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물이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웠던 몸에 퍼부어지자 주설화는 흐리멍덩했던 정신이 잠시 돌아오는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 보이는 건 그녀가 ‘들러붙었던’ 남자였다.
남자가 벗어둔 외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흰 셔츠와 검은색 양복바지를 입은 그는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로 그녀 앞에 꼿꼿이 서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완벽하게 조각된 예술품 같았고 한 쌍의 검은색 눈동자는 짙게 깔려있는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깼나?”
남자의 목소리는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냉혹하게 들렸다.
그의 조롱 섞인 차가운 시선 속에, 주설화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견디기 힘든 민망함으로 점철된 사과뿐이었다.
“죄송해요—”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를 보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를 맞이했던 건 절절한 모성애가 아닌, 어머니가 손수 그녀를 변태 영감탱이의 침대 위로 떠미는 참극이었다.
그걸 위해 제 딸한테 약물을 투여하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다니…
주설화는 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상태로 한 남자를 덥석 잡았다.
만약 이 남자가 여색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녀는 비통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욕조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베이지색의 치마는 물에 푹 젖은 채 몸에 바싹 달라붙어 무척이나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담우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이 여자, 정말 원하지 않았던 거 맞나?
“대표님.”
욕실 밖에서 서동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옷도 준비되었습니다.”
주설화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큰 민폐를 끼쳤네요.”
그녀는 별다른 해석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낯선 사람이었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아봤자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그녀가 사실은 다른 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오해 말이다.
남자의 눈빛에 그녀를 향한 추측과 조롱이 담겨있다는 것쯤은 주설화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담우석이 뒤돌아서 욕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여의사 한 명이 욕실에 들어섰다.
갈아입을 옷을 옆에 놓아둔 그녀는 주설화에게 주사를 놓아주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옷을 갈아입은 주설화가 여전히 허약한 몸을 이끌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이미 모두가 자리를 비운 후였다.
문득, 자조 섞인 비소가 흘러나왔다.
떠나지 않으면 뭐 그녀가 더 들러붙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겠어?
주설화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다음날, 그녀는 택시를 타고 장가로 돌아갔다.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아직 그녀의 물건이 그 집안에 남아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화기애애했던 집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주설화의 ‘의붓언니’인 장예원이었다.
“내 물건 챙기러.”
그녀는 쌀쌀맞은 태도로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를 쉽게 놓아줄 장예원이 아니었다.
주설화의 앞을 가로막은 장예원은 그대로 손을 뻗어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미처 피할 겨를 없이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은 주설화는 화가 치밀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 장예원은 오히려 기고만장한 태도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주제 파악 좀 해, 넌 도대체 뭐 하는 애야? 어젯밤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였는데 감히 제멋대로 사라져? 너한테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는 자리였어!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네가 우리 장 씨 가문에 얼마나 큰 민폐를 끼쳤는지 알기나 해? 네가 갑자기 도망을 치는 바람에 우리가 얼마나 개망신을 당했는지 아냐고!”
주설화는 얼얼한 뺨을 부여잡고 차갑게 반박했다.
“그렇게 중요한 남자였으면 네가 직접 갖지 그래?”
오십이 넘은 그 남자는 기름진 몸뚱이에 머리도 절반 벗겨진 데다 눈빛마저 역겨웠다.
그런 남자를 장예원이 견딜 수가 있겠는가.
“너—”
말문이 턱 막힌 장예원이 또다시 날뛰려고 하는 순간, 장지웅이 나타나 그녀의 입을 막았다.
“예원아, 한집 식구끼리 왜 흥분하고 그러냐.”
장지웅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주설화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설화야, 우린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 조 사장은 능력도 있는 데다 미혼이잖니, 남자는 나이가 많아야 제 여자를 아낄 줄 알아. 조 씨네 가문에 시집을 가면 넌 한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거다. 너의 엄마는 맨날 너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니, 우리도 너한테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에 좋은 남자를 소개해 주려던 거였어.”
주설화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장지웅과 친모 백휘인을 바라봤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갖고 왔던 캐리어를 챙겼다.
어제 서울에 도착해 백휘인을 만나자마자 호텔로 끌려가 강제로 식사를 했던 그녀는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한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방으로 들어온 백휘인은 딸의 손을 잡고 잔뜩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도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한평생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잖니? 이렇게 예쁜데,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