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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당신 곧 지각이야

  • 남자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한기에 다이닝룸 전체가 얼어붙을 것 같았다.
  • 털썩.
  • 장씨 아줌마는 무릎을 꿇었다.
  • 그녀는 빨개진 눈시울로 말했다.
  • “죄… 죄송합니다. 사모님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건데…”
  • 심강운은 평소에 온화하고 순하지만 화만 났다 하면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 “도련님, 제가 나쁜 마음을 품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사모님이 친히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면 힘드실까 봐…”
  • 심강운은 피식 웃더니 장씨 아줌마를 힐끗 보고 말했다.
  • “그래서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새색시를 마음 편히 괴롭혔다?”
  •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 심강운의 말에 장씨 아줌마와 이씨 아줌마뿐만 아니라 소이녕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 ‘지금… 내 편을 들고 있는 거야?’
  • 장씨 아줌마는 화들짝 놀라 몸을 벌벌 떨었다.
  • “아, 아니에요… 사모님께서 준비하신 식사는 버리지 않고 저와… 이씨가 먹었어요.”
  • 그러자 심강운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 “나보다 그쪽이 더 주인 같네.”
  • 이씨 아줌마도 무릎을 꿇었다.
  • 장씨 아줌마는 무릎을 꿇은 채로 소이녕의 발치로 기어갔다.
  • “사모님,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전 사모님이 처음 오셨는데 저희가 제대로 모시지 못한 걸로 느낄까 두려워 식사 준비를 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 장씨 아줌마의 나이는 소이녕의 엄마 나이대였다.
  • 그런 그녀가 무릎을 꿇고 사정하니 소이녕이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여… 여보, 아줌마도 절 위해서 그런 건데… 당신이 제가 한 걸 드시고 싶다면 제가 또 해서 드릴게요…”
  • 말을 마친 그녀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려고 했다.
  • 심강운의 옆을 지날 때, 심강운이 그녀의 팔을 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 그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민트 향에 소이녕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 심강운은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 “방금 날 뭐라고 불렀지?”
  • 소이녕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 “여… 여보요.”
  • “아침에 뭘 준비했던 거야?”
  • “입쌀죽이랑, 계란후라이… 그리고 오이지무침이랑…”
  • 그녀의 빨개진 얼굴을 보던 심강운은 그녀의 이마에 쪽 하고 뽀뽀했다.
  • “내일도 해줘. 응?”
  • 소이녕이 물었다.
  • “그럼 오늘은…”
  • 그는 소이녕을 내려주었다.
  • “대충 먹지 뭐. 당신 곧 지각이야.”
  •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소이녕은 시계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 지각이었다.
  • ‘곧 8시잖아!’
  • 그녀는 8시에 수업이 있었다.
  • 그래서 아무렇게나 입에 쑤셔넣고 위층으로 올라가 옷과 백팩을 가지고 내려왔다.
  •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보니 장씨 아줌마는 보이지 않고 홀로 무릎을 꿇고 있는 이씨 아줌마만 보였다.
  • 검은색 비단을 눈에 두른 심강운은 느긋하게 우유를 먹고 있었다.
  •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심강운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기사가 학교까지 데려다줄 거야. 학교 끝나면 집으로 와.”
  • 소이녕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 “…고마워요.”
  • “도련님, 저한테 하신 말씀 모두 장씨에게 전했어요. 장씨가 그쪽에 솔직하게 보고하지 않을 거예요.”
  • 소이녕이 떠난 뒤, 이씨 아줌마가 입을 열었다.
  • “일어나.”
  • 심강운은 편한 자세로 휠체어에 기댔다.
  •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말이야. 장씨와 당신 모두 할아버지가 보내온 사람인데 장씨가 삼촌에게 매수되었다면서 당신은 왜 매수되지 않은 건데?”
  • 이씨 아줌마는 또 무릎을 꿇었다.
  • “다른 미션이 있는 거지?”
  • 심강운은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 “당분간은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거야. 영감이 당신을 보내 날 감시하게 했으니 사실대로 전해. 내가 소이녕의 편을 들어 장씨 아줌마를 내쫓았다고.”
  • 이씨 아줌마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알겠습니다!”
  • *
  • “고마워요!”
  • A시티 대학교 근처에 도착하자 가방을 멘 소이녕이 차 문을 열고 학교 쪽으로 뛰어갔다.
  • 아침햇살이 그녀의 묶은 머리 위로 쏟아지자 청춘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 기사는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 “도련님, 사모님이 학교와 좀 떨어진 곳에서 내렸습니다.”
  •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뭐라고 하던가?”
  • “차가 너무 눈에 띈다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게 싫다고 하셨습니다…”
  • “그래, 그럼 그렇게 해.”
  • 수업 시간과 3분 남았을 때, 소이녕이 숨을 헐떡이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 강아정이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너 왜 학교 왔어?”
  • 소이녕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 “지각이 아니어서 다행이네!”
  • 그녀는 한결같이 색 바랜 청바지와 흰 티를 입고 머리를 높게 묶고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어 결혼하기 전과 다른 점이 없었다.
  • 땀을 닦은 소이녕은 교재재와 노트를 꺼냈다.
  • “오늘 교수님이 지난번의 정리를 설명하신다고 했지?”
  • 강아정은 어이가 없었다.
  • 그녀가 알기로는 소이녕의 남편은 26살이었다.
  • 26살까지 여자 경험이 없었으니 결혼했으면 늑대로 변할 게 아닌가?
  • ‘그런데 왜 소이녕의 목에는 키스마크가 하나도 없지? 목도 쉬지 않고? 첫경험을 치르며 아파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얘는 왜 아무렇지 않게 수업 준비를 하는 거지?’
  • 강아정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 ‘소이녕의 남편은 눈만 먼 게 아니라 남자 구실도 못하는 건가? 여성상위여도… 안 되나? 그럼 이녕이 앞으로 독수공방해야 하는 거야?’
  • 강아정은 마음이 아팠다.
  • ‘이녕이가 이렇게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 그녀는 급히 비뇨기과에 근무하는 사촌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 [그쪽으로 기능이 안 되는 남자가 낫게 하는 약 없어?]
  • 사촌오빠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 [증상이 어떤데? 작거나 짧은 문제야? 아니면 발기부전이야?]
  • 강아정은 소이녕을 힐끗 보았다.
  • 소이녕은 열심히 노트에 필기하고 있었다.
  • 이런 일은 그녀가 물어도 소이녕이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강아정은 스스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 [그 문제들 다 있어. 수업 끝나고 약 가지러 갈 테니 약 준비해 줘.]
  • ‘이녕아, 언니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 *
  • 수업이 끝난 후, 강아정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소이녕더러 자신의 사촌오빠가 있는 병원에 데려다달라고 했다.
  • 다른 스케줄이 없었던 소이녕은 또 강아정이 아주 심각해 보이자 그녀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 강아정은 사촌오빠의 진료실에 들어가자 가정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소이녕은 실례가 될 것 같아 복도의 벤치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 마침 요즘 그녀가 보고 있는 웹소설이 있었다. 소설 속의 남녀 주인공은 서로 오래도록 힘들게 하다가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 “이녕아?”
  • 결혼 첫날밤이 되어 주인공들이 뜨거운 밤을 보내는 부분을 읽으려고 할 때, 그녀의 귓가에 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람들이 많이 공공장소에서 이런 야한 소설을 보고 있던 소이녕은 원래도 민망했는데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손이 떨렸다.
  • 탁.
  •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 손가락이 가늘고 긴 손이 그녀의 휴대폰을 주워 주었다.
  • “고마…”
  • 소이녕은 상기된 얼굴로 감사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이천성.
  • 하얀 가운을 입고 말쑥하게 생긴 이 남자는 소이녕의 고등학생 시절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 이천성이었다.
  • 탁.
  • 휴대폰이 또다시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