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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형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 심문한의 눈빛에 소이녕은 온몸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는 예의 바르게 심문한에게 웃어 보인 뒤, 심강운의 휠체어를 밀고 그를 지나쳐 지나가려고 했다.
  • 그러나 그의 옆을 지날 때, 심문한이 팔을 뻗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 “제수씨, 왜 이렇게 급히 들어가려는 거예요? 이 아주버님과 얘기도 하지 않고.”
  • 그는 팔짱을 낀 채, 혐오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심강운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표정과 다르게 다정하기만 했다.
  • “강운아, 네 와이프가 내 눈을 피하는 걸 봐서 너와 결혼한 게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 그는 말을 하면서도 실눈을 뜬 채, 소이녕의 가슴 쪽을 보는 걸 잊지 않았다.
  • 소이녕은 미간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피했다.
  • 그러자 그의 눈빛이 더욱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 “강운아,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서 사람 보는 눈이 어두워졌는지 모르겠지만 형은 사람을 많이 만나 봐서 척 보면 알아. 네 와이프더러 형과 얘기를 좀 오래 나누게 하는 게 어때? 형이 네 와이프의 인품에 대해 파악해 줄게.”
  • 심강운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소이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녀는 시골 출신의 고아였지만 삼촌과 숙모는 그녀를 아주 아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발육이 남달라 몸매가 좋았다.
  • 학교 다닐 때도 남학생들이 이런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강아정이 나서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 하지만 지금 심씨 가문은 심문한의 것이었다.
  • 심강운은 맹인이라 소이녕을 보는 심문한의 시선을 보지 못하기에 소이녕을 형에게 보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소이녕은 생각했다.
  •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심문한이 선을 넘는 짓을 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 소이녕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심강운이 심문한의 ‘부탁’을 거절하기만 기다렸다…
  • 소이녕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 검은 천을 사이 두고도 심강운은 심문한의 응큼한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 “형이 날 이렇게 걱정하는 게 처음인 것 같은데? 지난번 내 약혼녀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형은 ‘죽었으면 죽었지. 그 재수없는 자식과 결혼하느니 죽는 게 낫잖아?’ 라고 한 것 같은데?”
  • 심문한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 “그때는 농담이었고! 강운아, 형은 정말로 네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넌 목소리밖에 듣지 못하지만 형은 네 와이프의…”
  • 그의 시선이 다시 소이녕의 가는 허리에 떨어졌다.
  • “모든 걸 볼 수 있거든.”
  • 그는 더욱 노골적으로 소이녕을 보며 말했다.
  • “그래서 형이 한 번 살펴보는 게 나을 거야.”
  • 소이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심문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걱정으로 가득한 관심 어린 말이었지만 그가 심강운을 보는 시선은 경멸과 비아냥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 ‘내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 “시골에서 상경한 여자일 뿐이니 형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 심강운의 목소리는 느긋하기만 했다.
  • “나 결혼하기 쉬운 몸 아니잖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거라고 해도 받아들이려고. 그리고.”
  • 심강운은 피식 웃었다.
  • “이녕이는 고아야. 재수가 없는 나랑 결혼까지 무사히 마친 걸 보면 내 나쁜 운을 가져가는 액받이가 아니겠어? 만약 형과 얘기를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준다면 형에게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르잖아. 그러면 재미 없지.”
  • 심강운의 끝 말에는 다분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 심문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 그러나 소이녕도 운이 나쁘다는 생각에 그는 뒤로 물러나 고개를 돌렸다. 더는 소이녕을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 그가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나쁘다는 걸 굳이 해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 그의 이런 모습에 심강운은 웃음이 나왔다.
  • “우리 먼저 들어갈게.”
  • 소이녕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급히 휠체어를 밀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 심문한의 옆을 지날 때, 그녀는 엉덩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은 것이다.
  • 역겨운 기분이 든 그녀는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휠체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정원의 한가운데에서 멈출 때까지도 소이녕은 쿵쾅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 그녀는 생애 첫 성희롱을 당하게 한 상대가 남편의 사촌 형이라는 작자일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 그것도 할아버지가 있는 본가 대문에서 말이다.
  • “어디 불편해?”
  • 심강운이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 “아, 아니에요.”
  • 소이녕은 심강운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 방금 그 자리에는 그들 셋밖에 없었다.
  • 심강운에게 말해도 심문한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소이녕은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 오히려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가 괜한 난동을 부린다고 생각하거나 심강운의 사랑을 등에 업고 분란을 만든다고 원망할 수도 있었다.
  • 그래서 그녀는 억울했지만 꾹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목 말라.”
  • 심강운의 목소리에 소이녕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정원에는 다른 고용인이 보이지 않았다.
  • “물 가지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 말을 마친 그녀는 물을 찾으러 저택 안에 들어갔다.
  • 심씨 가문의 본가는 아주 컸다. 그녀가 물컵을 들고 나왔을 때, 심강운은 맹인 휴대폰을 내려놓고 있었다.
  • “여기 너무 크네요.”
  • 그녀는 땀을 훔치며 말했다.
  • 물컵을 받은 심강운은 한 모금 마시고 덤덤하게 물었다.
  • “나와 결혼한 거 후회해?”
  • 소이녕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 그는 앞을 못 보는 장님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불길한 사람이나 그녀에게는 할머니의 치료비를 대준 은인이었다.
  • 은인과 결혼했는데 후회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 공기가 아주 조용해졌다.
  • 한참 뒤, 심강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 “속상한 일 있으면 말해. 난 눈이 멀었지 마음까지 막힌 건 아니야.”
  • 소이녕은 커다란 저택 안을 누비며 물을 찾느라 아까 심문한과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 그녀는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 “우리 이제는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 심강운은 멈칫하다 대답했다.
  • “응.”
  • 본가의 거실에서 심 회장은 심강운의 삼촌 심동욱 부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그들이 들어온 것을 보고 심 회장이 손을 저었다.
  • “이녕아!”
  • “할아버지!”
  • 소이녕은 달콤하게 웃고는 심강운을 밀고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 심 회장은 웃는 얼굴로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참 참한 아이야!”
  • 심동욱은 소이녕을 힐끗 보고 말했다.
  • “아버지가 고르신 사람이니 나쁜 사람일 리 없지요.”
  • 그의 옆에 앉은 아내 황영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 “이녕이 이 아이 때문에 강운이가 아침 일찍 크게 화를 내고 오래 일한 사람을 내보냈대요! 강운이는 성격이 참 좋은 아이였는데 이 계집애를 들인 뒤로 난폭하게 변했으니 별로 좋은 애가 아닌 것 같은데요…”
  • 심 회장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 “강운이는 너무 조용해서 탈이야. 이 아이 때문에 화를 낸다면 나쁜 일도 아니지.”
  • 황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심 회장일 소이녕을 이토록 감쌀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 “할아버지, 삼촌, 안녕하세요!”
  • 소이녕이 활기차게 심강운의 휠체어를 밀고 다가왔다. 그녀는 어른들에게 인사하며 심강운에게 물컵을 건네주었다.
  • “정원이 참 크네요. 한참 걸었지 뭐예요!”
  • 심 회장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강운이가 널 괴롭히지 않던?”
  • 소이녕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저한테 아주 잘해주는걸요.”
  • 황영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 “너한테 잘해주는 건 우리도 알아. 너 때문에 아침 일찍 고용인을 잘랐으니 말이야.”
  • 심강운의 성격이 괴팍하여 황영은 자신의 부하인 장씨 아줌마를 겨우 심강운의 옆에 붙여 두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소이녕에게 밉보여서 잘렸을 줄이야!
  • 소이녕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 “누구를 잘랐는데요?”
  • “숙모님의 뜻은 결혼 첫날에 제 와이프를 모욕한 고용인을 내쫓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 심강운의 차가운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 “이녕이는 착해서 괴롭힘을 당하고도 가만있지만 전 남편이 되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