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주설화는 편집장 문희연과 함께 노을 문화를 나섰다. 두 사람은 작품 “천하”의 감독과 투자자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주설화는 이런 식사 자리에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순이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예쁘장한 집순이일 뿐인 그녀였다.
룸 내에 자리한 사람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들은 주설화를 마주했을 때 다소 놀란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니. 재능도 있고 명성도 좋으니 당연히 돈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식사 자리에서 화제의 중심은 늘 주설화를 맴돌고 있었다.
워낙 만나서 친분을 쌓기 위한 자리였던 터라 주설화는 무척 어색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녀는 핑계를 대고 룸에서 나왔다. 술을 들이부은 탓에 작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설화는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고 열기가 내린 뒤 어떤 핑계를 대서 자리를 뜰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을 나섰고 문자를 다 보내고 나서 머리를 든 그녀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녀가 떠나려던 순간 코너 한 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석 씨, 제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나랑 만나면 안 돼요? 처음 우석 씨를 만난 그날 전 사랑에 빠졌어요. 지금 나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렇다고 해서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나한테 한 번만 기회 주면 안 돼요? 네?”
흐느끼며 호소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 주설화는 만약 자신이 남자였더라면 분명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했다.
“담우석 씨!”
여자의 고함소리에 주설화는 순간 멈칫했다. 같은 순간, 코너에서 걸어 나오는 담우석의 실루엣이 보였고 그 역시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 여자가 그를 쫓아오더니 뒤에서 그를 확 끌어안았다.
“당신-”
여자의 호소는 주설화를 보게 됨과 동시에 뚝 그쳤다. 얼굴에 드리워졌던 애틋한 표정과 버벅거리던 모습마저 굳어버렸다.
이토록 조용한 모퉁이는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 사람이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볼 뿐인 몹시 이상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주설화는 입꼬리를 씰룩하며 그저 행인인 척 덤덤한 표정으로 지나가려 했다.
“설화!”
담우석은 갑작스럽게 “설화”라고 뱉어버렸다.
주설화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다.
여자는 놀란 토끼 눈으로 주설화를 쳐다보았고 그 뒤로 눈가에는 냉기가 서리며 탐색의 빛이 어렸다.
그 시각 담우석은 얇은 입술에 곡선을 그리며 여자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주설화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 이리 와봐!”
의심할 여지 없이 명령조였다. 하지만 그 명령조 사이에 하필이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젠장!
주설화는 찰나의 순간 담우석의 음험한 속셈을 알아채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일 듯이 쏘아보는 여자의 시샘 어린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허…허허…”
주설화는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삼촌,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삼촌? 그쪽 우석 씨 조카에요?”
“어…네.”
담우석의 그윽한 눈매에는 해명하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리 와봐.”
“삼촌, 친구들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어서요. 먼저-”
주설화는 자리를 피하는 데 실패했다.
그녀가 가지 않자 담우석이 큰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설화는 굳어버린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담우석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은 그녀의 허리춤에 올려졌고 손가락은 알듯 말듯 하게 그녀의 허리를 쓸고 있었다.
얇은 입술에는 일말의 웃음이 번졌고 그 사이로 다소 사악한 기운이 드러나 있었다.
“삼-삼…삼촌-”
주설화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담우석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그 장면을 제3자가 봤을 때에는 더 애매한 기류로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왠지 사랑싸움을 하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뭐 “삼촌”?
금기된 호칭에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더더욱 야릇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졌고 매섭게 주설화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담우석 씨, 이런 취향이었어요?”
그의 품에 안긴 여자는 딱 봐도 나이가 어려 보였다. 20대 좌우로 보이는 그녀는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어린 모습에 아름답기까지 했다.
여자는 담우석이 성숙하고 진중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여자를 밝히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담우석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남자였다니.
그녀가 뱉은 말은 몹시 풍자스러웠다.
“아니, 아니요. 오해세요. 전-”
담우석은 손에 힘을 실어 주설화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그 고통으로 주설화는 바로 닥쳐버리게 되었다.
“진연수 씨, 저 담우석도 남자예요. 연수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진짜 담우석이 아닌 거죠.”
진연수는 눈빛이 어두워지며 이를 깨물었다.
“담 씨 가문 사람들도 조카라는 이분을 알고 계세요? 이런 여자가 담 씨 가문 며느리로 가당키나 해요?”
“그건 진연수 씨랑 상관없는 일 같은데요.”
난감해하던 진연수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결국 어쩔 도리 없었던 그녀는 돌아서게 되었다.
주설화는 수려한 눈썹을 찌푸린 채 담우석을 깊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어 질책하기도 전에 담우석이 냉랭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를 가두고 있던 커다란 손을 내려놓았다.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섬과 동시에 주위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변해버렸다. 검은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았고 매서워졌다. 방금 전의 애틋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주설화는 빠른 그의 변화에 얼떨떨했다. 여자보다도 변덕스럽네, 이 남자.
“담우석 씨, 당신-”
“가봐요.”
담우석은 주설화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제 갈 길을 갔다.
주설화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엽기적인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는 걸로 쳐야지 뭐 별 수 있나. 최대한 빨리 담 씨 가문에서 나와야겠다는 생각만 더 굳히게 되었다. 절대 다시는 담우석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설화야, 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거야?”
편집장이 주설화를 찾으러 나왔고 얼떨결에 준수하고 훤칠한 남자에게 시선이 닿게 되었다. 그런 그녀는 살짝 얼떨떨한 모습을 보였다. 그저 이곳의 손님일 것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주설화의 손을 잡은 그녀는 함께 룸으로 돌아가려 했다.
“설화야, 방금 왕 대표가 계속 널 찾았어. 너한테 뜻이 있는 것 같던데. 설화야, 사실-”
“언니,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친구가 데리러 왔거든요.”
문희연은 흠칫했다. 주설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담우석의 뒷모습을 향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삼촌, 좀 천천히 가요. 너무 걸음이 빠르잖아요…”
아까는 그가 그녀를 이용했으니 이젠 전세역전이 된 것이다.
담우석은 멈칫했다. 훤칠한 그 실루엣이 뒤로 돌았고 눈꺼풀은 치켜 올려진 모습이었다.
주설화는 마음이 철렁했다. 그녀는 일말의 억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저는 먼저 가볼게요. 안에 계신 분들한테는 대신 잘 좀 얘기해 주세요. 미안해요. 안녕히 계세요.”
말을 끝낸 그녀는 문희연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뜀걸음으로 담우석에게 다가갔다. 그의 앞에 선 그녀는 무고하고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담우석은 눈가가 반짝였을 뿐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제야 함께 떠났다.
레스토랑 입구에 다다르기까지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담우석의 차가 도착했고 그가 차에 올라탔지만 차에 시동이 걸리지는 않았다.
주설화가 핸드폰을 꺼내 택시를 부르기 시작하던 그때 차 안에서 담우석의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타요!”
“아…괜찮아요. 바로 택시 부르면-”
두 눈이 담우석의 검은 눈가를 마주했을 때 거절의 말들은 전부 목구멍으로 다시 넘어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차 문을 열어 차에 몸을 실었고 뒷좌석에 올라탄 그녀는 문에 바짝 붙어 최대한 담우석과 거리를 두었다.
“어디 가요?”
“어…어디든 상관없어요. 편하신 데 내려주세요.”
“주소!”
담우석은 박력 있게 주소를 물었다.
주설화는 기어들어가는 낮은 소리로 답했다.
“담가로 갈 거예요. 짐 정리해서 호텔로 갈 예정이에요.”
담우석의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주설화 씨는 담가에서 지내는 게 불편한가 봐요?”
“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다들 저한테 너무 잘해주셔서 고마운 마음이지만 아직 서울에서 한동안은 더 지내게 될 거고 일도 해야 해서요. 어쨌든 불편한 것도 사실이죠.”
담우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금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설화는 담가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마음을 졸이다가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얌전하게 웃었고 그대로 담우석의 차가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할 생각이었다.
“담우석 씨, 이만 일 보세요. 안녕히 가세요.”
“짐 정리해요!”
“네?”
“호텔로 간다고 했죠?”
주설화는 어리둥절했다.
“괜찮아요, 일 보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담우석은 또 한 번 차가운 눈으로 쏘아 보았다. 주설화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가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게 되었다. 기사가 캐리어를 실은 뒤 차는 다시금 시동이 걸렸다.
차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에서야 주설화는 제대로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금 고마움을 담은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했어요. 오랜 시간 신세를 져서 너무 죄송한 마음이네요. 안녕히 가세요, 담우석 씨.”
빨리 좀 가버려라. 다시는 만나지 말자.
이번에 담우석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유유한 검은 그의 눈동자가 제 몸을 훑는 모습에 그녀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주설화는 더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담우석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한 뒤 주설화는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그러다 엄마 백휘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또 한 번 받게 되었다.
이틀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주설화는 그녀가 그리 쉽게 그녀를 놔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했었다.
“설화야, 지난번 일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널 급급히 시집보내려 했던 거 말이야. 재벌 가문으로 시집을 가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 엄마가 잘못한 거 알았으니까 사과받아주라. 응? 엄마 용서해 줘.”
“사과하는 거 빼고 다른 용건 있어?”
“그리고- 너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낯설 텐데. 친구도 없을 거잖아.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네 언니랑 많이 시간을 보내 보는 게 어떨까 싶어. 네 언니도 그랬거든. 너한테 친구를 많이 만들어줄 거라고. 설화야, 이건 좋은 기회야. 예원이가 널 받아들이고 널 그 바닥으로 데리고 들어간다는 건 너한테 아주 유리한 일이야. 모레 저녁에 예원이를 따라 파티에 참석해. 가서 세상 구경 좀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