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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임연아를 응징하다

  • “너, 최씨 가문을 떠나고 싶어?”
  • 귓가에서 남자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란유미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 남자의 숨결이 닿았던 귀가 따갑고 간지러웠다. 최시한은 긴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며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 “소윤, 너 예전의 그 소윤 맞아?”
  • 순간 란유미는 숨 막히는 공포를 느꼈다.
  • 란유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당신, 그게 무슨 뜻이죠? 난… 난 당연히 소윤이죠. 아니면 내가 누구겠어요?”
  • ‘설마… 설마 내가 진짜 소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챈 건 아니겠지?’
  • 최시한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청순하고 단아한 얼굴에 그는 적지 않게 놀랐다. 예전에 그의 곁을 맴돌던 소윤은 항상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는 짙은 고딕 메이크업을 하고 다녔다. 최시한은 그런 그녀가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그 시절 소윤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 외에 패션 디자인 쪽으로는 문외한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최시한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자였다.
  • 입담이 오늘처럼 좋았던 적도 없었다.
  • 란유미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 “최시한 당신,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죠?”
  • “에릭의 취향과 습관에 대해선 어떻게 안 거야?”
  •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 “그건… 여보, 우리 엄마가 패션 디자이너셨잖아요. 그래서 엄마한테서 에릭에 관한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저희 엄마가 에릭의 열성 팬이셔서 매일 에릭 얘기를 입에 달고 사셨거든요. 그래서 안 보고도 외울 지경이 됐죠.”
  • 란유미는 이런 변명이 제발 통하길 바라며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 ‘이 정도면 최시한도 믿겠지?’
  • 최시한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전에 조사했던 바에 따르면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소윤의 모친은 생전에 확실히 디자이너로 활동했었다.
  • 남자가 손에 힘을 풀자 란유미는 귀신이라도 본 듯 얼른 자리를 떴다. 그녀는 이리저리 둘러보는 척 그에게서 슬금슬금 도망쳤다.
  • ‘제길, 이곳에 더는 못 있겠어!’
  • ‘이혼! 무조건 이혼해야 해!’
  • “최 대표님, 진 관장님 오셨습니다.”
  • 임연아가 중년의 남자와 함께 걸어 들어왔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최시한이 본론을 얘기했다.
  • “진 관장님, 이건 제가 직원을 시켜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에릭 선생의 드레스입니다. 혹시 에릭 선생의 작품이 맞는지 봐주실 수 있나요?”
  • “이 드레스가요?”
  • 진 관장이 마치 뭔가 잘못 봤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드레스를 건네 받은 진 관장은 디자인과 박음질 부분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진 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임연아는 다가가서 재촉했다.
  • “에릭 선생님 작품 맞죠? 틀림없을 거예요. 이건 제가 에릭 선생님 비서한테 직접 부탁해서 맞춤 제작한 드레스거든요.”
  • 진 관장이 고개를 저으며 유감스럽다는 듯이 답했다.
  • “이건 에릭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는 이런 바느질 기법을 쓰지 않아요. 에릭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바느질 기법을 사용합니다. 그건 어떤 디자이너도 모방할 수 없는 거예요. 그 바느질 기법이 에릭의 트레이드마크거든요. 다른 건 모르겠고 바느질 기법만 봐도 이건 에릭의 작품이 아닙니다.”
  • 임연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드레스를 자세히 살피더니 진 관장의 팔을 붙잡고 따졌다.
  • “그럴 리 없어요. 바느질 기법이 뭐가 중요해요? 옷을 만드는 과정은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 독창적인 바느질 기법이 어디 있어요? 전 그런 말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요.”
  • 그런 임연아를 쳐다보는 진 관장의 눈빛에 경멸과 혐오가 스쳤다.
  • ‘패션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그 유명한 에릭의 바느질 기법도 몰라?’
  • “못 들어 봤다는 건 아가씨께서 식견이 짧고 배운 것이 없어서 그런 거죠. 다른 사람도 못 알아볼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임연아의 발언에 진 관장도 까칠하게 답했다.
  • 임연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최시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 이 드레스는 그녀가 직접 가서 공수해 온 것이다. 회삿돈 몇 억을 들여 사 온 드레스가 에릭 작품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렇게 많은 돈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에릭의 작품이 아니라면 이 드레스를 사 온 의미가 없어진다.
  • 그리고… 그녀가 아까 했던 호언장담은 소윤을 최씨 가문에서 쫓아내지 못했을 뿐더러 자신이 이 집과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 진 관장이 손을 들어 최시한과 작별 인사를 했다.
  • 최시한은 여태 침묵을 지키고 선 란유미를 돌아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 진 관장은 에릭과 접촉했던 사람이고 에릭의 바느질 기법에 관해서만 설명했다. 하지만 소윤은 에릭의 취향까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에릭이 보석 중에 다이아몬드를 싫어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까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 남자의 뜨거운 시선에 란유미는 야수에게 쫓기는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 ‘설마 아직도 못 믿는 건가?’
  • 소윤의 모친은 유명한 디자이너였고 여느 디자이너처럼 에릭의 작품을 좋아했다.
  • 하지만 란유미가 에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원인은 소윤의 모친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실 란유미는 에릭에 대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래전 그녀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이미 소년 에릭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디자인을 공부했고 영감을 공유했으며 함께 옷을 제작했다…
  • 나중에 에릭은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멀었던 그녀는 서슴없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국내에 남아 부찬의 회사를 도왔다.
  • 에릭은 그녀에게 많은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는데 란씨 가문 그녀의 드레스룸에 있는 드레스 중 최소 백여 벌이 에릭의 작품이었다.
  • 한때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지금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지금은 그의 드레스 한 벌 구하려고 수많은 재벌 2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 임연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최시한을 향해 사과했다.
  • “죄, 죄송합니다… 최 대표님, 옷이 가짜일 줄 저도 몰랐네요. 분명 에릭의 비서와 연락이 닿았는데, 죄송합니다…”
  • “지금 와서 죄송하다고 한들 뭐가 달라져? 변호사와 경찰에 연락해서 그 에릭의 비서를 사칭한 사람을 찾아 손해배상을 청구해. 그리고 넌 오늘부로 해고야. 회사는 이 정도 상식도 없는 디자이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 임연아는 가슴이 철렁해서 얼른 절망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최시한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려 차를 타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 임연아는 분노에 찬 눈길로 옆에 있는 란유미를 노려보았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 최씨 가문에서 쫓아낼 작정으로 시작한 일인데, 소윤은 무사하고 오히려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은 격이 되었다.
  • ‘안 돼! 절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어!’
  • 임연아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부친은 최씨 가문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최식 기업 원로급 임원이었다. 임연아는 졸업 후 최씨 가문에 남아 열심히 일했고 틈만 나면 본가에 찾아와서 최 여사를 챙겼다. 이미 최씨 가문 하인들은 그녀를 예비 사모님으로 높이 모시고 있었고 최 여사도 그녀를 각별히 아꼈다.
  • ‘만약, 소윤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 임연아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그녀는 이대로 질 수 없었다. 아직 3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만약 3일 이내에 에릭의 작품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분명 최시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임연아는 더는 이곳에서 시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란유미를 힘껏 흘겨보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녀가 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도박에서 진 그녀는 회사에서 사직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패션 업계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다.
  • 란유미는 그런 임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안목도 없는 임연아는 일류 디자이너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 최식 기업은 X 시티 일류의 대기업에 속한다. 그리고 패션 디자인과 판매는 최식 기업의 주 경영항목이었다. 슬하에 여러 계열사를 두고 있지만, 패션 디자인과 유행 선도를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중 몇몇 브랜드들은 국제 명품 브랜드에 속해있었는데 비록 Dior, Chanel, LV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십여 년의 브랜드 문화를 갖고 있었고 수백만의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X 시티에서 유일하게 최식 기업과 견줄만한 기업이 부식 기업이었다.
  • 최시한을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부찬은 틈만 나면 최시한의 회사를 골탕 먹이고 싶어 했다. 그는 수하에 천재적 재능을 갖춘 디자이너들을 키우고 세계 각지에서 유명 디자이너들을 스카우트하여 심혈을 기울여 몇 개 브랜드를 출시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최시한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 란지희, 애초에 란유미의 디자인을 도용해놓고 역으로 란유미를 모함한 여자. 그녀 때문에 란유미는 어쩔 수 없이 패션계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지금 란지희는 유명 디자이너가 되어 부찬의 회사에 입사했고 디자인팀 본부장직을 맡고 있다.
  • 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재미있는 법.
  • ‘만약 내가 최식 기업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