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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범접할 수 없는 취향을 가졌더라고

  • 별장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 심강운은 테이블 위의 약병들을 훑어보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 “당신은 날 위해 병원에 간 것이었군. 내가 오해했나 보네.”
  • 소이녕은 심강운의 말속에 담긴 비아냥을 느낄 수 있었다.
  • 심강운은 담담하게 옆에 있는 집사를 불렀다.
  • 집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약병을 모두 거두어 갔다.
  • 소이녕은 뜨끔했다.
  • “집사더러 약병을 가져가라고 한 건… 약을 먹기 싫어서예요?”
  • ‘기분이 나빠 보이는데.’
  • 심강운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대답했다.
  • “밥부터 먹지.”
  •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소이녕은 주변의 공기까지 얼어붙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정말 화가 났나 보네.’
  • 소이녕은 긴장한 얼굴로 두 손을 꽉 잡았다.
  • 결혼한 다음날 바로 약을 가져다주는 게 좀 너무한 것 같기도 했다.
  • ‘결혼하자마자 약을 가져다줘서 내가 자신의 장애를 꺼려한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 그녀의 귓가에는 강아정이 말했던 ‘자격지심’이 맴돌았다.
  • 그녀는 괜히 강아정이 원망스러웠다.
  • ‘계집애, 몸에 하자 있는 사람이라 자격지심이 있는 줄 알면서 왜 나더러 약을 가져다주라고 한 거야? 하지만 가져온 내 잘못도 있지.’
  • “밥 먹자고.”
  •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소이녕은 다급히 젓가락을 들고 얌전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 밥 먹는 내내, 소이녕은 가라앉은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 밥을 다 먹은 뒤, 집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 “사모님, 어르신께서 전화로 말씀하셨는데 오늘 도련님과 함께 식사하러 오시랍니다. 수업 끝나고 기사를 보낼 테니 다른 일정을 잡지 마세요.”
  • “네, 알겠어요.”
  • 소이녕은 예의 바르게 방긋 웃어 보였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서 조금의 잡티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말을 마친 그녀는 가방을 멘 채, 심강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저 갈게요!”
  •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집사는 심강운의 뒤에 다가와서 말했다.
  • “약을 연구실로 보냈습니다. 곧 무슨 약인지 결과가 나올 겁니다.”
  • 말을 마친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 “사모님은 다른 생각을 하는 분 같지 않습니다.”
  • 심강운은 그녀가 떠난 방향을 힐끗 보고 말했다.
  • “같이 밥 먹으려고 했던 의사에 대해 알아봐.”
  • 집사가 말했다.
  • “기사가 그러는데 약은 사모님의 친구분이 가져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모님의 친구분이 더 수상한 것 아닌가…”
  •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강운의 몸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분위기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 심강운이 피식 웃고 물었다.
  • “내 와이프와 같이 밥을 먹으려던 남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는데 무슨 문제 있어?”
  • “아… 아닙니다!”
  • *
  • 수업이 끝나 학교에서 나온 소이녕은 바로 대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를 보았다.
  • 대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멋진 롤스로이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 소이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 그녀는 빠른 속도로 기사에게 뛰어갔다.
  • “우리 빨리 가요!”
  •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그녀가 비싼 외제차를 타는 걸 본다면 별별 소문을 다 낼 것이다.
  •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녀가 차를 타는 순간, 창밖으로 같은 학과 유은아의 놀란 눈과 마주쳤다.
  • ‘끝났어…’
  • 소이녕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유은아는 학교의 유명한 입 싼 친구로 그녀가 알았다 하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전교생이 알게 될 것이다.
  • “안전벨트 해.”
  • 소이녕이 어떻게 소문을 잡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 눈에 검은색 비단을 가린 남자가 그녀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 그녀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 “당신이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 ‘어르신 댁으로 밥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었어?’
  • “가는 길이었어.”
  • 남자는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며 덤덤하게 말했다.
  • 그의 모습을 보니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 ‘점심의 일로 화가 아직 안 풀렸나 봐…’
  • 소이녕은 한숨을 푹 내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차가 떠난 지 한참 지나자 소이녕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차는 심씨 본가의 방향이 아닌 그들의 별장으로 가고 있었다.
  •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 “할아버지 댁에 가는 거 아니었어요?”
  • 남자는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 “그렇게 입고 갈 거야?”
  • 그제야 소이녕은 너무 씻어 색이 바랜 청바지와 ‘팜므파탈’이라는 검은색 글자가 쓰여진 흰색 티를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음… 어른 뵙기에는 적절한 옷차림이 아니네.’
  • “그런데 제가 뭘 입고 있는지는 어떻게 아세요?”
  • ‘안 보이는 거 아니었어?’
  • 심강운은 피식 웃고 대답했다.
  • “범접할 수 없는 취향을 가졌더라고.”
  • 소이녕: “…”
  •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반복된 디스를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 그래서 소이녕은 그를 흘겨보았다.
  • 어차피 눈을 흘겨도 그가 모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여러 번 눈을 흘겼다.
  • 실컷 심술을 부린 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밖을 내다보았다.
  • “어차피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 건데 집에서 기다리지, 뭐 하러 나왔어요?”
  • ‘앞이 보이지 않으니 외출이 불편할 거 아니야?’
  • 심강운은 피식 웃고 앞에 앉은 기사를 불렀다.
  • “주 기사.”
  • 곧 차의 가림막이 쳐졌다. 차 안은 두 개의 은폐된 공간으로 나뉘었다.
  • 심강운은 우아하게 서류 하나를 소이녕에게 건네주었다.
  • “이것 좀 봐봐.”
  • 소이녕은 의아한 얼굴로 서류를 펼쳐보았다.
  • 성분 검사 보고서였다.
  • 검사한 품목은 라벨이 없는 약이었다.
  • ‘라벨이 없는 약? 점심에 아정이가 준 약 아니야? 이걸 성분 검사 했다고?’
  • 그녀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몸이 안 좋으니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되겠지. 알러지 같은 게 있으면 큰일이니 말이야. 역시 부자들은 섬세하다니까!’
  • 생각없이 훑어보던 그녀는 검사 결과 쪽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 “으엇!”
  • 검사 결과에 놀라운 게 적혀 있었다.
  • [검사 결과 남성의 생식기 쪽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보입니다. 발기부전과 조루 치료제입니다.]
  • 소이녕: “…”
  • ‘이게 뭐야?’
  • 그녀는 손을 떨다가 저도 모르게 서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 심강운은 위험한 기운이 다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 “당신이 보기에는 내가 그쪽으로 안 되는 남자인가 봐?”
  • “아니… 아니에요…”
  • 소이녕은 당황한 나머지 온전한 말을 할 수 없었다.
  • 강아정이 그녀에게 약을 줄 때만 해도 눈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했었다!
  • 그녀는 자신과 사이가 좋은 강아정이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엿을 먹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 이 약의 기능을 알았다면 그녀는 절대 받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 남자는 팔을 뻗더니 그녀를 들어서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 남자의 몸에서는 위험하면서도 섹시한 기운이 풍겼다.
  • 소이녕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 “저…”
  • “당신은 어제의 첫날밤이 만족스럽지 않았나 보군.”
  • 그는 소이녕의 턱을 들어올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결혼한 바로 다음날에 직접 병원으로 가서 이런 약을 받아온 걸 보니 정성이 갸륵하군.”
  • 검은 비단천이 눈의 위치를 가리고 있자 더더욱 섹시하고 요염한 기운이 풍겼다.
  • 그에게 턱이 잡힌 소이녕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 “저… 전 정말 이 약이 그런 약인 줄 몰랐어요. 전 이 약이 당신의… 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