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할머니가 그녀를 보러 학교에 왔을 때, 병이 발작하여 기절하게 되었다. 그때, 길을 가던 이천성이 뛰어와 응급처치를 하고 할머니를 업고서 병원까지 뛰어갔다.
그날은 유난히 햇살이 눈부셨던 하루였다. 그날 이천성은 병원의 복도에 서서 소이녕에게 자신은 의대 학생이라고, 소이녕에게 할머니의 상황에 따른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그날 소이녕은 처음으로 한 남자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도 의대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녀는 이천성이 갔던 학교를 지원하고 그가 걸었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룬 지금, 그녀는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천성을 만난 것은 그녀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이천성은 그녀더러 수능 잘 보라고 했었다.
이천성은 소이녕을 깔끔한 음식점으로 데려갔다.
“뭐 먹고 싶어?”
하얀 가운을 벗으니 이천성의 인물이 더 사는 것 같았다. 그는 메뉴판을 펼치며 물었다.
“넌 단 걸 좋아했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오랜만에 보는 선배 앞이라 소이녕은 긴장되어 목소리가 떨렸다.
이때,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소이녕은 사과한 뒤,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시죠…?”
“심강운.”
“!!! 제 번호 어떻게 안 거예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와서 밥 같이 먹어.”
“…”
소이녕은 열심히 메뉴를 고르고 있는 이천성을 힐끔 보고 물었다.
“좀… 늦게 돌아가도 돼요?”
오랜만에 선배와 함께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대로 가기 미안했다.
전화 저편에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십 분 줄게.”
“네.”
“남자친구야?”
전화를 끊자 이천성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남자친구 아니에요.”
소이녕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남편이에요.”
순간 이천성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참 뒤, 그는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결혼 벌써 한 거야? 언제?”
“…어제요.”
이천성은 가볍게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너 결혼한 것도 모르고 선물을 하지 않았네. 이번 식사 한 끼로 너에게 주는 축복이라고 생각해 줘!”
말을 마친 그는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하려고 했다.
“아니에요.”
소이녕은 다급히 그를 말렸다.
“물만 마시고 갈게요. 남편이 빨리 집으로 와서 밥 먹재요.”
이천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참 뒤에 그는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사귄 지?’
소이녕은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나와 심강운은 사귄 거로 치면 하루 하고도 2시간?’
물론 그는 이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두 달 좀 넘었어요.”
이천성은 피식 웃었다.
“그것밖에 안 돼?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거짓말을 하는 소이녕은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네, 첫눈에 반했어요.”
핑크빛 입술이 따뜻한 물과 닿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젯밤 그에게서 받았던 뽀뽀가 떠올랐다.
심강운의 입술은 차갑고 딱딱해 보였지만 막상 닿으니 말랑하고 뜨거웠다…
소녀의 볼에 홍조가 내려앉았다.
이천성은 사랑하는 사람 얘기를 해서 그녀의 얼굴이 상기된 거라고 생각해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녕아!”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르고 있을 때, 강아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남편 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얘기 더 할 거야?”
소이녕은 다급히 시계를 보았다. 심강운과 통화했을 때보다 정확히 10분 지나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한 얼굴로 이천성을 바라보았다.
“선배,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얘기해요.”
이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히 가.”
음식점의 창가에 앉은 그는 소이녕이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며 검은색 BMW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행복해 보이네.’
…
“이녕아, 이건 우리 사촌오빠가 특별히 준비해준 약인데 네 남편의 눈을 치료할 수 있어.”
차를 타자마자 강아정은 약병 몇 개를 소이녕의 가방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네 남편은 몸에 하자가 있어서 자격지심이 들 수 있어. 그래서 만약 네가 이 약을 눈 치료약이라고 준다면 네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넌 이 약이 비타민이라고 말하고 먹여야 돼. 설명서랑 라벨은 다 찢어서 버렸고 복용시간이랑 양은 모두 따로 적어두었어!”
“고마워!”
소이녕은 아직도 이천성과 얘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일로 울적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약의 약효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다.
기사는 강아정을 학교 문 앞에 내려다준 뒤, 소이녕을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크고 황량한 별장 안에 심강운 한 명이 식탁에 마주앉아 있었다. 정오의 햇빛에도 그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쓸쓸한 느낌을 풍겼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소이녕은 손을 씻고 뛰어갔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 왔었어요?”
“아니.”
눈에 검은 비단을 두른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 둘밖에 없어.”
소이녕은 놀라서 하려던 말도 잊을 뻔했다.
“…우리가 다 먹지 못할 건데요.”
“그렇긴 하지.”
심강운은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주방장더러 요리를 추가하라고 했어.”
“왜요?”
심강운은 젓가락을 든 손을 내려놓더니 피식 웃었다.
“혹시 모를 일 때문에. 결혼 두 번째 날에 내 마누라가 다른 남자와 함께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는다? 사람들이 내가 당신을 굶긴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소이녕: “…”
“당신… 제가 방금 전에 음식점에 있었던 걸 알고 있었어요?”
심강운은 계속해서 음식을 집었다.
“정말 다른 남자랑 밥 먹으러 갔나 보네.”
소이녕: “…”
‘날 바보로 여기는 건가? 말속에 담긴 가시를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녀는 이렇게 빙빙 둘러 얘기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집의 음식이 맛 없어서 밖에서 먹은 것도 아니고 집에 와서 밥을 먹지 않을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우연히 병원에서 지인을 만난 게 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