생각이었다.
  • “담우석 씨, 이만 일 보세요. 안녕히 가세요.”
  • “짐 정리해요!”
  • “네?”
  • “호텔로 간다고 했죠?”
  • 주설화는 어리둥절했다.
  • “괜찮아요, 일 보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 담우석은 또 한 번 차가운 눈으로 쏘아 보았다. 주설화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가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게 되었다. 기사가 캐리어를 실은 뒤 차는 다시금 시동이 걸렸다.
  • 차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에서야 주설화는 제대로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금 고마움을 담은 미소를 머금었다.
  • “감사했어요. 오랜 시간 신세를 져서 너무 죄송한 마음이네요. 안녕히 가세요, 담우석 씨.”
  • 빨리 좀 가버려라. 다시는 만나지 말자.
  • 이번에 담우석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유유한 검은 그의 눈동자가 제 몸을 훑는 모습에 그녀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 주설화는 더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안녕히 가세요.”
  • 그렇게 담우석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한 뒤 주설화는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그러다 엄마 백휘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또 한 번 받게 되었다.
  • 이틀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주설화는 그녀가 그리 쉽게 그녀를 놔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했었다.
  • “설화야, 지난번 일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널 급급히 시집보내려 했던 거 말이야. 재벌 가문으로 시집을 가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 엄마가 잘못한 거 알았으니까 사과받아주라. 응? 엄마 용서해 줘.”
  • “사과하는 거 빼고 다른 용건 있어?”
  • “그리고- 너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낯설 텐데. 친구도 없을 거잖아.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네 언니랑 많이 시간을 보내 보는 게 어떨까 싶어. 네 언니도 그랬거든. 너한테 친구를 많이 만들어줄 거라고. 설화야, 이건 좋은 기회야. 예원이가 널 받아들이고 널 그 바닥으로 데리고 들어간다는 건 너한테 아주 유리한 일이야. 모레 저녁에 예원이를 따라 파티에 참석해. 가서 세상 구경 좀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