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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쓸데없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거든요

  • 영은이 이준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방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주상열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 “어서 나와서 누가 왔는지 좀 봐!”
  • 이준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양어머니의 성격은 여전히 이다지도 화끈했다. 곧이어 안쪽에서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저 여편네가 왜 저래? 평일에도 술을 못 마시게 하면서, 오늘 딸내미 약혼 날에도 술을 못 마시게 해?”
  • 이내 건장하고 새카만 얼굴의 남자가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욕을 하며 걸어 나왔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
  • “오늘 저승사자가 온다고 해도 말릴 생각 마셔…….”
  • 곧 이준이 그를 불렀다.
  • “아버지.”
  • 주상열은 고개를 들어 이준의 얼굴을 보더니 몸을 살짝 떨었다.
  • 탁!
  •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담뱃대를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한번 꼬집더니 곧바로 이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고 싶은 말은 수천 가지가 스쳤지만, 종국에는 한 마디 소리만 내뱉었다.
  • “돌아왔구나.”
  •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 “다녀왔습니다.”
  • 이준이 대답했다.
  • 아버지 주상열은 눈이 벌게져서는 불끈 쥔 주먹으로 이준의 가슴팍을 힘껏 쳤다.
  • “단단해졌네, 키도 컸고.”
  • “몇 년간 군대에 있었으니 당연하죠.”
  • 영은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 “무슨 소리야. 삐쩍 말랐구먼, 이거 봐요.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 상열은 그저 하하 웃었다. 그는 단단하고 센 팔로 이준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다 문득 녀석이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남자가 다 됐네!’
  • “가자, 아비랑 술 한잔해야지!”
  • “좋습니다.”
  • 이준은 아버지 상열과 함께 아무 말 없이 안쪽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사랑에 말은 필요 없었다. 동작 한번, 술 한잔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 이준이 오자 각자 이야기를 나누던 친지들도 모두 이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갔다.
  • “쟤가 양아들이지? 10년 전에 군대에 말뚝 박겠다고 집 나가더니 왜 돌아온 거래?”
  • “왜겠어? 군인 못 해 먹겠나 보지. 어휴, 초라한 행색 좀 봐.”
  •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내가 진작 그랬잖아.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 “저놈이 하영이랑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며. 그래서 주 씨가 둘이 맺어주려고도 했었고. 하영이가 저 녀석한테 시집 안 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애 앞길 망칠 뻔했어.”
  • “허허, 하영이 결혼할 남자는 좋은 집안에서 자란 청년이야. 저런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랑은 비교도 안 되지.”
  • “내 말이! 주 씨네 부부만 저리 애지중지하지, 아무도 안 반가워!”
  • 친척들은 여기저기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떠들썩하던 잔치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다.
  • 생사의 문턱을 여러 차례 넘겼던 이준에게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되려 늘 호탕하고 직설적인 어머니 영은이 나섰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무서운 기세로 사람들에게 욕을 한바탕해댔다. 누구라도 혀를 더 놀렸다가는 영은이 발 씻은 물까지 내어와 쏟아부을 기세였다.
  • 아버지 주상열은 코웃음을 한번 치고 이준의 손을 잡아끌며 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
  • “가자. 아버지랑 같이 주인 자리에 앉자. 한잔 제대로 해야지!”
  • “아빠!”
  • 이 자리의 주인공이었던 하영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 주인 자리에는 모두 높은 사람들만 앉아 있었다. 그런 자리에 이준을 데리고 가다니 그녀로서는 너무도 창피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하영은 속으로 씩씩거리며 주변의 손님들에게 상냥한 인사말을 건넸지만, 이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마치 공기처럼 대했다.
  • “오, 예비 신랑 오셨네요.”
  • “축하해요. 행복하게 사세요.”
  •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 때마침 사람들 사이로 여기저기 축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수트에 구두까지 멋있게 빼입은 예비 신랑 손명헌이 하영과 팔짱을 끼고 나타났고, 사람들에게 술을 따르고 감사 인사를 돌렸다.
  • 그의 등장에 주변 분위기가 순간 밝아졌다. 하영이 손명헌처럼 잘생기고 돈 많은 남편감을 데려오니, 일부 친척들은 그녀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자신은 박복하다느니 팔자가 좋지 않다느니 끊임없이 불평만 해댔다.
  • “소개할게. 이쪽은 내 신랑이 될 손명헌 씨야.”
  • 하영은 이준의 앞에서 고고한 백조처럼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 “이쪽은 조이준. 아버지 양아들이야.”
  • 이준은 다소 씁쓸했다. 자신을 항상 졸졸 쫓아다니던 그 아이가 이제는 ‘오빠’라고 조차 부르려 하지 않았다.
  • “어?”
  • 명헌은 정신을 가다듬고는 이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도 예전에 어딘가에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영과 그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하영의 아버지 주상열은 그 때문인지 사위가 될 자신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 ‘이런 녀석이 무슨 자격으로 나의 연적이 된다는 거야?’
  • “하영이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저희 약혼 파티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명헌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얼굴로는 상냥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사람을 비웃는 듯 보였다.
  • “저 손명헌, 손씨 그룹의 아들이자 현재 회사의 부사장입니다. 연봉은 한 3억 정도 됩니다만, 곧 아버지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을 예정이니, 반드시 하영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 그는 무슨 주권을 선언하듯 하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승리의 자세를 취했다.
  • “군인이셨다고요? 장교까지 하신 건가요? 음, 보아하니 아닌 것 같군요. 그랬다면 퇴역하지 않으셨겠죠. 그런데 요즘 세상은 학벌도 기술도 없으면 앞날이 암담합니다.”
  • 주상열이 탁자 위에 술잔을 쿵 내려놓으며 언짢은 말투로 대꾸했다.
  • “자네가 입 다물고 있다고 벙어리라 생각할 사람 없어.”
  • 시가 총액이 그래봤자 30여억 원쯤 하는 중소기업 정도로 무슨 허세를 부리며 ‘손씨 그룹’이니 뭐니 하는지, 누가 봐도 일부러 허세를 부리며 이준을 호되게 밟아주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한눈에 봐도 손명헌이라는 녀석은 어딘가 심보가 삐뚤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이준이는 내 아들이야. 어떤 모습으로 있든 자네가 왈가왈부할 필욘 없어.”
  • “장인어른, 그저 관심과 호의를 표한 것뿐인걸요.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 손명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그는 한결 더 호기롭게 옆에 있던 이준에게 말했다.
  • “조이준 씨, 모두 한 가족인데 제가 몇 마디 좀 했다고 기분 나쁘신 거 아니죠?”
  • 그러자 이준은 귀에서 이어폰을 빼더니 눈을 깜빡이며 대꾸했다.
  • “뭐라고 하셨죠?”
  • 곧 명헌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 ‘이 자식이…….’
  • 하영이 화를 냈다.
  • “너무 무례한 거 아냐? 명헌 씨가 애써 신경 써서 몇 마디 해줬는데 아예 듣지도 않은 거야?”
  • “죄송해요, 직업병입니다.”
  • 이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지개를 한번 켰다.
  • “상관없는 쓸데없는 소리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인생 낭비거든요.”
  • “당신…….”
  • 명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 ‘애써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줬더니, 전혀 듣고 있지 않았어? 뭐 하는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