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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채운 밤

너로 채운 밤

박가린

Last update: 2023-10-07

제1화 담우석

  • 촤악—
  • 차디찬 물이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웠던 몸에 퍼부어지자 주설화는 흐리멍덩했던 정신이 잠시 돌아오는 듯했다.
  •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 보이는 건 그녀가 ‘들러붙었던’ 남자였다.
  • 남자가 벗어둔 외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 흰 셔츠와 검은색 양복바지를 입은 그는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로 그녀 앞에 꼿꼿이 서있었다.
  • 뚜렷한 이목구비는 완벽하게 조각된 예술품 같았고 한 쌍의 검은색 눈동자는 짙게 깔려있는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 “깼나?”
  • 남자의 목소리는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냉혹하게 들렸다.
  • 그의 조롱 섞인 차가운 시선 속에, 주설화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견디기 힘든 민망함으로 점철된 사과뿐이었다.
  • “죄송해요—”
  •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를 보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를 맞이했던 건 절절한 모성애가 아닌, 어머니가 손수 그녀를 변태 영감탱이의 침대 위로 떠미는 참극이었다.
  • 그걸 위해 제 딸한테 약물을 투여하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다니…
  • 주설화는 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상태로 한 남자를 덥석 잡았다.
  • 만약 이 남자가 여색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을 것이다.
  • 그녀는 비통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욕조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 베이지색의 치마는 물에 푹 젖은 채 몸에 바싹 달라붙어 무척이나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담우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 몸 옆으로 늘어뜨린 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 이 여자, 정말 원하지 않았던 거 맞나?
  • “대표님.”
  • 욕실 밖에서 서동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옷도 준비되었습니다.”
  • 주설화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 “고맙습니다. 제가 큰 민폐를 끼쳤네요.”
  • 그녀는 별다른 해석을 하지 않았다.
  • 어차피 낯선 사람이었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아봤자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 그녀가 사실은 다른 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오해 말이다.
  • 남자의 눈빛에 그녀를 향한 추측과 조롱이 담겨있다는 것쯤은 주설화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 담우석이 뒤돌아서 욕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여의사 한 명이 욕실에 들어섰다.
  • 갈아입을 옷을 옆에 놓아둔 그녀는 주설화에게 주사를 놓아주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 옷을 갈아입은 주설화가 여전히 허약한 몸을 이끌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이미 모두가 자리를 비운 후였다.
  • 문득, 자조 섞인 비소가 흘러나왔다.
  • 떠나지 않으면 뭐 그녀가 더 들러붙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겠어?
  • 주설화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 다음날, 그녀는 택시를 타고 장가로 돌아갔다.
  •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아직 그녀의 물건이 그 집안에 남아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 그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화기애애했던 집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 “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와?”
  •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주설화의 ‘의붓언니’인 장예원이었다.
  • “내 물건 챙기러.”
  • 그녀는 쌀쌀맞은 태도로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향했다.
  • 하지만 그녀를 쉽게 놓아줄 장예원이 아니었다.
  • 주설화의 앞을 가로막은 장예원은 그대로 손을 뻗어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 미처 피할 겨를 없이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은 주설화는 화가 치밀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 그러나 장예원은 오히려 기고만장한 태도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 “주제 파악 좀 해, 넌 도대체 뭐 하는 애야? 어젯밤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였는데 감히 제멋대로 사라져? 너한테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는 자리였어!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네가 우리 장 씨 가문에 얼마나 큰 민폐를 끼쳤는지 알기나 해? 네가 갑자기 도망을 치는 바람에 우리가 얼마나 개망신을 당했는지 아냐고!”
  • 주설화는 얼얼한 뺨을 부여잡고 차갑게 반박했다.
  • “그렇게 중요한 남자였으면 네가 직접 갖지 그래?”
  • 오십이 넘은 그 남자는 기름진 몸뚱이에 머리도 절반 벗겨진 데다 눈빛마저 역겨웠다.
  • 그런 남자를 장예원이 견딜 수가 있겠는가.
  • “너—”
  • 말문이 턱 막힌 장예원이 또다시 날뛰려고 하는 순간, 장지웅이 나타나 그녀의 입을 막았다.
  • “예원아, 한집 식구끼리 왜 흥분하고 그러냐.”
  • 장지웅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주설화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 “설화야, 우린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 조 사장은 능력도 있는 데다 미혼이잖니, 남자는 나이가 많아야 제 여자를 아낄 줄 알아. 조 씨네 가문에 시집을 가면 넌 한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거다. 너의 엄마는 맨날 너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니, 우리도 너한테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에 좋은 남자를 소개해 주려던 거였어.”
  • 주설화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장지웅과 친모 백휘인을 바라봤다.
  • “필요 없습니다.”
  •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갖고 왔던 캐리어를 챙겼다.
  • 어제 서울에 도착해 백휘인을 만나자마자 호텔로 끌려가 강제로 식사를 했던 그녀는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한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 방으로 들어온 백휘인은 딸의 손을 잡고 잔뜩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 “엄마도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한평생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잖니? 이렇게 예쁜데,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지.”
  • 주설화는 백휘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나를 버리고 12년 동안 나 몰라라 한 이유가 이거였어?”
  • “난—”
  • 주설화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 장가네 사람들은 주설화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딱히 만류하지 않았다.
  • 주설화가 떠나고 장지웅과 장예원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백휘인은 위로하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어제는 우리가 좀 경솔했어요. 어차피 설화가 내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 일은 다시 천천히 계획하자고요.”
  • 장예원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 “백휘인, 당신이 직접 말한 거야. 근데 당신은 진심으로 당신 딸이 아깝지 않은 거야?”
  • “예원아, 난 내 딸이 아깝지 않은 게 아니라 너의 아버지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지웅 씨, 난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 집을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하는 거예요. 당신은 내 마음 알겠죠?”
  • 장지웅은 백휘인의 어깨를 그러안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그럼, 알고말고.”
  • 주설화는 잠시 머물 호텔을 찾기 위해 콜택시를 불렀다.
  • 하지만 호텔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의 절친인 담이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 “서울에 왔는데도 나한테 연락을 안 해? 그러고도 네가 친구야? 너 지금 어디야?”
  • 주설화는 차갑게 굳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씩 녹는 듯했다.
  • “지금 호텔로 가는 길인데…”
  • “웬 호텔? 그냥 우리 집에서 지내.”
  • “그건 좀 불편해. 난—”
  • “거절은 거절이야. 내 말 들어. 지금 당장 택시 기사한테 말해서 금성 빌딩으로 가라고 해.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일단 밥부터 먹자.”
  • 담이안은 늘 제멋대로였다.
  • 주설화는 전화를 끊고 어쩔 수 없이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바꿀 것을 요청했다.
  • 택시에서 내린 주설화는 캐리어를 끌고 금성 빌딩 아래 그늘진 곳에서 담이안이 오기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봤다.
  •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멀리에서 여전히 셔츠에 양복바지 차림인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겉멋 하나 부리지 않았지만, 타고난 아우라가 풍기는 사람이었다.
  •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던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뒤를 따르지 않고 조용히 눈으로 배웅했다.
  • 수행기사가 차 문을 열었다.
  • 남자는 차에 올라타기 전에 불현듯 시선을 옮겨 주설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미처 반응하지 못한 주설화는 순간 흠칫하더니 민망함에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 차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지만, 담우석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창문 너머에 있는 주설화를 지그시 응시했다.
  •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시선을 거뒀다.
  • 잠시 후, 담우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 “서동휘, 저 여자에 대해서 알아봐.”
  • 서동휘는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 여자가 제 발로 찾아와 품에 안기는 일이라니, 백 번 양보해서 처음은 우연이라 쳐도 또다시 여기에서 재회한다고?
  • 세상에 이리도 공교로운 일이 두 번씩이나 발생할 수가 있을까?
  • 그들은 우연의 일치라는 말 따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