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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부찬과의 재회

  • 순간, 란유미는 놀라서 온몸이 경직됐다.
  • 이건 소윤의 신분으로 환생한 후, 처음 부찬과 대면하는 자리였다. 올블랙 슈트 차림의 부찬은 차갑고 음침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평소에 알고 있던 매너 있고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 ‘아마 이 얼굴이 저 자식 진짜 얼굴이겠지.’
  • 부찬은 엄숙한 표정으로 란유미의 얼굴을 훑었다. 우아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여자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음산한 눈빛은 부찬을 집어삼킬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 란정혁은 부찬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란유미에게 말했다.
  • “우리 유미의 친구였구나. 그렇다면 아까 했던 말은 못 들은 거로 하마. 유미는 이미 죽었어. 경찰도 자살로 결론을 내렸고. 난 이미 딸을 잃었고 그래서 지금 이런 근거도 없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 예상 못 했던 란유미는 슬픈 느낌보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전생은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었으니까.
  • 남편에게 능욕당하고 동생에게 비참하게 살해 당하고 아버지마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 ‘다들…내가 잘 죽었다고 생각하나?’
  • 한편 그녀가 죽은 란유미의 친구라는 얘기를 들은 부찬은 잠시 생각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 “유미의 친구였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전에 유미한테 이런 친구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봐서.”
  • 그녀의 눈빛이 강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부찬이 증오스러웠다. 부찬이 온화한 표정으로 “유미”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낼 때 란유미는 이 자식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 란유미의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은 마치 불에 휩싸인 봉황처럼 시니컬한 아름다움과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란유미가 슬픈 말투로 이야기했다.
  • “부 대표님, 저랑 유미는 몇 번 일면식이 있는 사이일 뿐이에요. 유미한테 제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버려서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 말을 마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부찬이 담담히 답했다.
  • “그랬군요. 아가씨께서 유미를 이렇게 그리워하는 것을 알면 많은 위로를 받을 겁니다. 혹시 아가씨의…”
  • 그가 그녀의 이름을 캐물으려던 찰나, 갑자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최시한은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화를 억누르는 듯한 그 눈빛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야수를 방불케 했다.
  • 주변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 란유미도 그를 발견했다. 마침 빠져나갈 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시한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온화하게 부찬과 작별 인사를 하고 역겨움과 증오를 내리누른 채 아무 일도 없는 척 고개를 돌려 최시한에게 다가갔다.
  • 그녀의 굳은 표정이 최시한에게는 부찬과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한테 들켜서 잔뜩 짜증이 나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소!윤!”
  • 남자의 어두운 눈빛이 마치 올가미처럼 그녀를 덮쳤다.
  • ‘큰일 났네!’
  • 그녀는 그제야 부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 란유미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갑자기 두 팔을 벌려 최시한의 품에 안기더니 두 팔로 그의 단단한 어깨를 꼭 끌어안고 흐느꼈다.
  • “훌쩍훌쩍…자기, 저 너무 슬퍼요. 유미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너무 가슴이 아파요… 저 좀 안아 줘요. 부탁이에요…”
  • 최시한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 부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최시한과 여자를 번갈아 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 “소윤, 내 몸에서 떨어져!”
  • 여자의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가슴에 닿았고 보들보들한 손이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순간 은은한 꽃향기가 최시한의 코끝에 닿았다…최시한은 저도 몰래 어젯밤 일이 떠올라서 잠시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 란유미는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부찬 저 자식만 아니었다면 죽었다가 깨도 이 얼음덩어리 같은 남자에게 먼저 접근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 염탐하듯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지자 란유미는 곧장 최시한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미안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미안해요.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 어쩔 수 없었다. 과거의 소윤은 항상 이렇게 얼빠지고 불안정한 성격이었으니까.
  • 올 때 얼음창고에 갇힌 느낌이었다면, 돌아가는 길은 지옥 입구를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최 여사마저 그들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몇 번이나 물으려고 했지만, 최시한이 시종일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끝내는 말을 걸지 못했다.
  • 조수석에 앉은 란유미는 냉랭하면서도 따가운 분위기 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 ‘최시한이 이렇게까지 소윤을 싫어하는데 그냥 이혼을 제기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 소윤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번 생의 란유미는 남녀 사이의 감정에 대해 눈곱만치도 관심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에 그들의 혼인은 결국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소문에 최시한도 결혼 전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했다. 소윤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를 찢어놓은 여자… 생각만 해도 죄책감이 들었다.
  • 그녀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차창 밖으로 거대한 광고 전광판이 스치고 지나갔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화사한 젊은 여자가 비단결 같은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짝 올린 입꼬리, 반짝이는 눈매, 광고 속 여자는 마치 숲속의 요정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 스크린에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 란지희, 부식 기업과 손을 잡고 글로벌 최고의 패션을 만든다!”라는 오색찬란한 광고 글이 쓰여 있었다.
  • ‘역겨워!’
  • 스치듯 지나간 전광판은 란유미의 심경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 ‘유명 디자이너? 도용 디자이너겠지! 글로벌 최고의 패션을 만든다고? 너희들 따위가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 부찬은 성공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고 오로지 눈앞의 권력과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란지희는 분수도 모르고 높은 곳만 바라보는, 하지만 그에 비해 능력은 부족한 멍청한 여자였다. 그녀의 작품을 도용한 것 외에 이렇다 할 작품도 없었다. 일시적으로 자신의 예전 작품을 도용했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 건 없었다. 란유미는 죽었고 더는 새로운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란지희도 더는 도용할 작품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패션 업계는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고 십 년, 이십 년… 그녀를 능가하는 작품은 끝없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때 가서 도용만 할 줄 아는 란지희가 무슨 작품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 란유미는 조용히 앉아 어떻게 이 연놈들을 골탕 먹일지 곰곰이 고민하고 있었다.
  • 별장에 돌아온 뒤, 여자들이 차에서 내리자 최시한은 차를 돌려 회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순간, 임연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무거운 표정으로 최시한을 불렀다.
  • “최 대표님, 저희 쪽에서 힘들게 스미스 사모님을 위해 제작한 드레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 최시한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 “어떻게 된 일이지?”
  • 임연아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최시한 눈치만 살피며 우물쭈물했다. 최시한이 차갑게 쏘아보자 그녀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버벅거리며 입을 열었다.
  • “전에 드레스를 집에 가져온 적이 있는데 소윤이가 너무 예쁘다면서 한번 입어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러다 사고가 생겨서 드레스 넥라인이 찢어지고… 커피를 옷에 쏟는 사고까지…”
  • 그 말을 들은 최시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 그 드레스는 세계 유명 디자이너 에릭이 두 달이나 공을 들여 스미스 사모님을 위해 제작한 중요한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 한 벌에 최식 기업과 스미스 기업 간의 중요한 협상이 달려 있었다.
  • 에릭은 해외에 칩거하고 있어 그가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 한 벌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수많은 재벌 사모님들이 에릭이 직접 만든 드레스 한 벌 입어 보는 것을 꿈꾼다. 그의 모든 드레스는 은사나 금사로 정교하게 박음질한, 그 가치가 상당한 예술 작품이었다.
  •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디자인 의뢰를 받을 때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었다. 만약 그가 싫다고 하면 아무리 무릎 꿇고 사정한들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 이번 드레스는 임연아가 직접 프랑스까지 날아가서 어렵게 사정해서 구한 드레스였다.
  • “에릭한테는 연락해 봤어?”
  • 임연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요. 에릭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아요. 그 비서가 답장을 했는데 저희더러 알아서 하라네요. 하지만 회사에는 이 드레스를 수선할 만한 인재가 없어요. 3일 뒤면 스미스 사모님께서 회사를 방문하실 텐데, 어떡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