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곧바로 신사답게 뒤로 돌았지만, 여자의 고혹적인 몸매는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고 말았다.
주설화는 서둘러 문 뒤로 숨어 남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채 입을 열었다.
“난… 난 이안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왜 여기에—”
주설화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남자가 도대체 왜 난데없이 담가에 나타났지?
설마 그는 담가의 사람인 건가?
이때, 담이안의 외마디 비명이 문밖에서 전해지며 주설화의 의문에 해답을 제시했다.
“작은 삼촌? 작은 삼촌이 왜 집에 있어?”
뭐? 담이안의 작은 삼촌이라고?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다니.
주설화는 그 순간 너무나도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집에 있으면 안 되나?”
담우석이 문짝을 슥 훑으며 되묻자 담이안은 곧바로 해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가 분명 오늘 작은 삼촌이 소개팅을 하러 간다 했었거든, 아하하… 아, 맞다, 작은 삼촌, 여기는 내 절친 주설화, 두 사람 만난 적 있었나?”
어디 만나기만 했겠어?
담이안은 방 안에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설화야, 여기는 우리 작은 삼촌…”
문 뒤로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주설화가 부끄러워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을 발견한 담이안은 덩달아 민망해져 다급히 뒤돌아서 몸으로 문을 가로막았다.
“저기, 작은 삼촌. 내 친구가 지금 상황이 좀 그러네. 아하하,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담우석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니, 그냥 며칠 전에 출장을 갔다가 네 선물을 샀거든.”
담이안은 그가 건넨 상자를 받고 곧장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담우석 또한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온 담이안은 주설화를 보자마자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주설화는 자신이 비극적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민망한 상황 앞에서 뭐라 더 할 말도 없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이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주설화는 담이안의 옷 스타일이 도무지 적응이 안 되어 갈아입은 옷을 쭈뼛쭈뼛 잡아당겼다.
짧은 끈 나시에 옆이 트인 롱스커트를 입으니 잘록한 허리라인이 훤히 드러났다.
“이건 좀 너무 시원하지 않니?”
“밖이 이렇게 더운데 당연히 시원하게 입어야지. 야, 시끄럽고, 예쁜 몸매는 원래 드러내야 하는 거야. 어차피 남자도 없고 나만 구경하는 건데 뭐 어때?”
주설화는 투덜거리며 되물었다.
“그럼 밖에 있는 네 삼촌은 남자 아니야?”
하지만 담이안은 오히려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남자 맞지, 근데 삼촌이잖아. 너도 똑같이 삼촌이라고 불러야 돼. 어르신이라고, 어르신. 그러니까 괜찮아. 게다가 작은 삼촌이 어떤 여자를 못 만나봤겠어? 삼촌한테 여자는 다 거기서 거기일걸? 무엇보다 넌 꼬맹이잖아. 그리고 삼촌은 지금쯤 이미 집에서 나갔을지도 몰라.”
주설화는 담이안의 성화에 못 이겨 아래층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때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담우석과 맞닥뜨렸다.
주설화는 또다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미 밖으로 나갔다고 하지 않았어?
“작은 삼촌, 가려고?”
담우석의 검은색 눈동자가 주설화를 향하고 그녀의 허리와 트인 치마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를 알듯 말듯 하게 슥 훑고 지나갔다.
주설화는 저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그녀는 담우석을 힐끔 쳐다봤지만, 마치 조금 전의 일은 그녀의 착각이라는 듯 담우석의 눈빛은 오히려 무척이나 담담했다.
집을 나서려던 담우석은 불현듯 마음이 바뀌어 발걸음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긴 다리를 꼬고 나른하게 앉아있는 그를 보며 주설화는 오히려 더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왜 아직도 안 가는 거야?
담이안은 주설화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녀가 낯선 어른을 앞에 두고 긴장하는 것이라 생각해 분위기를 풀어보려 눈치껏 먼저 입을 열었다.
“설화야, 긴장하지 마. 나한테 삼촌이면 너한테도 삼촌인데, 안 그래 작은 삼촌?”
담이안은 담우석을 힐끔 바라보며 팔로 주설화를 툭 쳤다.
“설화야, 그냥 나 따라 작은 삼촌이라 부르면 돼.”
눈썹을 추켜세우던 주설화는 담우석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눈을 내리깔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작은 삼촌.”
담우석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
주설화는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고 담이안도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설화야, 그나저나 이번에는 얼마나 있어야 돼? 너 일 때문에 왔다며.”
“최소 3개월, 반년 정도 걸릴 수도 있고.”
“정말? 꽤 오래 있네? 진짜 잘 됐다. 근데 난 네가 앞으로 쭉 서울에서 지냈으면 좋겠는데, 안 가면 안 돼? 설화야, 일은 어디에서든 다 할 수 있잖아. 나랑 함께 서울에서 지내자, 응? 앞으로 여기에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면 쭉 나랑 함께 있을 수 있잖아.”
담이안은 주설화가 반박하기도 전에 또 뭔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냥 여기에서 결혼하고 애도 낳는 거야. 헤헤, 작은 삼촌, 주위에 좋은 신랑감 많지 않아? 우리 설화한테 소개 좀 시켜줘.”
그 대담한 제안에 주설화는 하마터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담이안이 부탁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부탁을 받은 대상 때문에 말이다.
주설화는 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담우석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고 담우석이 지금쯤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추측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담이안은 주설화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이 일을 반드시 성사시키려는 듯 흥미진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담우석과의 의논을 이어갔다.
“작은 삼촌, 우리 설화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고, 또 얼마나 똑똑한데…”
담이안은 마치 주설화가 친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담우석은 담이안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그 한 쌍의 검은색 눈동자로 단 하나의 거리낌도 없이 마치 심사라도 하듯 주설화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직 자신을 피하는 듯한 주설화의 눈빛과 그녀의 정수리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담우석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주설화 씨의 이상형은 어떻게 되죠?”
“아니요, 아닙니다. 전 아직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담우석 씨.”
“오해?”
담우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담이안이 몇 마디 덧붙이려는 찰나, 주설화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악력이 얼마나 셌던지, 담이안은 순간적인 통증에 고개를 돌려 주설화를 힐끔 쳐다봤다.
만약 담이안이 또다시 헛소리를 했다가는 주설화는 개망신을 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주설화는 서둘러 해명했다.
“전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연애를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담우석 씨, 신경 써주셔서 고맙지만 이안이의 말은 그냥 무시하세요. 전 아직 일에만 몰두하고 싶거든요.”
담이안은 절친의 눈짓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잠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담우석은 입꼬리를 쓱 올리며 대답했다.
“주설화 씨는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사람이니, 당연히 최고의 남자를 골라야겠죠. 주위에 꽤나 괜찮은 신랑감들이 몇 명 있는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약속 한번 잡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