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유미는 우아하고 대범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곧 메뉴가 들어오고 자리를 뜨려던 최시한은 처음으로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시한 씨, 가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스미스 사모님이 야릇한 눈빛으로 최시한을 바라보았다.
최시한은 굳은 얼굴로 란유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맛있는 음식에 정신이 팔린 란유미는 수저를 들어 음식들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연신 감탄했다.
“스미스 사모님, 여기 음식들 진짜 맛있네요.”
생전 미식가로 불리던 란유미는 여유시간에 맛집 투어도 많이 했었다.
‘이 집 음식 진짜 괜찮네.’
최시한은 갑자기 집에 요리사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여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고 최시한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치 빠른 스미스 사모님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태 최시한과 교류해 오면서 오늘 같은 모습은 처음 본 그녀였다.
“소윤 씨, 난 먼저 가볼게요.”
란유미는 아쉬운 표정으로 스미스 사모님을 배웅했다. 최시한은 대뜸 그녀의 팔목을 잡고 차에 올라 별장으로 돌아왔다.
“최시한, 당신 뭐 하는 거예요?!”
란유미가 손목에 난 자국을 살피며 언성을 높였다.
최시한이 대꾸하려는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윤아, 왜 그래?”
할머니 최 여사가 지팡이를 짚고 진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란유미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최시한 가까이 다가가 애교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려는데 최시한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최 여사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온 최 여사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란유미는 최시한의 앞을 막아섰다.
최시한은 최 여사가 가장 아끼는 손자였다. 최 여사도 진짜 때릴 마음은 없었다. 노인은 소윤이 최시한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오해하지 마세요. 아까는 최… 아니 이 사람이랑 장난으로 그런 거예요.”
최 여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최시한을 한번 쏘아보고는 지팡이를 내려놓더니, 다시 다정한 눈길로 란유미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윤아, 시한이 성격이 원래 이래. 시한이가 서운하게 하더라도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마.”
최시한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불만은 조금 누그러든 상태였다.
란유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 여사까지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나한테 잘해 주시니까. 이 정도야 뭐.’
최 여사가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래, 소윤아.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말다툼할 때가 있잖아.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같이 사는데 서로 이해해야지. 이 할미는 증손주를 손꼽아 기다린단다.”
란유미:”…”
란유미는 그냥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란유미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침실로 들어갔다. 최시한이 웃통을 벗은 채로 걸어들어오자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옷을 입었을 땐 말라 보이더니 벗으니까 몸매가 예술이네.’
건강미 넘치는 피부 결, 선이 분명한 복근, 완벽한 옆라인. 최시한은 고귀한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한창 넋을 놓고 감상하고 있던 란유미는 힘껏 고개를 흔들고 나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다 봤어?”
최시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허튼 생각하지 마. 저번에 했던 짓, 또 한 번 하면 바로 던져버릴 테니까.”
란유미가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서더니 팔짱을 꼈다.
“여보, 자기가 몸매 좋고 잘생긴 건 인정하겠는데 난 관심 없거든요? 자아도취도 이만하면 병이에요. 치료가 필요하다고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눕더니 최시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금 휴식이 필요했다. 내일이 첫 출근이다. 활기찬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굳은 얼굴을 한 최시한은 천천히 다가가 란유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란유미도 이번에는 양보 없이 최시한의 배를 걷어찼다. 복부는 누구에게나 취약한 부위이다. 무방비상태로 당한 최시한은 끙하고 신음 하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발을 잡고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순간 란유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분노에 찬 눈길로 최시한을 쏘아보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최시한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란유미는 체력적으로 따라가기 힘들 뿐 싸움은 꽤 잘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매번 어렵게 빠져나오면 최시한은 다시 가볍게 그녀를 제압했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그녀도 포기한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최시한의 괴물 체력은 따라갈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알람이 울리자 란유미는 곧장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문 앞에 있는 람보르기니에 올라탔다. 뒤따라 차에 오르려던 최시한은 란유미를 보자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내려.”
최시한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말투로 명령했다. 란유미는 교활한 눈빛을 빛내더니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 같은 방향이잖아요. 그러니까 나 좀 태워 주면 안 돼요?”
최시한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그래, 태워 줄게. 지옥 끝까지 가보자, 오늘.”
말을 마친 그가 란유미의 팔목을 낚아챘다.
“잠깐, 잠깐. 나 그냥 내릴게요. 왜 아침부터 이렇게 까칠해요? 난 자상한 여보가 좋은데.”
그러면서 초롱초롱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녀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유난히 돋보였다. 최시한은 그녀를 놓아주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재촉했다.
“빨리 내려. 나 바빠.”
란유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택시를 잡고 회사까지 가려면 백 프로 지각할 판이었다. 첫 출근부터 지각을 할 수는 없었다. 이때,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녀는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소리 질렀다.
“여보, 나 배 아파요. 빨리 회사에 데려다줘요. 화장실이 급해요.”
최시한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집에도 화장실 있잖아.”
“그러면 지각할 텐데, 내가 혼났으면 좋겠어요?”
란유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애교를 부렸다. 한평생 부릴 애교를 오늘 다 부린 것 같았다. 최시한은 못 말린다는 듯이 천천히 차에 올랐다. 란유미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실랑이질을 벌여야 할 줄 알았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그녀는 일부러 최시한과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어느새 차는 최식 그룹에 도착하고 란유미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안내데스크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디자인팀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제야 부찬이 매번 최시한과의 대결에서 완패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회사 규모로 보나 개인 능력으로 보나 부찬은 최시한의 상대가 전혀 아니었다.
디자인팀 사무실.
오 부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의 자리로 데려간 뒤, 서류 한 묶음을 건네고는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황급히 자리를 떴다.
란유미는 핸드백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그러고는 서류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윤아, 디자인팀에 입사한 걸 축하해. 나 너무 기뻐.”
임연아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자 옆에 있던 여직원이 란유미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소윤 씨, 연아 언니랑 친해요?”
란유미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왜 오 부장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