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진심으로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려던 거였다면 왜 담우석은 위압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걸까?
반대로 그 뜻이 없었던 거라면 왜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드는 걸까?
주설화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보 끝자락을 꼼지락거리며 잡아뜯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로 각종 추측을 펼쳐 보았지만 끝까지 담우석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담우석은 한 손에 담배를 끼우고 다른 한 손의 기다란 손가락은 테이블 끝자락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윽한 그의 검은 눈망울은 살짝 닫히면서 빛이 무심코 새어 나왔다. 그는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 낮은 톤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형 씨 별로예요?”
주설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담우석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흑요석같이 으늑한 눈동자에 빠져들기 전 재빨리 시선을 피해버렸다.
“좋아하고 말고를 결정하려면 한 번 만나는 거로는 부족하죠.”
담우석은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였고 연기를 내뱉은 뒤로 목소리는 나른해져 있었다.
“주형 씨랑 더 만나보고 싶다는 건가?”
“아니에요!”
주설화는 곧바로 부인했다. 이어 용기를 북돋기라도 한 듯 담우석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삼촌, 저 요즘 일 때문에 꽤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사실 바쁘신 와중에 굳이 짬을 내가면서 저한테 친구를 소개해 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이러한 일들은 이안이가 조성한 상황이라는 거 알고 계실 거예요. 돌아가서 제가 이안이한테 단단히 얘기해둘게요. 더 이상 삼촌 시간 뺏는 일 없을 거예요.”
“왕진의 구애 때문에 다 필요 없어진 건가?”
담우석의 얼굴은 다소 차가웠다. 준수한 이목구비에도 응축이 한 층 더해진 모습이었다.
“네?”
주설화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아니에요. 왕 대표님 그분은 저의 작품 투자자세요. 그분…한테 저는 마음 없어요. 삼촌이 오해하신 거예요. 그리고 사실 전 그냥 시나리오를 쓰는 역할일 뿐이라서 왕 대표님과 접촉할 일이 거의 없어요. 지난번에는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고요.”
주설화는 말을 끝내고 나서 제 한바탕 설명이 괜한 짓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담우석이 그녀의 교제 상황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왕진 그 사람 와이프 있어요.”
그가 갑작스럽게 뱉은 한마디에서 주설화는 그 뜻을 캐치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전 왕 대표님한테 정말로 마음 없어요.”
“그래요. 다 먹었어요? 이만 갑시다!”
주설화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담우석을 따라나섰다.
그녀는 담우석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설화는 떠나기 직전 성실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구 같은 그녀의 눈에는 감동이 어린 모습도 보였다.
“삼촌이 저 걱정해 주신 거 잘 알고 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걱정 마세요. 전 함부로 아무나 만나는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요즘 일로 바쁘게 보내고 있어서 연애 계획 같은 것도 없어요. 제가 왕 대표님한테 사기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 아는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럴 리 없을 거예요. 이안이라는 좋은 친구에 삼촌 같은 연장자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으로 다가오네요. 앞으로 제가 정말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됐을 때 괜찮으시다면 한 번 봐주실래요?”
주설화의 한바탕 발언은 전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온 말들이었다.
하지만 담우석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는 여자의 기대 어린 미소에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나한테 봐달라고 한 거예요?”
“네, 연장자시니까요. 음…원하지 않으신다면 전…”
“그래요. 알겠어요.”
담우석은 그녀의 말에 응한 셈이었다. 주설화는 기쁜 마음에 반달 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주설화는 똑같이 집에 박혀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그렇게 전부 마무리를 짓고 나서 감독과 총괄 각본가에게 전송까지 마쳤다.
만약 큰 문제가 없다면 그녀는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답답한 시간을 보낸 주설화는 제대로 휴가를 갖기로 결정했다. 열심히 한바탕 꾸민 그녀는 담이안과 약속을 잡을 생각으로 전화를 걸었다.
“잘 됐다. 마침 너 부르려던 참이었어 설화야. 근데 또 네 일에 방해가 될까 봐 망설였는데 진짜 잘 됐어. 일도 다 끝냈다고 하니까 이따 삼촌한테 가는 길에 너 데려오라고 할게. 우리 서울 외곽에 있는 리조트에서 피서도 할 겸 같이 놀자. 나는 친구 몇 명 데리고 가고 있으니까 그쪽에 도착하면 모이는 걸로 해.”
말을 끝낸 뒤 그녀는 주설화에게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담우석이 주설화를 태웠다.
“삼촌, 오랜만이네요.”
주설화는 오늘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 길고 새하얀 두 다리는 꼿꼿한 모습이었고 머리는 반묶음으로 된 똥머리였다. 얼굴에는 연한 화장이 되어있는 듯했고 입술은 촉촉했다. 초롱초롱한 눈에서는 영롱한 빛이 반짝였다.
담우석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긴 다리를 눈으로 힐끗 스치고 난 뒤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오랜만이네요 설화 씨.”
잠시 동안의 침묵 뒤로 주설화는 어색함을 풀기 위해 화젯거리를 찾았다.
“담우석 삼촌, 설화 씨라고 하지 마시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연장자분들은 다들 저한테 설화라고 하니까 삼촌도 그냥 편하게 설화라고 부르세요.”
담우석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입을 열었고 혀끝이 이를 쓸었으며 몸은 주설화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제야 그녀의 호칭을 담은 낮은 톤의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