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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둘이 안 했어?

  • 말을 마친 소이녕은 부엌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고용인들은 다급히 그녀를 말리며 말했다.
  • “아니에요, 사모님.”
  • 그들이 하는 일이 바로 매일 아침마다 밥상을 차리는 것인데 소이녕이 모두 마친 걸 도련님이 안다면 그들이 일자리를 잃을 게 아닌가?
  • “사모님.”
  • 그중 한 고용인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저희 둘은 아침식사를 책임진 영양사예요. 사모님께서 처음이라 도련님 식습관도 잘 모르실 텐데 아무거나 함부로 하시면 안돼요.”
  • 다른 고용인도 맞장구를 쳤다.
  • “네, 장씨 아줌마 말이 맞아요. 사모님, 앞으로는 부엌에 들어가지 마세요. 도련님은 이런 걸 드시지 않는다고요.”
  • 장씨 아줌마는 경멸 어린 눈길로 소이녕이 한 음식을 보며 말했다.
  • “도련님은 아침에 샌드위치만 드시는데… 사모님이 하신 음식은 죽에 김치니 너무 촌스럽지 않을까요?”
  • 소이녕은 깜짝 놀랐다가 이내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두분 말이 맞아요.”
  •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에도 집에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아침식사로 이런 걸 먹지 않았었다. 그런데 심강운 같은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 한참 뒤, 소이녕은 다시 밝은 얼굴로 장씨 아줌마에게 웃어 보였다.
  • “그럼 버릴게요!”
  • 이씨 아줌마도 흠칫 놀랐다. 장씨 아줌마의 말에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소이녕은 화를 내기는커녕 자신이 한 음식을 버리겠다고까지 했다.
  •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음식을 보자 이씨 아줌마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소이녕을 말렸다.
  • “사모님, 버리면 아까우니 저희들에게 주세요. 앞으로는 음식을 하지 마시고요.”
  • 소이녕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 “네, 전 이만 올라갈게요.”
  •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코끝이 시큰했다.
  • ‘이곳은 날 반기지 않나 봐.’
  • *
  • 침실 안에서 준수한 얼굴의 남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 소이녕은 침대에 엎드린 채, 남자의 날카로운 턱선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서울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까탈스러워요? 아침이면 꼭 샌드위치를 먹어야 한다고요? 전 먹어본 적도 없는 걸 어떻게 한다고…”
  • 결혼하기 전에 집안 어른은 그녀에게 여자는 침대에서 남편을 만족시키거나 남편의 입맛을 사로잡아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 어젯밤의 일과 아침에 주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소이녕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 이제 막 결혼한 그녀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 어젯밤 심강운은 그녀에게 뽀뽀만 한 뒤, 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강운의 몸이 불편하기에 잠자리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맛을 사로잡으면 되기에.
  • 그런데 지금은 그의 입맛을 사로잡기도 그른 것 같았다.
  • ‘역시나 잠자리밖에 없는 건가?’
  • “이봐요.”
  • 그녀는 입을 삐죽 내민 채, 그의 우뚝 솟은 콧날을 보며 말했다.
  • “일어나지 않으면 뽀뽀할 거예요.”
  • 심강운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지만 그게 다였다.
  • 남자의 차갑고 준수한 얼굴을 지켜보노라니 소이녕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이고 뽀뽀하려고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 결국 그녀는 김빠진 공처럼 축 처져서 물러났다.
  • ‘됐어, 이모가 한 말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 행복한 거랑 잠자리랑은 상관이 없을 수 있어.’
  • 그러나 그녀는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 이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 이모 임연에게서 온 전화였다.
  • 소이녕은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 “이녕아, 어젯밤에 어땠어?”
  • 전화가 걸리자마자 이연은 본론부터 들이댔다.
  • 화장실의 문이 꼭 닫힌 게 아니라서 임연과 소이녕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 “뭐 없었어요.”
  • “뭐가 없었다고? 둘이 안 했어?”
  • “네.”
  • “이녕아.”
  • 전화 저편에서 임연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신분을 잊지 마. 넌 심씨 가문의 며느리야. 네가 할 일은 심씨 가문의 핏줄을 낳는 거라고. 너 2년 안에 심강운의 애를 낳기로 하고 시집간 걸 잊지 마.”
  • 소이녕은 휴대폰을 꼭 움켜쥐고 말했다.
  • “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안 잊었어요.”
  • 어제는 처음이라 경험이 없었을 뿐이었다.
  • “꼭 그이의 아이를 가질게요.”
  • 그녀의 대답을 들은 임연은 안심이 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너 호칭은 어떻게 정했어? 결혼했으니 여보, 자기 라고 해야지!”
  • 소이녕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알았어요.”
  •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소이녕은 고용인이 문을 열고 들어온 줄 알고 심강운이 깰까 봐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 그러나 나가보니 침실이 텅 비어 있었다. 침대 위의 심강운과 문 옆에 두었던 휠체어도 보이지 않았다.
  • 소이녕은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
  • 아래층의 다이닝룸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검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신비롭고 낯선 느낌을 풍겼다.
  • “사모님, 식사하세요.”
  • 소이녕이 계단을 내려오자 장씨 아줌마가 열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제가 한 음식이 사모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 그녀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은 아까 무안을 주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 소이녕은 얌전히 계단을 내려왔다.
  • 식탁 위에는 소이녕이 먹어본 적 없는 우유와 샌드위치로 짜여진 서양식 아침식사가 놓여 있었다.
  •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 때문에 소이녕은 처음 보는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반찬을 꺼냈다.
  • ‘심강운이 이런 걸 안 먹는다고 하지만 내가 먹는 건 뭐라고 하지 않겠지?’
  • 그래서 그녀는 한달음에 주방으로 뛰어가 반찬을 가져와서는 맛있게 먹었다.
  • “뭘 먹고 있는 거야?”
  • 커다란 식탁 앞에서 심강운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 소이녕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대답했다.
  • “당신이 안 좋아하는 거요.”
  • 남자는 피식 웃었다.
  • “내가 안 좋아할 거라고는 어떻게 확신하는 거야?”
  • 소이녕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 “장씨 아줌마가 그랬어요.”
  • 그러자 멀리 떨어져 있던 장씨 아줌마는 몸이 흠칫 떨렸다.
  • 눈을 가리고 있는 남자는 우아하게 우유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 “장씨 아줌마가 그렇게 말했다고?”
  • “네.”
  •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 “그런데 냉장고에 왜 내가 안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거지?”
  • 소이녕은 조금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 “제가… 당신의 취향을 모르고 준비했어요. 당신이 이렇게 촌스러운 걸 안 드신다는 걸 몰라 평소에 제가 먹던 대로 준비한 거예요.”
  • “그랬군.”
  • 심강운은 여유가 넘치는 움직임으로 우유 잔을 내려놓았다.
  • 유리가 식탁과 부딪히며 챙그랑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위험한 기운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장씨 아줌마는 하마터면 무릎을 털썩 꿇을 뻔했다.
  • 심강운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내가 당신이 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줄은 나조차도 몰랐네.”
  •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소이녕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심강운은 그녀의 앞에 놓인 음식을 가져갔다.
  • 심강운은 안 보이는 척 젓가락으로 더듬거리다가 이내 음식을 정확하게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그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낯선 맛이었다. 달짝지근하면서 새콤하고 매콤했다.
  • “솜씨가 좋군.”
  • 그는 우아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장씨 아줌마는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 ‘이른 아침부터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와 나더러 뭐라고 한 게 다 장씨 아줌마 때문이었군?’
  • 남자의 말속에 담겨 있는 한기에 장씨 아줌마는 몸을 흠칫 떨고는 저도 모르게 이씨 아줌마의 뒤에 숨었다.
  • 심강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앞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 해명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