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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집에 와서 밥 같이 먹어

  • 정신을 차린 소이녕은 허둥거리며 휴대폰을 줍고는 고개를 들고 이천성에게 웃어 보였다.
  • “선배, 여기서 일해요?”
  • 이천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그는 소이녕의 머리를 헝클고 웃으며 말했다.
  • “아직도 이렇게 덜렁거리면 어떡해? 나이가 몇인데?”
  • 소이녕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 “스무 살이에요.”
  • 이천성은 고개를 돌리고 푸흡 웃었다.
  • “병원엔 어쩐 일이야?”
  • 그녀는 뒤에 있는 진료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 “친구가 사촌오빠랑 얘기하고 있어요.”
  • 이천성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 “점심시간인데 친구가 늦으려나 본데. 난 밥 먹으러 가는 길이었어. 같이 갈래?”
  • 소이녕은 잠깐 생각하다가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 강아정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 “가자.”
  • 이천성은 싱긋 웃고 앞에서 걸어갔다. 소이녕은 그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 소이녕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이천성을 좋아했다.
  • 그 해, 할머니가 그녀를 보러 학교에 왔을 때, 병이 발작하여 기절하게 되었다. 그때, 길을 가던 이천성이 뛰어와 응급처치를 하고 할머니를 업고서 병원까지 뛰어갔다.
  • 그날은 유난히 햇살이 눈부셨던 하루였다. 그날 이천성은 병원의 복도에 서서 소이녕에게 자신은 의대 학생이라고, 소이녕에게 할머니의 상황에 따른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 그날 소이녕은 처음으로 한 남자에게 호감이 생겼다.
  • 그래서 그녀도 의대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 그녀는 이천성이 갔던 학교를 지원하고 그가 걸었던 길을 가고 싶었다.
  • 그러나 그 꿈을 이룬 지금, 그녀는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 마지막으로 이천성을 만난 것은 그녀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이천성은 그녀더러 수능 잘 보라고 했었다.
  • 이천성은 소이녕을 깔끔한 음식점으로 데려갔다.
  • “뭐 먹고 싶어?”
  • 하얀 가운을 벗으니 이천성의 인물이 더 사는 것 같았다. 그는 메뉴판을 펼치며 물었다.
  • “넌 단 걸 좋아했던 것 같은데?”
  • “네, 맞아요.”
  • 오랜만에 보는 선배 앞이라 소이녕은 긴장되어 목소리가 떨렸다.
  • 이때,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 소이녕은 사과한 뒤,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 “어디야?”
  •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 “누구시죠…?”
  • “심강운.”
  • “!!! 제 번호 어떻게 안 거예요?”
  •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집에 와서 밥 같이 먹어.”
  • “…”
  • 소이녕은 열심히 메뉴를 고르고 있는 이천성을 힐끔 보고 물었다.
  • “좀… 늦게 돌아가도 돼요?”
  • 오랜만에 선배와 함께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대로 가기 미안했다.
  • 전화 저편에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 “십 분 줄게.”
  • “네.”
  • “남자친구야?”
  • 전화를 끊자 이천성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 “남자친구 아니에요.”
  • 소이녕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남편이에요.”
  • 순간 이천성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 한참 뒤, 그는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 “결혼 벌써 한 거야? 언제?”
  • “…어제요.”
  • 이천성은 가볍게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 “너 결혼한 것도 모르고 선물을 하지 않았네. 이번 식사 한 끼로 너에게 주는 축복이라고 생각해 줘!”
  • 말을 마친 그는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하려고 했다.
  • “아니에요.”
  • 소이녕은 다급히 그를 말렸다.
  • “물만 마시고 갈게요. 남편이 빨리 집으로 와서 밥 먹재요.”
  • 이천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 한참 뒤에 그는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 “사귄 지 얼마나 됐어?”
  • ‘사귄 지?’
  • 소이녕은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 ‘나와 심강운은 사귄 거로 치면 하루 하고도 2시간?’
  • 물론 그는 이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 그래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 “두 달 좀 넘었어요.”
  • 이천성은 피식 웃었다.
  • “그것밖에 안 돼?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 거짓말을 하는 소이녕은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 “네, 첫눈에 반했어요.”
  • 핑크빛 입술이 따뜻한 물과 닿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젯밤 그에게서 받았던 뽀뽀가 떠올랐다.
  • 심강운의 입술은 차갑고 딱딱해 보였지만 막상 닿으니 말랑하고 뜨거웠다…
  • 소녀의 볼에 홍조가 내려앉았다.
  • 이천성은 사랑하는 사람 얘기를 해서 그녀의 얼굴이 상기된 거라고 생각해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 “이녕아!”
  •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르고 있을 때, 강아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네 남편 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얘기 더 할 거야?”
  • 소이녕은 다급히 시계를 보았다. 심강운과 통화했을 때보다 정확히 10분 지나가 있었다.
  • 그래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한 얼굴로 이천성을 바라보았다.
  • “선배,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얘기해요.”
  • 이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조심히 가.”
  • 음식점의 창가에 앉은 그는 소이녕이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며 검은색 BMW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 ‘행복해 보이네.’
  • “이녕아, 이건 우리 사촌오빠가 특별히 준비해준 약인데 네 남편의 눈을 치료할 수 있어.”
  • 차를 타자마자 강아정은 약병 몇 개를 소이녕의 가방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 “네 남편은 몸에 하자가 있어서 자격지심이 들 수 있어. 그래서 만약 네가 이 약을 눈 치료약이라고 준다면 네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넌 이 약이 비타민이라고 말하고 먹여야 돼. 설명서랑 라벨은 다 찢어서 버렸고 복용시간이랑 양은 모두 따로 적어두었어!”
  • “고마워!”
  • 소이녕은 아직도 이천성과 얘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일로 울적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약의 약효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다.
  • 기사는 강아정을 학교 문 앞에 내려다준 뒤, 소이녕을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 크고 황량한 별장 안에 심강운 한 명이 식탁에 마주앉아 있었다. 정오의 햇빛에도 그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쓸쓸한 느낌을 풍겼다.
  •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소이녕은 손을 씻고 뛰어갔다.
  • 의자에 앉은 그녀는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 “손님 왔었어요?”
  • “아니.”
  • 눈에 검은 비단을 두른 남자가 대답했다.
  • “우리 둘밖에 없어.”
  • 소이녕은 놀라서 하려던 말도 잊을 뻔했다.
  • “…우리가 다 먹지 못할 건데요.”
  • “그렇긴 하지.”
  • 심강운은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 “주방장더러 요리를 추가하라고 했어.”
  • “왜요?”
  • 심강운은 젓가락을 든 손을 내려놓더니 피식 웃었다.
  • “혹시 모를 일 때문에. 결혼 두 번째 날에 내 마누라가 다른 남자와 함께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는다? 사람들이 내가 당신을 굶긴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 소이녕: “…”
  • “당신… 제가 방금 전에 음식점에 있었던 걸 알고 있었어요?”
  • 심강운은 계속해서 음식을 집었다.
  • “정말 다른 남자랑 밥 먹으러 갔나 보네.”
  • 소이녕: “…”
  • ‘날 바보로 여기는 건가? 말속에 담긴 가시를 내가 모를 줄 아나?’
  • 그녀는 이렇게 빙빙 둘러 얘기하는 게 싫었다.
  •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 “집의 음식이 맛 없어서 밖에서 먹은 것도 아니고 집에 와서 밥을 먹지 않을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우연히 병원에서 지인을 만난 게 다예요.”
  •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 “병원에는 뭐 하러 갔는데?”
  • 소이녕은 가방에서 강아정이 준 약병을 그의 앞에 내놓으며 말했다.
  • “당신 몸이 안 좋아서 비타민 좀 챙겨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