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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담우석 삼촌은 좋은 어른

  • 만약 진심으로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려던 거였다면 왜 담우석은 위압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걸까?
  • 반대로 그 뜻이 없었던 거라면 왜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드는 걸까?
  • 주설화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보 끝자락을 꼼지락거리며 잡아뜯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로 각종 추측을 펼쳐 보았지만 끝까지 담우석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 담우석은 한 손에 담배를 끼우고 다른 한 손의 기다란 손가락은 테이블 끝자락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윽한 그의 검은 눈망울은 살짝 닫히면서 빛이 무심코 새어 나왔다. 그는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 낮은 톤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주형 씨 별로예요?”
  • 주설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담우석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흑요석같이 으늑한 눈동자에 빠져들기 전 재빨리 시선을 피해버렸다.
  • “좋아하고 말고를 결정하려면 한 번 만나는 거로는 부족하죠.”
  • 담우석은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였고 연기를 내뱉은 뒤로 목소리는 나른해져 있었다.
  • “주형 씨랑 더 만나보고 싶다는 건가?”
  • “아니에요!”
  • 주설화는 곧바로 부인했다. 이어 용기를 북돋기라도 한 듯 담우석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삼촌, 저 요즘 일 때문에 꽤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사실 바쁘신 와중에 굳이 짬을 내가면서 저한테 친구를 소개해 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이러한 일들은 이안이가 조성한 상황이라는 거 알고 계실 거예요. 돌아가서 제가 이안이한테 단단히 얘기해둘게요. 더 이상 삼촌 시간 뺏는 일 없을 거예요.”
  • “왕진의 구애 때문에 다 필요 없어진 건가?”
  • 담우석의 얼굴은 다소 차가웠다. 준수한 이목구비에도 응축이 한 층 더해진 모습이었다.
  • “네?”
  • 주설화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 “아니에요. 왕 대표님 그분은 저의 작품 투자자세요. 그분…한테 저는 마음 없어요. 삼촌이 오해하신 거예요. 그리고 사실 전 그냥 시나리오를 쓰는 역할일 뿐이라서 왕 대표님과 접촉할 일이 거의 없어요. 지난번에는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고요.”
  • 주설화는 말을 끝내고 나서 제 한바탕 설명이 괜한 짓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 담우석이 그녀의 교제 상황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 “왕진 그 사람 와이프 있어요.”
  • 그가 갑작스럽게 뱉은 한마디에서 주설화는 그 뜻을 캐치할 수 있었다.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전 왕 대표님한테 정말로 마음 없어요.”
  • “그래요. 다 먹었어요? 이만 갑시다!”
  • 주설화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담우석을 따라나섰다.
  • 그녀는 담우석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 주설화는 떠나기 직전 성실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구 같은 그녀의 눈에는 감동이 어린 모습도 보였다.
  • “삼촌이 저 걱정해 주신 거 잘 알고 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걱정 마세요. 전 함부로 아무나 만나는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요즘 일로 바쁘게 보내고 있어서 연애 계획 같은 것도 없어요. 제가 왕 대표님한테 사기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 아는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럴 리 없을 거예요. 이안이라는 좋은 친구에 삼촌 같은 연장자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으로 다가오네요. 앞으로 제가 정말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됐을 때 괜찮으시다면 한 번 봐주실래요?”
  • 주설화의 한바탕 발언은 전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온 말들이었다.
  • 하지만 담우석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는 여자의 기대 어린 미소에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 “나한테 봐달라고 한 거예요?”
  • “네, 연장자시니까요. 음…원하지 않으신다면 전…”
  • “그래요. 알겠어요.”
  • 담우석은 그녀의 말에 응한 셈이었다. 주설화는 기쁜 마음에 반달 웃음을 지었다.
  • 그 뒤로 한참 동안 주설화는 똑같이 집에 박혀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그렇게 전부 마무리를 짓고 나서 감독과 총괄 각본가에게 전송까지 마쳤다.
  • 만약 큰 문제가 없다면 그녀는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 오래도록 답답한 시간을 보낸 주설화는 제대로 휴가를 갖기로 결정했다. 열심히 한바탕 꾸민 그녀는 담이안과 약속을 잡을 생각으로 전화를 걸었다.
  • “잘 됐다. 마침 너 부르려던 참이었어 설화야. 근데 또 네 일에 방해가 될까 봐 망설였는데 진짜 잘 됐어. 일도 다 끝냈다고 하니까 이따 삼촌한테 가는 길에 너 데려오라고 할게. 우리 서울 외곽에 있는 리조트에서 피서도 할 겸 같이 놀자. 나는 친구 몇 명 데리고 가고 있으니까 그쪽에 도착하면 모이는 걸로 해.”
  • 말을 끝낸 뒤 그녀는 주설화에게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 그녀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담우석이 주설화를 태웠다.
  • “삼촌, 오랜만이네요.”
  • 주설화는 오늘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 길고 새하얀 두 다리는 꼿꼿한 모습이었고 머리는 반묶음으로 된 똥머리였다. 얼굴에는 연한 화장이 되어있는 듯했고 입술은 촉촉했다. 초롱초롱한 눈에서는 영롱한 빛이 반짝였다.
  • 담우석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긴 다리를 눈으로 힐끗 스치고 난 뒤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 “오랜만이네요 설화 씨.”
  • 잠시 동안의 침묵 뒤로 주설화는 어색함을 풀기 위해 화젯거리를 찾았다.
  • “담우석 삼촌, 설화 씨라고 하지 마시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연장자분들은 다들 저한테 설화라고 하니까 삼촌도 그냥 편하게 설화라고 부르세요.”
  • 담우석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입을 열었고 혀끝이 이를 쓸었으며 몸은 주설화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제야 그녀의 호칭을 담은 낮은 톤의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 “설화!”
  • 주설화는 그의 부름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리고 통제를 잃은 귀는 빨갛게 달아올랐다.
  • 왜 담우석이 부른 “설화”라는 이름에 색다른 짜릿함이 느껴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