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강, 딱 한 번 만 말한다. 나 조이준의 집은 장릉 단 한 곳뿐이야. 경도에 있는 조씨 집안, 그리고 그 대단하신 조왕과 난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준의 눈빛은 평온하고 말투도 지극히 차분했지만, 마주한 사람에게는 마치 험준하고 높은 산과 같은 압박감을 주어 숨이 턱 막히게 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대장님.”
진강은 그의 위엄에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출발해. 도착하면 말해줘.”
동양진 살구마을.
이준의 양부인 주상열의 일가는 이곳에 살고 있다. 이준에게 이곳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10년간 군 생활을 하는 중에도 따뜻하고 작은 이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수없이 꾸었다.
10년의 세월이 변화무쌍하다.
익숙한 얼굴들은 모두 늙었고, 새로운 얼굴들은 그에게 낯설기만 했다. 기억 속의 들판에는 공장과 현대식 아파트들이 들어서 예전의 그 느낌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릴 적 그는 이 들판에서 연을 날리고, 귀뚜라미를 잡고, 또 여름에는 과일 서리를 하기도 하며, 물고기를 잡았고, 겨울에는 새를 사냥하거나 눈을 구경하곤 했다.
초봄이면 곳곳에 살구꽃이 찬란하게 피어 꽃 바다를 이룰 만큼 그 아름다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애주가였던 아버지 주상열은 매년 이맘때면 이준에게 ‘거금’을 건네주며 살구꽃으로 직접 빚은 술을 사 오도록 했고, 남은 돈은 심부름 값으로 주곤 했다. 이준은 하영과 함께 그 돈으로 사탕이나 쫀드기, 붉은 머리끈, 새총 따위를 샀다.
어린 시절은 정말 행복했다.
“벌써 10년이 흘렀네. 내가 돌아왔어.”
이준은 마음을 추스르고 하하 한번 웃었다. 주상열의 집에서 멀지 않은 길목에 다다라서야 이준은 차에서 내렸다. 진강은 이준의 가족과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눈치 빠르게 차를 끌고 떠났다.
길목에서 30분은 멈칫거리던 이준은 겨우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무슨 잔치를 하고 있는 듯 앞마당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고모님 먼저 얘기들 나누세요. 저는 다른 친척분들께 인사 좀 드릴게요.”
“그럼. 우리 하영이가 약혼하는데, 오늘 다들 많이 마시라고. 술도 고기도 넘쳐나니까.”
그때, 마흔 살 안팎의 한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마당을 나왔다. 그녀는 이준을 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어머니.”
이준은 눈앞의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가볍게, 또 약간은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름이 많아지셨네요. 머리도 세었고.”
그녀는 이준의 양모인 유영은이었다.
“아니, 이 총각이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영은은 당황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나한테 이렇게 큰 아들이 어디 있다고. 나는 딸 하나밖에 없어.”
“어머니, 겨우 몇 년 떠나 있었다고 아들도 잊으셨어요?”
이준이 가볍게 웃으며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어머니의 굳은살과 검버섯이 난 두 손을 잡았다.
“제가 선물한 옥 팔찌 아직도 하고 계셨네요. 그때 이거 사려고 보름간 물건 날랐다가 어깨가 다 빠질 뻔했다고요.”
“너, 이준이구나!”
유영은은 입을 크게 벌린 채 한동안 이준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 녀석, 돌아왔구나. 10년이나 어딜 갔었어? 엄마 안 보고 싶었어?”
유영은은 이준의 가슴을 치며 애통해했다. 이준은 그 우람한 체구로 움직이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얼굴에 행복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어머니, 그래서 돌아왔잖아요.”
이준은 시끌벅적한 마당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머니, 집이 왜 이렇게 시끌벅적해요? 무슨 경사라도 났어요?”
영은은 눈물을 닦으며 감격하고 기뻐하며 말했다.
“응. 하영이 그 녀석이 시집을 곧 시집을 가. 오늘이 약혼 축하연이야. 딸은 시집을 보내고, 아들은 돌아왔네. 아주 겹경사구나!”
이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영이 그 계집애 올해가 벌써 스무 살일 테니, 벌써 결혼하는구나. 시간이 참 빠르다.’
어릴 적 양아버지 주상열이 이준과 하영을 극구 끌어들여 짝을 맺어주려 했고, 우애가 깊은 두 사람을 본 주변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곤 했지만, 이준은 하영을 줄곧 여동생으로만 생각했다. 이준의 생각을 잘 아는 주상열도 결국 더 고집할 수는 없었다.
“어서, 이준아 어서 들어와!”
영은이 이준을 끌며 멀리서부터 사람들에게 외쳤다.
“하영아, 얼른 누가 왔는지 좀 봐라. 네 오빠, 네 오빠가 왔어.”
마당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아리따운 여자가 곧바로 걸어 나왔다.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그 계집애가 어느새 반듯한 여인이 되어 곧 시집을 간다고 한다.
“하영아, 오랜만이야.”
이준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응.”
하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에는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아니 오히려 경계와 혐오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이 오빠란 사람은 더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인 것만 같았다. 이준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수많은 축복의 말들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순간 눈앞에 서 있는 하영이 너무도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하영아, 왜 그래? 네 오빠가 왔는데 그게 무슨 태도니?”
영은은 그녀를 살짝 나무랐다. 그러자 하영은 짜증을 내며 이준을 흘끗 바라보더니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럼 어떻게 대해야 하는데? 10년 전에 아무 말도 없이 떠나더니, 또 아무 말도 없이 돌아왔어. 우리 집이 무슨 여관이야? 아니면 뭐 내가 레드카펫이라도 깔고 반갑게 환영해 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