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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내일 이곳을 떠나도 돼

  • “만약 저희 도련님이 이따가 사모님한테 가면을 벗기라고 시켜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 진미선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서늘하고 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 “이모님,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저 여자 필요 없어요.”
  • 진미선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도련님, 어르신께서 도련님을 위해 신경 써서 고른 신부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 이번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앞으로 다시는 신붓감을 찾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 “똑같은 말을 이미 아홉 번이나 하셨어요.”
  • 박하준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차가웠지만 서이현을 내쫓지는 않았다.
  • “일단 나가보세요.”
  • “네, 도련님.”
  • 진미선은 방을 나서면서 방문을 굳게 닫았다. 박하준은 그제야 휠체어를 돌려 서이현 곁에 다가왔고 하얀 면사포를 머리에 쓴 서이현을 보며 할아버지가 언제까지 이런 의미 없는 행동을 할지 마음이 갑갑했다.
  • 박하준의 할아버지만 아직도 이런 정략결혼을 고집하고 있다.
  •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이미 박씨 가문에 들어온 박하준의 아홉 번째 신부인데 이 여자도 기절한 앞선 여덟 명의 여인들과 크게 다를 건 없을 것이다.
  • 박하준은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은 채 면사포를 거두었고 그 순간, 그의 눈앞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서이현이 나타났다.
  • 박하준은 서이현의 미소에 흠칫 놀란 듯했다.
  • 여덟 명의 신부들과 첫만남을 가지면서 박하준에게 미소를 보인 여인은 처음이었다.
  • “내일 바로 이곳을 떠나도 돼.”
  • 박하준은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면사포를 바닥에 툭 던지면서 말했다.
  • 전생에서도 박하준은 서이현의 면사포를 벗기며 똑같은 말을 했었지만 그때 당시 지적 장애를 앓고 있던 서이현은 혼인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으며 예쁘고 못생긴 것을 구분할 줄도 몰랐다.
  • 그때 당시 서이현은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기에 박하준은 그런 서이현에게 겁을 주려고 바로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 하지만 서이현은 화상을 크게 입은 박하준의 얼굴을 보며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프지 않냐고 물었으며 심지어 상처 부위를 입으로 호 불기도 했다.
  • 그 순간, 박하준은 서이현이 지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박하준은 서이현을 매몰차게 쫓아내지 않았다.
  • 서이현을 곁에 남긴 박하준은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서이현을 지켰고 서이현이 원하는 건 그게 뭐든 무조건 들어주었다.
  • 그때는 서이현이 전생에서 누린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고 박하준도 서이현과 함께한 그 순간들이 제일 행복했다.
  •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이현이 정상인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게 변해버렸다.
  • 이런저런 추억에 잠겨 있던 서이현은 갑자기 박하준의 품에 와락 안기더니 박하준을 꽉 잡은 채 말했다.
  • “전 안 가요. 당신이 날 아무리 욕하고 때려도 전 절대 아무데도 안 갈 거예요. 전 하준 씨 곁에 남아서 평생 하준 씨와 함께할 거예요.”
  • “난 장애인이야.”
  • “상관없어요.”
  • 서이현의 단호한 대답에 박하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 “저를 내쫓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하준 씨가 저를 사랑하게 만들 거예요.”
  • 고개를 든 서이현은 박하준을 지그시 바라보았지만 박하준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 “우리 할아버지가 너한테 얼마를 줬길래 이러는 거야?”
  • 이 여자가 큰돈을 받지 않고는 절대 이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다.
  • “제가 좋아서 하준 씨와 결혼한 거예요. 전 할아버지한테서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 서이현이 진지하게 대답했지만 박하준은 전혀 믿지 않았다.
  •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 박하준에게 시집온 앞선 여덟 명의 여인들은 전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하룻밤 사이에 그녀들 집안에서는 갑자기 서울에서 회사를 차렸다.
  • 그런데 이 여자는 할아버지한테서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