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2화 배신

  • “어머! 소윤아, 왜 그래?”
  • 란유미가 화장실을 나서자 귓가에 웬 여자의 앙칼진 비명이 들렸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임연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란유미가 입고 있는 얇은 잠옷 원피스로 시선이 향하더니 질투의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란유미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금세 표정을 바꾸고 관심 조로 물었다.
  • “소윤아, 너랑 최 대표님…너 진짜 최 대표님 음식에 약을 탔어?”
  • 임연아가 일부러 목청 높여 소리 질렀다. 별장에는 그들 외에 수많은 하인이 살고 있었다. 평소에 묵묵히 일만 하는 그들이었지만 임연아의 고함을 듣자 경멸에 찬 눈빛으로 란유미를 바라보았다.
  • 란유미는 입술을 깨물며 곁눈질로 임연아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눈여겨보았다.
  • 이 몸은 원래 주인의 기억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임연아라는 여자는 최씨 가문에서 소윤의 유일한 절친이었다.
  • “최시한은 내 남편이야. 내가 약까지 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 임연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 “아니, 소윤아 난 그 뜻이 아니라…너 진짜 최 대표님하고 잤어?”
  • “그래.”
  • 순간 임연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란유미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바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질투와 미움의 감정들이 미친 듯이 퍼지고 있었다.
  • 이런 차림으로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진 란유미는 옷깃을 여미더니 임연아를 향해 물었다.
  • “나 이제 방으로 돌아갈 건데, 다른 일 없지?”
  • 소윤과 최시한은 한방을 쓰지 않았다.
  • “그럼 일찍 쉬어. 여사님께서 내일 최 대표님이랑 함께 부식 그룹 사모님 란유미의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하셨어. 비록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오랜 라이벌 관계이긴 하지만, 여사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신 그 사모님이랑 일면식이 있는 사이라며 같이 가 보라고 하셨어.”
  • 란유미는 심장이 멎을 듯 아파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 장례식…
  • “소윤아, 왜 그래?”
  • “괜찮아, 난 방으로 돌아갈게.”
  • 란유미는 지금 이 여자와 가식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기분이 아닌지라, 비틀거리며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등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임연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소윤 이 멍청이가 오늘따라 나한테 왜 이렇게 까칠하지? 설마, 뭔가 눈치라도 챈 건가?’
  • 방으로 돌아온 란유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곧장 침대로 가서 누웠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탈진해버릴 것만 같았다.
  • 아픈 기억이 파도처럼 몰려와 그녀를 집어삼켰다.
  • “찬아, 제발 나 좀 내보내 줘.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약속할게.”
  • 컴컴한 지하실, 란유미가 초라한 몰골로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녀의 하얗고 가녀린 손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는데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손목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 그녀의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자상한 얼굴을 한 악마였다. 그는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유미야, 날 탓하지 마.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그래.”
  •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란유미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가 또다시 애원했다.
  • “그럼 나 좀 풀어 줘. 제발 부탁이야…”
  • “풀어줄 수야 있지. 옷 다 벗고 회사 앞에 무릎 꿇고 날 사랑한다고 외쳐. 온 세상을 향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외치란 말이야!”
  • 부찬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 “부찬, 이 변태 같은 자식. 너 천벌 받을 거야…”
  • 그 뒤로 육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부찬은 란유미를 차가운 쇠 침대에 묶어놓고 낮에는 수면제를 먹인 뒤 그녀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출근하러 나갔다. 밤에 퇴근해서 돌아오면 그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그녀에게 과도한 양의 흥분제를 먹인 뒤,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 반년이 지나자 란유미는 거의 산송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의식이 흐릿한 채 끝을 알 수 없는 나날들을 버텨야 했던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제발 놓아달라고 부찬에게 애원하는 것뿐이었다.
  • 그녀는 그토록 자상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던 남자가 결혼하고 나서 왜 이토록 무시무시한 악마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 후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부찬은 점점 더 짜증스럽게 변해갔다. 심지어 그녀가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간섭했고 그녀에게 변태적인 소유욕과 통제 욕구를 내비쳤다. 그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날은 혹독한 벌과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옷을 다 벗기고 집 밖에 내쫓은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문밖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수법은 점점 더 잔인해졌고, 란유미는 집 밖을 나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관리비 때문에 방문했던 경비실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날, 그녀는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 그녀는 집에 지하실이 있다는 사실을 그날에야 알았다. 지하실은 습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벽에는 온갖 간담을 서늘케 하는 도구들이 걸려 있었고 구석에는 크고 작은 인형들이 쌓여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몸통이 반 토막이 난 기괴한 모습의 인형들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공허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그녀는 인형의 얼굴을 확인하러 가까이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최시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그녀는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 최시한은 그녀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최씨 가문 대표이자, 전도가 유망한 사업가인 그는 부씨 가문의 오래된 라이벌이었다.
  • 부찬은 어렸을 때부터 최시한과 경쟁하면서 컸다. 하지만 매번 두 사람의 대결은 최시한의 승리로 끝났다. X 시티 언론들은 그들을 놓고 비교하는 기사를 쏟아내는 것을 즐겼다.
  • 최시한을 향한 부찬의 미움은… 란유미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 또 얼마나 지났을까. 란유미는 매일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만 바라보며 지냈다. 눈물은 이미 말라버린 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녀의 동생 란지희가 지하실로 뛰어 들어와 그녀를 구출했다.
  • “언니, 형부가 언니한테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어요…”
  • 란지희가 그녀를 안고 오열했고 란유미는 간만에 느끼는 혈육의 정에 가슴이 뭉클했다. 오열하는 란지희를 보자 란유미는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팠다. 그녀는 지희가 비록 자신의 디자인을 도용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지희가 자신의 작품을 도용했던 사실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 란유미를 부축해 부씨 가문 본가를 빠져나온 란지희는 곧장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했다.
  • 하지만, 금방 지옥에서 탈출한 그녀는 또 다른 지옥의 구렁텅이로 추락하고 있었다.
  • “언니, 나 이제 더는 못 버틸 거 같아요. 언니는 뭐든 용서하겠다고 했잖아요. 나한테 뭐든 다 해 준다면서요? 그럼 심장을 나에게 줘요. 나 죽고 싶지 않아요. 진짜 죽고 싶지 않아요…”
  • “스승님께서 내년 열리는 세계 디자인 공모전에 날 추천했단 말이에요. 대회를 위해서라도 난 살아야 해요. 언니, 언니도 언니의 작품이 이대로 묻히는 걸 원하지 않잖아요? 걱정하지 마요. 언니가 심장을 나한테 준다면 언니 작품으로 국제무대까지 올라갈게요…”
  • 란지희는 처음에는 부탁하는 말투였다가 점점 앙칼진 목소리로 변해갔다.
  • ICU 병실 안, 의식이 몽롱한 상태인 란유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경악했다.
  • ‘지희야, 너 지금 뭐라는 거야?’
  • 란지희는 어려서부터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수년간 이식할 심장을 못 찾아서 날이 갈수록 허약해졌다. 의사는 그녀가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 했다.
  • 그랬기 때문에 란유미는 이복동생인 란지희를 각별히 아꼈다. 어려서부터 뭐든 동생에게 양보했고 심지어 자신의 디자인이 도용당했을 때도 화 몇 마디 내고 그쳤다.
  • 그런 란지희가 지금 자신의 심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 란유미는 있는 힘껏 란지희를 밀치며 실망한 목소리로 절규했다.
  • “나가!”
  • “언니, 미안하게 됐어요.”
  • 란지희는 이제 그녀가 듣든 말든 상관없는 듯했다. 어차피 병실에는 둘만 있었으니까.
  • 란지희의 창백한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는 탁자에 있던 주사기를 집어 들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심장을 이식받을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매일 약을 먹지 않아도 되고 가슴 졸이며 이식할 심장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매일 밤 저승사자가 찾아올까 공포에 떨 필요도 없다. 란지희는 사는 게 너무 무서웠다.
  • 의사는 그녀가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녀는 스물다섯 살을 넘긴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 그녀는 아직 젊었고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연애도 하고, 취직도 하고, 성공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알콩달콩 살고 싶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란유미는 독한 마음을 먹고 란유미의 목덜미에 주사기를 꽂았다.
  • 란유미는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미 반년 동안 부찬의 괴롭힘을 당하느라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뚱아리는 전혀 란지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 바람 불면 쓰러질 것만 같았던 그녀의 여린 동생이, 두 눈에 살기를 품고 그녀의 목에 주사기를 꽂고 약물을 주사하고 있었다.
  • 란유미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거의 의식을 잃어가던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붉은색 정장 차림을 한 부찬이 걸어들어왔다.
  • ‘찬아, 살려 줘…’
  • 부찬이 나타나자 란유미의 마음속에 또다시 희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부찬은 그녀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 “형부, 오셨어요?”
  • 란지희가 순진무구한 말투로 물었다.
  • “유미는 좀 어때?”
  •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형부, 언니 못 깨어날 것 같아요…”
  • 병상 가까이 다가온 부찬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차갑게 한마디 뱉었다.
  • “그럼 계속 자게 놔둬. 심장이 중요하니까. 의사한테 이식수술 준비하라고 이를게.”
  • 란유미의 마지막 한 가닥 남았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 그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어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고, 몸은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가, 서서히 차갑게 식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