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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사기꾼

  • 란유미는 어색함을 감추고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는 두 팔로 최시한의 목을 끌어안고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여보, 뭐가 그렇게 급해요? 천천히 해도 되는데.”
  • 최시한이 급기야 똥 씹은 표정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살기를 내뿜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 “소윤, 너 내려와!”
  • 란유미는 못 들은 척 침대에 앉아서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소윤은 보는 남자마다 군침을 흘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만은 예외였다.
  • “내려와. 두 번 얘기하게 하지 마. 가만 안 둬.”
  • 최시한이 재차 경고했다.
  • “가만 안 두면요. 당신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생긴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여보, 나 안 내려갈래요. 할머니가 옆방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당신이 나랑 자기 싫다면 나도 강요는 안 하겠지만, 나 바닥에서 못 자요.”
  • ‘웃기는 소리 하고 있어.’
  • ‘침대를 놔두고 내가 왜 바닥에서 자? 멍청이도 아니고.’
  • 예전의 소윤이라면 이 정도 했으면 고분고분 내려갔겠지만 란유미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 최시한은 이불째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매정하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밝게 미소 짓고 있던 란유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비록 이불을 감싸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팠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최시한을 쏘아보았다.
  • 란유미는 말없이 팔을 들어 힘껏 잡아당겼다. 무방비상태로 있던 최시한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 ‘제길! 최시한 이 교활한 자식. 떨어져도 혼자 안 떨어지겠다 이거야?’
  •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고 단단한 그의 하반신에 닿았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다가 발을 헛디디며 최시한의 품에 쓰러졌다.
  • 이때, 방문이 열렸다.
  • 문밖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최 여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하던 거 계속하렴. 난 이만.”
  • 란유미가 변명도 하기 전에 문은 이미 닫혀버렸다. 최시한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힘껏 밀쳤다. 바닥에 부딪힌 란유미는 통증에 이마를 찌푸렸다.
  • ‘그래, 네가 이겼다.’
  • 어차피 최 여사도 내일이면 돌아갈 것이고 하루쯤 바닥에서 잔다고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녀는 이 몸의 안전을 위해 한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 란유미는 점심이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그녀는 곧장 일어나서 디자인을 다시 검토했다. 스미스 사모님이 도착할 날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빨리 드레스 제작을 마무리해야 했다.
  • 그녀는 샤워를 마친 뒤 옷장을 열었다. 수많은 옷이 걸려있었지만 그걸 본 란유미는 표정을 찌푸렸다.
  • ‘참 싼 티 나는 취향이군.’
  • 하지만 지금은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청바지에 간단한 맨투맨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다. 이렇게 꾸미고 보니 전혀 유부녀 티가 나지 않았다.
  • 란유미는 택시를 잡아 타고 시내로 나와 작은 가게에 들어섰다. 매장 직원이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 “예약하고 오신 건가요?”
  • 이곳은 전생에 그녀가 다녀갔던 곳이다. 드레스 제작은 완벽하리만치 정교했지만, 사장이 교활한 사기꾼이라 옷 한 벌 제작하려면 거액의 돈을 지급해야 했다.
  • “예약 없이 왔어요.”
  • “죄송합니다. 저희 사장님은 예약 없이 온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 직원이 여전히 미소를 띈 채 답했다.
  • 란유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탁자에 놓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 “여기 60억 선불금이 들어있어요. 사장님 좀 만나게 해줘요.”
  • 직원은 공손하게 그녀를 이끌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화려한 인테리어들은 전부 이곳 사장이 손님들에게서 갈취한 돈으로 장만한 것이다. 란유미는 언젠가는 이곳을 철저히 무너뜨리리라 결심했다.
  • 온화하게 생긴 남자가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 “제가 엄진입니다. 하지만 전에 만나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오셨죠?”
  • 란유미는 디자인 도안을 탁자에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
  • “최고급 원단으로 만들어 주세요.”
  • 디자인 도안을 집어 든 엄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야릇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 “이 드레스라면 60억으로 부족하겠는데요?”
  • “그럼 얼마가 더 필요해요?”
  • 사실 드레스는 심플하고 대범한 디자인이었다. 일반 재봉 점이라면 기껏해야 10억 정도에 그녀가 원하는 정교한 드레스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 ‘60억도 부족하다고? 강도가 따로 없네.’
  • 엄진이 능글맞게 답했다.
  • “60억 추가로 더 주셔야 합니다.”
  • 란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하루 안에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원하는 만큼 드릴게요.”
  • 엄진의 눈에 교활한 빛이 스쳤다. 그는 란유미를 자세히 훑더니 명함을 내밀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하루 뒤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이건 제 연락처예요. 앞으로 또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 란유미는 명함을 받아들고 미소 지었다.
  • “좋아요. 먼저 선불로 60억을 드릴게요. 다음날 옷을 찾으러 왔을 때 다른 문제가 없으면 잔금을 입금하도록 하죠.”
  • 협상이 끝난 뒤 그녀는 카드로 60억을 지불했다. 매장 직원이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는 가슴이 쓰라렸다.
  • ‘옷 한 벌에 120억을 날리게 생겼네.’
  • 란유미는 무거운 심정을 안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임연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 “최 대표님, 에릭이 절 만나 주지 않아요. 스미스 사모님이 곧 도착하실 텐데, 다 제 잘못이에요.”
  • 임연아는 귀여운 얼굴로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만큼 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란유미마저도 마음이 약해져 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 최시한이 차갑게 답했다.
  • “앞으로 회사엔 나오지 마. 직원들한테는 네가 스스로 사직한 거로 얘기할게.”
  • 란유미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최시한은 일반인이 아니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얼음덩어리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뻔했다.
  • 그녀는 조용히 가던 길을 갔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임연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 “소윤, 다 네 탓이야. 너만 아니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어. 우린 절친이었잖아.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 임연아는 손톱이 팔뚝에 박힐 정도로 손에 힘을 주었다. 란유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뿌리치자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렸다.
  • ‘디자이너가 아니라 배우를 할 것이지.’
  • “임연아, 드레스는 네가 에릭의 작품이라고 구해 온 거야. 내가 짝퉁이란 걸 밝힌 것도 널 위해서였어. 스미스 사모님같이 고귀한 분이 에릭의 작품을 못 알아볼 리 있겠어? 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나를 천하의 나쁜 년으로 몰아가는구나. 이게 무슨 절친이야?”
  • 란유미의 한마디 한마디가 임연아의 정곡을 찔러서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 ‘소윤 이년은 언제부터 이렇게 머리가 좋아진 거지?’
  • 임연아가 흐느끼며 변명했다.
  • “소윤아, 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 란유미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임연아는 조바심에 미칠 것만 같았다.
  • “그럼, 사람을 죽여놓고 경찰한테 가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하면 경찰이 널 용서해 준대?”
  • 란유미가 팔짱을 꼈다.
  • “난 그렇게 못 해.”