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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10년의 세월이 변화무쌍하구나

  • “나진강, 딱 한 번 만 말한다. 나 조이준의 집은 장릉 단 한 곳뿐이야. 경도에 있는 조씨 집안, 그리고 그 대단하신 조왕과 난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이준의 눈빛은 평온하고 말투도 지극히 차분했지만, 마주한 사람에게는 마치 험준하고 높은 산과 같은 압박감을 주어 숨이 턱 막히게 했다.
  • “네, 잘 알겠습니다, 대장님.”
  • 진강은 그의 위엄에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 “출발해. 도착하면 말해줘.”
  • 동양진 살구마을.
  • 이준의 양부인 주상열의 일가는 이곳에 살고 있다. 이준에게 이곳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10년간 군 생활을 하는 중에도 따뜻하고 작은 이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수없이 꾸었다.
  • 10년의 세월이 변화무쌍하다.
  • 익숙한 얼굴들은 모두 늙었고, 새로운 얼굴들은 그에게 낯설기만 했다. 기억 속의 들판에는 공장과 현대식 아파트들이 들어서 예전의 그 느낌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 어릴 적 그는 이 들판에서 연을 날리고, 귀뚜라미를 잡고, 또 여름에는 과일 서리를 하기도 하며, 물고기를 잡았고, 겨울에는 새를 사냥하거나 눈을 구경하곤 했다.
  • 초봄이면 곳곳에 살구꽃이 찬란하게 피어 꽃 바다를 이룰 만큼 그 아름다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 애주가였던 아버지 주상열은 매년 이맘때면 이준에게 ‘거금’을 건네주며 살구꽃으로 직접 빚은 술을 사 오도록 했고, 남은 돈은 심부름 값으로 주곤 했다. 이준은 하영과 함께 그 돈으로 사탕이나 쫀드기, 붉은 머리끈, 새총 따위를 샀다.
  • 어린 시절은 정말 행복했다.
  • “벌써 10년이 흘렀네. 내가 돌아왔어.”
  • 이준은 마음을 추스르고 하하 한번 웃었다. 주상열의 집에서 멀지 않은 길목에 다다라서야 이준은 차에서 내렸다. 진강은 이준의 가족과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눈치 빠르게 차를 끌고 떠났다.
  • 길목에서 30분은 멈칫거리던 이준은 겨우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무슨 잔치를 하고 있는 듯 앞마당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 “고모님 먼저 얘기들 나누세요. 저는 다른 친척분들께 인사 좀 드릴게요.”
  • “그럼. 우리 하영이가 약혼하는데, 오늘 다들 많이 마시라고. 술도 고기도 넘쳐나니까.”
  • 그때, 마흔 살 안팎의 한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마당을 나왔다. 그녀는 이준을 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너는…….”
  • “어머니.”
  • 이준은 눈앞의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가볍게, 또 약간은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주름이 많아지셨네요. 머리도 세었고.”
  • 그녀는 이준의 양모인 유영은이었다.
  • “아니, 이 총각이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유영은은 당황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 “나한테 이렇게 큰 아들이 어디 있다고. 나는 딸 하나밖에 없어.”
  • “어머니, 겨우 몇 년 떠나 있었다고 아들도 잊으셨어요?”
  • 이준이 가볍게 웃으며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어머니의 굳은살과 검버섯이 난 두 손을 잡았다.
  • “제가 선물한 옥 팔찌 아직도 하고 계셨네요. 그때 이거 사려고 보름간 물건 날랐다가 어깨가 다 빠질 뻔했다고요.”
  • “너, 이준이구나!”
  • 유영은은 입을 크게 벌린 채 한동안 이준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왈칵 쏟았다.
  • “이 녀석, 돌아왔구나. 10년이나 어딜 갔었어? 엄마 안 보고 싶었어?”
  • 유영은은 이준의 가슴을 치며 애통해했다. 이준은 그 우람한 체구로 움직이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얼굴에 행복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 “어머니, 그래서 돌아왔잖아요.”
  • 이준은 시끌벅적한 마당을 바라보며 물었다.
  • “어머니, 집이 왜 이렇게 시끌벅적해요? 무슨 경사라도 났어요?”
  • 영은은 눈물을 닦으며 감격하고 기뻐하며 말했다.
  • “응. 하영이 그 녀석이 시집을 곧 시집을 가. 오늘이 약혼 축하연이야. 딸은 시집을 보내고, 아들은 돌아왔네. 아주 겹경사구나!”
  • 이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하영이 그 계집애 올해가 벌써 스무 살일 테니, 벌써 결혼하는구나. 시간이 참 빠르다.’
  • 어릴 적 양아버지 주상열이 이준과 하영을 극구 끌어들여 짝을 맺어주려 했고, 우애가 깊은 두 사람을 본 주변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곤 했지만, 이준은 하영을 줄곧 여동생으로만 생각했다. 이준의 생각을 잘 아는 주상열도 결국 더 고집할 수는 없었다.
  • “어서, 이준아 어서 들어와!”
  • 영은이 이준을 끌며 멀리서부터 사람들에게 외쳤다.
  • “하영아, 얼른 누가 왔는지 좀 봐라. 네 오빠, 네 오빠가 왔어.”
  • 마당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아리따운 여자가 곧바로 걸어 나왔다.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그 계집애가 어느새 반듯한 여인이 되어 곧 시집을 간다고 한다.
  • “하영아, 오랜만이야.”
  • 이준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 “응.”
  • 하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에는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아니 오히려 경계와 혐오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이 오빠란 사람은 더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인 것만 같았다. 이준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수많은 축복의 말들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순간 눈앞에 서 있는 하영이 너무도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 “하영아, 왜 그래? 네 오빠가 왔는데 그게 무슨 태도니?”
  • 영은은 그녀를 살짝 나무랐다. 그러자 하영은 짜증을 내며 이준을 흘끗 바라보더니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 “그럼 어떻게 대해야 하는데? 10년 전에 아무 말도 없이 떠나더니, 또 아무 말도 없이 돌아왔어. 우리 집이 무슨 여관이야? 아니면 뭐 내가 레드카펫이라도 깔고 반갑게 환영해 줘야 해?”
  • 하영은 이준을 매섭게 한번 쳐다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하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나쁜 놈, 하필 내 약혼 날에 돌아오는 건 또 뭐야? 금의환향해서 떵떵거리며 돌아오면 또 뭐랄까. 왜 저런 궁상맞은 꼴로 돌아와서 사람 심기를 건드려? ’
  • “너, 너 이 녀석…….”
  • 영은이 화를 내려 하자 이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 “어머니, 괜찮아요. 그때 떠난 건 제가 잘못한 게 맞아요. 하영이 저를 탓하는 것도 당연하죠.”
  • 영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내쉬었다. 이준은 멀지 않은 곳에서 하영이 친지들과 싹싹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바라보았다.
  • ‘예전에 내 뒤에 숨어서 남자아이들과 한마디라도 하면 얼굴이 새빨개지던 그 하영이가 맞나?’
  • 이준은 놀라며 한마디 했다.
  • “정말 세월이 많이 변했구나.”
  • “영감탱이, 술 좀 그만 쳐드시고 얼른 나와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