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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자아도취도 병이에요

  • 란유미는 우아하고 대범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곧 메뉴가 들어오고 자리를 뜨려던 최시한은 처음으로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 “시한 씨, 가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 스미스 사모님이 야릇한 눈빛으로 최시한을 바라보았다.
  • 최시한은 굳은 얼굴로 란유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맛있는 음식에 정신이 팔린 란유미는 수저를 들어 음식들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연신 감탄했다.
  • “스미스 사모님, 여기 음식들 진짜 맛있네요.”
  • 생전 미식가로 불리던 란유미는 여유시간에 맛집 투어도 많이 했었다.
  • ‘이 집 음식 진짜 괜찮네.’
  • 최시한은 갑자기 집에 요리사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여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고 최시한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눈치 빠른 스미스 사모님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태 최시한과 교류해 오면서 오늘 같은 모습은 처음 본 그녀였다.
  • “소윤 씨, 난 먼저 가볼게요.”
  • 란유미는 아쉬운 표정으로 스미스 사모님을 배웅했다. 최시한은 대뜸 그녀의 팔목을 잡고 차에 올라 별장으로 돌아왔다.
  • “최시한, 당신 뭐 하는 거예요?!”
  • 란유미가 손목에 난 자국을 살피며 언성을 높였다.
  • 최시한이 대꾸하려는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윤아, 왜 그래?”
  • 할머니 최 여사가 지팡이를 짚고 진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 란유미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최시한 가까이 다가가 애교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려는데 최시한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최 여사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온 최 여사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란유미는 최시한의 앞을 막아섰다.
  • 최시한은 최 여사가 가장 아끼는 손자였다. 최 여사도 진짜 때릴 마음은 없었다. 노인은 소윤이 최시한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할머니, 오해하지 마세요. 아까는 최… 아니 이 사람이랑 장난으로 그런 거예요.”
  • 최 여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최시한을 한번 쏘아보고는 지팡이를 내려놓더니, 다시 다정한 눈길로 란유미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소윤아, 시한이 성격이 원래 이래. 시한이가 서운하게 하더라도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마.”
  • 최시한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불만은 조금 누그러든 상태였다.
  • 란유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 여사까지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할머니가 나한테 잘해 주시니까. 이 정도야 뭐.’
  • 최 여사가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 “그래, 소윤아.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말다툼할 때가 있잖아.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같이 사는데 서로 이해해야지. 이 할미는 증손주를 손꼽아 기다린단다.”
  • 란유미:”…”
  • 란유미는 그냥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란유미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침실로 들어갔다. 최시한이 웃통을 벗은 채로 걸어들어오자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옷을 입었을 땐 말라 보이더니 벗으니까 몸매가 예술이네.’
  • 건강미 넘치는 피부 결, 선이 분명한 복근, 완벽한 옆라인. 최시한은 고귀한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한창 넋을 놓고 감상하고 있던 란유미는 힘껏 고개를 흔들고 나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 “다 봤어?”
  • 최시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 “허튼 생각하지 마. 저번에 했던 짓, 또 한 번 하면 바로 던져버릴 테니까.”
  • 란유미가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서더니 팔짱을 꼈다.
  • “여보, 자기가 몸매 좋고 잘생긴 건 인정하겠는데 난 관심 없거든요? 자아도취도 이만하면 병이에요. 치료가 필요하다고요!”
  • 말을 마친 그녀는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눕더니 최시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금 휴식이 필요했다. 내일이 첫 출근이다. 활기찬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 굳은 얼굴을 한 최시한은 천천히 다가가 란유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란유미도 이번에는 양보 없이 최시한의 배를 걷어찼다. 복부는 누구에게나 취약한 부위이다. 무방비상태로 당한 최시한은 끙하고 신음 하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발을 잡고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 순간 란유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분노에 찬 눈길로 최시한을 쏘아보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최시한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란유미는 체력적으로 따라가기 힘들 뿐 싸움은 꽤 잘하는 편이었다.
  • 그녀가 매번 어렵게 빠져나오면 최시한은 다시 가볍게 그녀를 제압했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그녀도 포기한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최시한의 괴물 체력은 따라갈 수 없었다.
  • 이튿날 아침, 알람이 울리자 란유미는 곧장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문 앞에 있는 람보르기니에 올라탔다. 뒤따라 차에 오르려던 최시한은 란유미를 보자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 “내려.”
  • 최시한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말투로 명령했다. 란유미는 교활한 눈빛을 빛내더니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여보, 우리 같은 방향이잖아요. 그러니까 나 좀 태워 주면 안 돼요?”
  • 최시한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 “그래, 태워 줄게. 지옥 끝까지 가보자, 오늘.”
  • 말을 마친 그가 란유미의 팔목을 낚아챘다.
  • “잠깐, 잠깐. 나 그냥 내릴게요. 왜 아침부터 이렇게 까칠해요? 난 자상한 여보가 좋은데.”
  • 그러면서 초롱초롱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녀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유난히 돋보였다. 최시한은 그녀를 놓아주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재촉했다.
  • “빨리 내려. 나 바빠.”
  • 란유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택시를 잡고 회사까지 가려면 백 프로 지각할 판이었다. 첫 출근부터 지각을 할 수는 없었다. 이때,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녀는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소리 질렀다.
  • “여보, 나 배 아파요. 빨리 회사에 데려다줘요. 화장실이 급해요.”
  • 최시한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 “집에도 화장실 있잖아.”
  • “그러면 지각할 텐데, 내가 혼났으면 좋겠어요?”
  • 란유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애교를 부렸다. 한평생 부릴 애교를 오늘 다 부린 것 같았다. 최시한은 못 말린다는 듯이 천천히 차에 올랐다. 란유미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실랑이질을 벌여야 할 줄 알았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 그녀는 일부러 최시한과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 어느새 차는 최식 그룹에 도착하고 란유미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안내데스크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디자인팀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제야 부찬이 매번 최시한과의 대결에서 완패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회사 규모로 보나 개인 능력으로 보나 부찬은 최시한의 상대가 전혀 아니었다.
  • 디자인팀 사무실.
  • 오 부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의 자리로 데려간 뒤, 서류 한 묶음을 건네고는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황급히 자리를 떴다.
  • 란유미는 핸드백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그러고는 서류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윤아, 디자인팀에 입사한 걸 축하해. 나 너무 기뻐.”
  • 임연아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자 옆에 있던 여직원이 란유미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 “소윤 씨, 연아 언니랑 친해요?”
  • 란유미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왜 오 부장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 ‘네 짓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